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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비잔티움 성화상 논쟁과 교회 미술: 십자가와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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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8 ㅣ No.954

비잔티움 성화상(聖畵像) 논쟁과 교회 미술 : 십자가와 성 에우스타키우스(St. Eustachius)의 환시*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성화상 논쟁 시기에 비잔티움의 교회 미술이 겪게 된 변화양상을 다루고 있다. 최근 발견된 카파도키아 지역의 비잔티움 교회에는 성화상 논쟁 시기에 제작된 회화작품이 상당수 보존되어 있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성화상 논쟁 직후에 제작된 작품들도 남아있어 성화상 논쟁을 둘러싼 비잔티움 교회 미술 연구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논문은 선행 연구자들이 산발적으로 제시한 각 작품에 대한 개별적 자료를 종합하여, 성화상 논쟁 시기의 비잔티움 교회 미술의 전개양상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어떠한 스타일의 문양이 어디에 언제 그려졌다는 기초자료의 보고가 아니라, 당대의 종교 · 정치적 상황과 지적 지형의 큰 틀 안에서 미술작품의 의미와 제작, 그리고 영향을 분석한다.

 

카파도키아 지방의 다울루 킬리세나 하기오스 바실리오스 성당의 예는, 성화상 파괴주의가 표면적으로는 교회에서 성화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을지라도, 성화상에 대한 욕구와 신심 자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음을 보여준다.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는 카파도키아의 수도자들은 사람의 형상 대신 식물과 동물 문양, 그리고 기하학적이거나 장식적인 문양, 그리고 십자가라는 추상적 애니코니즘 상징을 통해 비잔티움 교회 미술의 명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도상을 발전시켜 성화상 파괴주의에 대항하였다. 이는 종교적 성찰을 떠나, 시각 이미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욕구에 결부된 문제로서, 인간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미지의 창조, 즉 회화적 표현이 인간 존재 조건의 근본적 요소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I. 들어가는 말

 

726년, 비잔티움 제국에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황제 레오 3세(Leo III, 재위 717~741)가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입구, 칼케(Chalke)를 장식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 황금 성화(聖畵)를 파괴한 것이다. 칼케는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로서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칼케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성화상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중요한 종교적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초상을 성문에서 제거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역사상 매우 이례적이고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레오 3세는 신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금지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이후 대대적인 성화상 파괴가 제국의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이는 성화상을 제거하는 데만 국한되지 않고 성인(聖人)의 유해를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고,1) 심지어 수도원을 부수고 성화상 옹호자를 사형에 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2)

 

종교미술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것은 종교탄압의 한 형태로서 현대에도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거니와3),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통(Orthodox)임을 자처하던 비잔티움 제국에서 그리스도교 미술을 파괴하였던 사건은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성화상 파괴주의와 성화상 옹호론을 둘러싼 성화상 논쟁(Iconoclast Controversy, 726~843)의 전개양상과 신학적 성찰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는 비잔티움 역사학자와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많은 연구가 진척되었다.

 

하지만 정작 성화상 논쟁 시기의 미술작품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이고 개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주요 그리스 도시에 성화상 논쟁 시기의 작품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4) 성화상 논쟁 시기에 비잔티움의 교회미술은 대체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었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최근 발견된 카파도키아 지역의 비잔티움 교회에는 성화상 논쟁 시기에 제작된 회화작품이 상당수 보존되어 있음이 밝혀졌으며,5) 또한 성화상 논쟁 직후에 제작된 작품들도 남아있어6) 성화상 논쟁을 둘러싼 비잔티움 교회 미술 연구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본 연구는 선행 연구자들이 산발적으로 제시한 각 작품에 대한 개별적 자료를 종합하여, 성화상 논쟁 시기의 비잔티움 교회 미술의 전개양상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떠한 스타일의 문양이 어디에 언제 그려졌다는 기초자료의 보고가 아니라, 당대의 종교 · 정치적 상황과 지적 지형의 큰 틀 안에서 미술작품의 의미와 제작, 그리고 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II. 비잔티움 성화상 논쟁 - 교부(敎父)들의 사상

 

성화상 논쟁에 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가 진행되어왔고 그 결과도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비잔티움 회화의 전개 양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직접 관련되는 부분, 특히 성화상 옹호자들의 사상을 주로 언급하고자 한다.

 

성화상 옹호자들은 성화상 파괴주의에 대항하는 이론적 뒷받침을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사상에서 끌어냈다. 2차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과 8~9세기 비잔티움 신학자들이 참여한 당시의 논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교회 미술의 제작과 사용(또는 공경)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성화상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미지’였고,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그리고 인간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초기 교회의 위대한 교부(敎父)인 성 대(大) 바실레이오스(Βασίλειοςὁ Μέγας, 329~379)는7) 그의 스물네 번째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8) “성자(聖子)는 성부(聖父)로부터 나시고(γεννητως) 성부와 같은 본성(ϕυσικως)을 지니신다. 성자는 성부의 이미지(모상)이므로 성부와 다른 점이 없으며, 성부로부터 나셨으므로 성부와 동일한 본성을 지니신다” 그는 또 “그리스도는 황제 중의 황제이신 하느님의 이미지(모상)이다 …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빛나는 영광의 이미지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저서 《성령론》(De Spiritu Sancto)에서는, “마치 왕의 초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 이미지에게 바쳐진 공경은 원형에게로 돌아간다(η της εικόνος τιμή επί το πρωτότυπον διαβαίνει)”고 서술하였다.9) 이 구절은, ‘성부의 이미지인 성자’,10)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흠숭과 공경은 결국 성부께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비잔티움의 성화상 옹호자들은 성 아타나시오스(Αθανάσιος, 293~373)의 사상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황제와 그의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성 대 바실레이오스뿐 아니라 성 아타나시오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황제의 이미지(초상)에는 황제의 관념(ειδος)과 형상(μορφη)이 들어있다 … 황제를 닮음은 이미지에서도 변함없으므로, 이 이미지를 보는 사람은 황제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황제를 보는 사람도 이미지에 그려진 인물과 그가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 그 이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나와 황제는 하나이다,’ ‘나는 그 안에 있고 그는 내 안에 있다.’ … 그러므로 이미지를 경배하는 사람은 역시 황제를 경배하는 것이다”11)

 

이 같은 논의는 성화상 옹호자들에게 이어졌다. 성화상 옹호자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Ἰωάννης ὁ Δαμασκηνός, 676~749)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이미지라는 것을 강조했고,12) 성화상 공경, 즉 그리스도의 이콘을 공경하는 것은 그림 자체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내는 원형,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성부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정립하였다. 따라서 성화상 공경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성화상 파괴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성화상 논쟁 시기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초기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에까지 닿아있다.13)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에 의하면, 이미지는 어떻게든 관념의 세계에 연결될 수 있으며, 진실한 이미지는 참으로 진실한 무엇인가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14) 필론은 플라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여, ‘사유할 수조차 없는 우주’(κóσμος νοητóς)이며 보이지 않는 초월적 빛인 하느님의 그림자(또는 모상 또는 이미지)는 ‘관념의 세계’(intelligible world)이며,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 즉 ‘로고스’라고 하였다.15) 필론은 《우의적 율법》(Legum Allegoria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은 그분의 그림자(σκια)이다. 그분께서는 이것으로, 이것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세상을 만드셨다. 그리고 이 그림자, 이른바 표상은 다른 것들의 원형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앞서 그림자라고 부른 그 모상의 원형이시듯, 이 모상은 다른 것들의 원형이 된다.”16)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로고스의 모상이며, 로고스는 하느님의 모상이다. 사도 바오로에 이르러 이 같은 사상은 한층 명확한 그리스도론으로 체계화된다. 신성한 로고스(Logos)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본성적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 모상의 모상, 즉, 성화상도 역시 본성적 이미지로서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따라 그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리옹의 성 이레네우스(St. Irenaeus of Lyon, 130/140~202)의 대답은 매우 명쾌하다. “하느님의 로고스가 살이 됨으로써, 그분께서는 진실로 이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 그 자신이 그의 이미지가 되셨다. 이미지는 바로 사람이며, 그분께서는 이미 사람이셨다.”17) 그리스도의 육화(Incarnation)는 성화상 제작과 공경의 정당화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올림퍼스의 성 메토디우스(St. Methodius of Olympus, †311)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은 우리가 그분을 더 잘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그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본받을 수 있다.”18)라고 하였고,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이러한 사상을 계승하였다.19) 유명한 종교현상학자인 게라두스 반 데르 레우후는 성화상 논쟁과 관련하여, “성상이 신적 권위의 매개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인간형태로 나타난 신의 계시라는 사실에 반대하는 것이 되며, 그리하여 아무도 중계할 사람이 없는 이슬람의 편에 서 버리게 된다”라고 서술하였다.20)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못지않게, 그리스도교의 인간론도 성화상 옹호론의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 Νύσσης, 335~394)는 《성령론》(De opificio hominis)21)에서 “화가가 물감을 사용해서 어느 사람의 모습을 그릴 때, 적합하고 알맞은 색조를 복제(μíμημα)에 사용함으로써 원형이 지닌 아름다움을 모상(ομοíωσις)에 그대로 재현해내듯이, 창조주께서도 마치 어떤 색조를 사용하는 것처럼 덕성(德性)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아름다움을 닮은 초상을 그려내시며,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주권을 보여주신다.”라고 하였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 안에는 신적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이미지이자 모상이라는 사상은 성 그레고리오스의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창세기 서두에 이미 드러나 있다 : “우리와 비슷하게(in our own image) 우리 모습으로(in the likeness of ourselves) 사람을 만들자 …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in the image of himself, in the image of God)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 26~27).”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성화상 논쟁이 한창이던 8세기 중엽에 ‘성화상에 관한 첫 번째 연설’에서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스를 언급하며 성화상 제작과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다.22)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는 이미지와 원형의 관계와 같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지를 만들 때 그 형태 또는 개념은 성스러운 무엇이라는 점을 보여준다.”23) 인간의 모습은 그 안에 이미 신적 실재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뿐 아니라, 성인들의 초상, 즉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성화상은 하느님의 모습을 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상 파괴는 성화상이 반영하고 있는 실재, 즉 하느님의 모습을 파괴하는 반그리스도교적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나 같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을 동일선상에서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상과 성인들의 성화상을 구분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과 2차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그리고 스투디오스의 성 테오도로스(St. Theodoros of Studios, 759~826)는 본성(Φυσικώς)으로서의 이미지(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같은)와 ‘미메마’(μíμημα)로서의 이미지(미술에서의 모방)를 구별하여,24) 그리스도는 성부의 본성적 이미지로, 그리고 사람은 하느님의 모방적 이미지로 정의하였다.

 

이 같은 논리 안에서 성화상은 그리스도교적 우주론 위에 굳건히 자리 잡게 되고, 이콘(icons)과 우상(idols)을 구분 짓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25) 보스트라의 스테파노스(Stephanos of Bostra)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성인들을 기념하여 그들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야곱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와 즈카리야,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예언자들과 구원을 위해 살해당한 성스러운 순교자들의 이미지들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을 기억하게 되고 그들이 찬미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26) 그는 또 이콘과 우상을 구분하기 위하여, 창세기 1장 26절을 언급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이미지인 것이 불경한 것이거나 우상숭배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죠! 만일 아담이 악마의 이미지였다면, 그는 절망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되겠지요. … 그런데 그는 하느님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명예롭고 받아들일만한 것입니다”27) 따라서 하느님의 이미지를 경배하는 행위는 우상숭배로 볼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화상에 관한 비잔티움의 사상은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에게서 완성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콘이 “모상의 모상이 아니라 실재(實在)의 모상”28)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이콘은 진실한 것이며, 지구상에서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이콘은 진실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화 때문이며, 그의 신성이 눈에 보이는 살로 된 육체를 취하였기 때문이다”29)라는 언명을 통해, 그는 이콘이 우상과 전혀 다른 것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성화상 옹호자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실재를 반영하는 모든 이미지들의 정점에 위치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천사들, 사람들, 그리고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 그리고 여기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이미지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과 위엄, 사랑스러움과 풍요로움을 반영한다는 사상으로 전개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30) 그러므로 비잔티움 세계에서 이미지의 개념은 하느님과 육화, 그리고 계시에 관련된 것이며, 또한 인간과 그의 예언, 그리고 예술을 포함하는 것이다.31)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이 만든 이미지(이콘)를 통해, 더 나아가 상징을 통해,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게 된다.32)

 

 

III. 카파도키아의 교회 미술

 

카파도키아는 비잔티움 성화상 논쟁 시기의 교회 미술을 보여주는 희귀한 지역이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사상에서 드러나듯, ‘그리스도를 그리는 것’은 단순한 회화작업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화상을 그리는 것이 금지되고, 그려진 성화상이 파괴되고, 성화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지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계속 그려져야 했던 것은, 앞 장에서 살펴본바 비잔티움 교회 미술의 내부적 필연성에 의해 조건 지어진 성화상의 성격 때문이다.

 

비잔티움 성인전(聖人傳) 문헌자료에 의하면, 2차 성화상 논쟁(814~843)은 무엇보다도 “성화상 파괴주의 황제와 그에 결탁한 부패한 성직자들의 권력에 맞서는 성인들, 즉 성화상을 옹호하는 수도자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33) 성화상 파괴주의에 맞서는 세력이 주로 수도자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34) 왜 성화상 논쟁의 혼란스러운 싸움터에서 멀리 떨어진 은수자(隱修者)들의 땅, 제국의 변방인 카파도키아에 유독 교회미술이 번성했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성화상 옹호자들이었던 카파도키아의 수도자들은 바위를 깎아 만든 수도원과 교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자신들의 신념을 시각화함으로써 성화상 파괴주의에 저항했다. 황제의 성화상 금지령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상을 더 이상 그릴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시각화하는 대신 새로운 조형적 표현의 길을 발견하였다.

 

1. 다울루 킬리세(Davullu Kilise)35)

 

페리스트레마(Peristrema) 계곡의 동쪽에 자리 잡은 귀베르진릭(Güvercinlik) 마을에는 현지어로 ‘다울루 킬리세’라 불리는 비잔티움 교회가 남아있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 교회는 카파도키아의 가난한 수도자들이 마련한 것으로 작은 규모의 건물에 소박한 장식으로 되어있다. 교회 내부 암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적갈색 안료로 그린 프레스코화는 현재 많이 훼손된 상태이긴 하지만, 몇 군데의 그림은 아직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황제가 내린 금지령에 따라 일체의 성화상을 그릴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다울루 킬리세의 내부는 기하학적 문양, 원, 반원, 마름모, 삼각형, 베틀북 모양의 잎사귀, 지그재그로 또는 나선형으로 배치된 프리즈 등 온갖 종류의 비표상적 그림으로 채워졌다. 반면,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 이래로 교회 내부에 줄곧 그려지던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이나 테오토코스(Theotokos),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등 구약성경의 인물들은 물론 성인이나 천사들의 그림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다울루 교회의 내부 장식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 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십자가 도상이 반복적으로, 그것도 다양한 형태로 - 라틴형, 몰타형(Maltese), 또는 원형장식, 식물장식, 그리고 빛나는 광채가 덧붙여진 형태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십자가 도상의 사용빈도 증가는 성화상 논쟁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십자가 도상은 성화상 파괴 시기의 교회 내부장식 프로그램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우선 앱스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앱스의 중앙 벽감에 자리 잡은 십자가 도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몰타 십자가가 새겨진 메달리온 도상이 배치되었다(도 1). 비잔티움의 전통적인 교회 내부 장식 프로그램에서는 신의 현현(顯現) 주제가 앱스의 장식으로 채택되며, 이는 〈옥좌의 그리스도〉 등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도상으로 표현된다.36) 이 같은 전통적 도상 프로그램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울루 킬리세의 앱스에 그려진 세 십자가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일찍이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 카타콤에 많이 그려졌으며, 성상 파괴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사용된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수도자들은 성화상 파괴주의의 법령에 따라 비록 사람의 형상으로 그리스도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중심부인 앱스에 십자가의 형상을 빌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그렸던 것이다. “어떠한 종교도 추상적인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신비 곧 언어형상을 통해서 말한다. 그리고 상징 없는 종교는 없다.”라는 한스 아스뮤쎈(Hans Asmussen)의 주장은37) 다울루 킬리세에 그려진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를 찾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티에리(N. Thierry)는 앱스에 그려진 세 개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장면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테오토코스와 사도 요한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였다.38) 그러나 카파도키아 지방의 교회 앱스에는 ‘데이시스’(Deisis) 도상이 많이 그려지던 상황에 비추어 볼 때,39)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테오토코스와 세례자 요한을 그린 도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앱스의 아치 받침대에도 십자가가 그려졌다.40) 끝부분이 작은 원형 장식으로 마감된 라틴 십자가 모양이며, 십자가 하단의 배경은 꽃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남쪽 십자가는 아치 장식 아래 그려졌고 하단의 종려나무 잎은 붉은색으로 윤곽선만 표현되었다. 북쪽 십자가의 양옆에는 황갈색 원형 장식을, 아랫부분에는 장미색 잎사귀가 달린 잔가지들을 그려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앱스의 벽감에 그려진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면, 앱스의 아치 받침대에 그려진 십자가 역시 성인들 - 예를 들어,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 의 상징일 수 있다. 십자가 도상이 어느 특정 성인의 상징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아래에 소개할 하기오스 바실리오스 성당의 예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 것이다.

 

앱스뿐 아니라 네이브에도 십자가 도상이 그려졌다. 북쪽 벽감과 남쪽 벽면은 몰타형 십자가로 장식되었고, 서쪽 출입구 윗부분의 반원형 벽면에는 메달리온이 그려졌는데, 그 안에는 빛줄기가 퍼져나가는 형태의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다(도 2). 이 십자가는 흰색 바탕 위에 장미색으로 그려진 라틴형으로서, 끝부분에는 원형장식이 달렸고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고 있으며, 화관 형태로 배열된 당초문이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다(도 3). 다른 십자가들보다 화려한 장식으로 강조된 이 십자가는, 비잔티움 교회의 서쪽 벽면에 그려지던 도액(度厄)과 보호의 성화상 - 주로 대천사 성 미카엘 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성녀 헬레나를 대체한 상징적 이미지이다.

 

이제 다울루 킬리세의 내부 장식 중 성화상 논쟁과 관련하여 매우 특별한 의미를 함축한 프레스코화를 살필 차례이다. 네이브의 반원형 궁륭천장에는 둥근 꽃이 달린 나무모양의 커다란 식물 네 본이 남쪽과 북쪽에 각각 대칭적으로 그려졌는데, 남쪽의 식물들 사이에는 사슴을 공격하려는 사자 한 마리가 보인다(도 4). 거친 형태로 아무렇게나 그려진 듯한 사자는 뱀처럼 뾰족한 혀를 사납게 드러내며 사슴을 바싹 추격하고 있다. 반면 사슴은 사자와 달리 비교적 우아한 실루엣으로 표현되었고, 네 발도 세심하게 표현되었다. 사슴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이며 얼굴을 뒤로 돌려 자신을 뒤쫓는 사자를 쳐다보고 있다(도 5).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한 형태로 간략하게 그려졌으나, 보는 이에게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염소나 사슴을 공격하는 사자는 고대 동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로, 맹수의 승리를 주제로 한다.41)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사자가 사슴을 쫓아가고는 있으나 직접 달려들어 덮치지 못하고 있으며, 사슴의 뿔 사이로는 엉뚱하게도 십자가가 보인다.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는 이 도상은 종래의 동물싸움 도상이 아니라, ‘성 에우스타키우스(St. Eustachius, †118)의 환시’를 그린 것이다.42)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선택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사상을 담은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도상은 일반적으로 말을 탄 군인과 쫓기는 사슴으로 구성되지만, 다울루 킬리세의 경우는 사람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금지된 성화상 파괴 시기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성화상 금지령에 따라 성 에우스타키우스가 사람의 모습이 아닌 사나운 사자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를 성화상 파괴 시기에 그려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카파도키아의 수도자들은 왜 이 도상을 자신들의 교회장식으로 선택했던 것일까? 성 에우스타키우스가 사냥하던 사슴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이야기는 성화상 옹호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도상은 당대의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이 행하는 이콘에 대한 공격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사슴이 성 에우스타키우스에게 한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 “나는 네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네가 존경하고 있는 그리스도이다.” 사슴을 공격하는 사자는 결국,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성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즉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단성론자(單性論者)의 상징이 되며, 단성론은 성화상 파괴주의의 이론적 토대였었다.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을 파괴하는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고 결국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느님을 공격하는 엄청난 반그리스도교적 행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다울루 교회의 내부 장식은 황제의 성화상 금지령을 준수하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일체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십자가의 상징과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이미지를 빌려 성화상 파괴주의에 항거하고자 한 시각적 투쟁이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을 파괴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창으로 찌르는 로마병사와 다를 것이 없다는 내용의 채색 삽화로 유명한 《클루도프 시편집》에도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가 실려있으며 이 역시 다울루 교회의 이미지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도 6).43)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을 비롯한 성화상옹호자들의 시각적 무기였던44)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도상은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매우 유행하였는데 다울루 킬리세 외에 열두 군데의 다른 교회에서도 같은 이미지가 발견된다.45) 이 같은 현상은 카파도키아가 성화상 파괴주의에 항거하는 수도원 밀집 지역이라는 당시의 지리적 특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2. 하기오스 바실리오스(Hagios Basilios) 성당46)

 

성화상 금지령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변경지역, 카파도키아에까지 미쳤음은 서두에서 이미 밝힌바 있다. 지방의 아주 작은 마을에 세워진 성당들도 성화상 파괴주의를 피해갈 수는 없었고, 따라서 초기 비잔티움 교회에 그려지던 예수 그리스도, 테오토코스, 천사와 성인들 대신, 기하학적 문양, 식물과 동물 문양, 그리고 십자가 문양의 애니코니즘(aniconism) 장식을 사용하였다.47)

 

귈뤼데레(Güllü dere) 5번 성당의 앱스에는 〈옥좌의 그리스도〉 대신 커다란 십자가를 장식적 모티브 사이에 그려 넣었고, 카라자외렌(Karacaören)의 작은 장례용 성당에도 양식화된 식물 문양을 가미한 십자가상을 앱스의 장식으로 사용하였다(도 7).

 

 

 

 

 

한편 위르귑(Ürgüp) 지역의 하기오스 바실리오스 성당은 성화상 파괴 시기의 교회 미술이 어떻게 생명을 유지했는지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예이다. 앱스의 세미 돔은 세 개의 십자가 도상으로 장식되었고, 그 위의 천장 부분에는 또 다른 세 개의 십자가가 연속된 꼬임 무늬 장식을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그려졌다(도 8). 그런데 놀랍게도 천장의 세 십자가 옆에는 각각 ‘ABRAAM, 아브라함’, ‘HCAAK, 이사악’, 그리고 ‘HAKOB, 야곱’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어, 이것이 단순한 장식적 모티브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비잔티움 교회의 앱스에 그려지던 성인들의 초상을 대신하는 상징물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하기오스 바실리오스 성당의 앱스에 그려진 여섯 개의 십자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테오토코스와 세례자 성 요한을 그린 〈데이시스〉와48)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세 선조들 -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그린 것이다. 또한 이사악의 십자가 왼편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작게 그려져 있어, 그리스도교 상징으로 나타낸 후원자의 초상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기오스 바실리오스 성당은 네이브에도 십자가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네이브의 평평한 천장은 전체가 커다란 십자가로 장식되었고, 양식화된 나무와 당초무늬가 십자가 주위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비잔티움 교회 내부 장식 프로그램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의 승천〉을 대신하는 이미지임이 분명하다(도 9). 한편 네이브의 남쪽 벽면에는 식물 문양이 가미된 라틴형 십자가가 있고, 여기에는 성화상 옹호자의 신념이 담긴 글귀가 함께 적혀있어 주목을 끈다(도 10). “CTAVPOC EN AEPI, OCAN … ON”, 즉 “하늘의 십자가를 그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럽혀지지 않으시리라”49)라고 번역되는 이 글귀는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애니코미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

 

 

IV. 나가는 말

 

다울루 킬리세나 하기오스 바실리오스 성당의 예는, 성화상 파괴주의가 표면적으로는 교회에서 성화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을지라도, 성화상에 대한 욕구와 신심 자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음을 보여준다.50)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는 카파도키아의 수도자들은 사람의 형상 대신 식물과 동물 문양, 그리고 기하학적이거나 장식적인 문양, 그리고 십자가라는 추상적 상징을 통해 비잔티움 교회 미술의 명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는 종교적 성찰을 떠나, 시각 이미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욕구에 결부된 문제로서, 인간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미지의 창조, 즉 회화적 표현이 인간 존재 조건의 근본적 요소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성화상 논쟁 이후의 비잔티움 미술의 전개 양상은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 남아있다. 10세기 후반에 세워진 몇몇 교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주의(Iconoclasm)가 이단으로 단죄됨으로써 성화상 논쟁이 종결되었음에도51) 여전히 십자가 문양 위주의 비표상적 장식을 사용하였다. 이런 현상은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 걸쳐 보고되고 있으며, 시나소스(Sinassos) 근처의 바실리오 성당(Saint Basile), 제밀(Cemil) 근처의 스테파노 성당(Saint Etienne), 크즐 추쿠르 성당(Kizil Cukur), 그리고 발칸 데레시 성당(Balkan Deresi)이 여기 해당한다. 한편, ‘담나티오 메모리에’(Damnatio memoriae)52). 즉 기록 말살형이라 불리는 흔적 지우기 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기억의 조작, 또는 의도적 망각으로서, 과거의 그림 위에 새로운 그림을 덧그리는 방식을 따랐다. 카파도키아의 괴메레에 위치한 토칼르 킬리세는 매우 분명한 예를 제공한다. 그러나 9~10세기 카파도키아 교회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도상 프로그램 구성에 있어서 화가들이 일종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특히 으흘라라(Ihlara) 지역의 교회에는 다양한 도상학적 주제와 정전(正傳)은 물론 외경에서 가져온 자료의 사용,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사용되던 십자가 도상의 상대적 감소가 두드러진다.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은 이러한 성화상 파괴 시기 직후의 비잔티움 교회 미술53)에 관해서는 차후의 연구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스도교 미술의 성격 자체를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분열과 화합에 공통 키워드가 된 비잔티움의 성화상 논쟁은 현대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바, 본 연구를 작은 발판 삼아 비잔티움 성화상 논쟁 시기의 교회 미술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기 바라며,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체험으로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비잔티움 미술의 의미를 찾게 되기 기대한다.

 

* 본 논문은 대구가톨릭대학교 2017년도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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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erry, Nicole. “Les peintures murales de six églises du haut Moyen Âge en Cappadoce”, Comptes rendus des séances de l’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114ᵉ année, 3,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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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

 

1) 조수정, 《비잔티움 미술의 이해》, 북페리타, 2016, 118~119쪽.

 

2) 일례로, 성화상 옹호자였던 안드레아스 칼리비테스(Andreas Kalybites) 수도자는 760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에서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 수도자에 대한 탄압은, 수도복 착용 금지는 물론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주기, 돌팔매질, 수녀와 강압적인 결혼, 갖가지 고문, 코 베기, 산 채로 매장, 장님으로 만들기, 감옥에 가두거나 키프로스로 유배 보내기 등 매우 가혹하고 잔인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처형되는 이유가 황제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며, 제국의 법에 따라서 처벌받았다는 것이다. Theophanes, Chronographia, 1, C. de Boored., Leipzig, 1883, p. 401 ; Paul J. Alexander, “Religious Persecution and Resistance in the Byzantine Empire of the Eighth and Ninth Centuries : Methods and Justifications”, Speculum 52, 2, 1977, pp. 242~245, 258. 764년에 순교한 성 소(小) 스테파노스(St. Stephen the Younger) 부제의 이야기는 《콘스탄티노플 성인전》(Synaxarium Ecclesiae Constantinopolitanae)에 실려 있으며,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 Alice-Mary Talbot, Byzantine Defenders of Images, Dumbarton Oaks, 1998, pp. 9~11.

 

3) 〈IS, 팔미라 재장악 후 유적에 또 만행 … 원형경기장 등 파괴〉, 《연합뉴스》 2017년 1월 20일 자 :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국가’(IS)가 고대 도시 팔미라 유적을 훼손하는 만행을 또다시 저질렀다. 로마시대 원형경기장과 테트라필론 모두 역사적 가치가 막대한 인류의 자산이다. IS는 2015년 5월 팔미라를 장악한 후 2천 년 전 사자상과 1천800년 전 개선문 등 주요 유적을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파괴했다. 팔미라는 작년 3월 시리아군이 탈환했으나, 지난달 다시 IS 수중에 넘어갔다.”

 

4) 성화상 파괴 시기의 미술에 대해 다음을 참고. 조수정, 《비잔티움 미술의 이해》, 124~132쪽.

 

5) 귈뤼데레(Güllü dere) 성당, 카라자오렌(karacaoren) 성당, 차우신(Çavuşin)의 니케타스 스틸리트(Nicetas Stylite) 성당, 하기오스 바실리오스(Hagios Basilios)성당, 다울루 킬리세(Davullu Kilise).

 

6) 시나소스(Sinassos) 근처의 바실리오 성당(Saint Basile), 제밀(Cemil) 근처의 스테파노 성당(Saint Etienne), 크즐 추쿠르 성당(Kizil Çukur), 발칸 데레시 성당(Balkan Deresi), 괴레메(Göreme) 7번 성당, 으흘라라(Ihlara) 지역의 성당들.

 

7)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바실리오〉, 《한국가톨릭대사전》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3059~3061쪽.

 

8) Homil. 24, Contra Sabellianos et Arium Anomoeos, PG 31, 607 A f. : http://patristica.net/graeca/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아리아니즘과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등의 이단적 교리를 내세우는 사벨리아니즘(Sabellianism)에 대항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9) De Spiritu Sancto XVIII, 45 : Migne, Patrologia Graeca XXXII, 149 C : http://patristica.net/graeca/ 이 책은 원래 성령(聖靈)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우스파(Arianism) 이단자들에 맞서기 위해 쓰인 것이었다.

 

10)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이미지’(Image of God)라는 사상은 이미 사도 바오로에 의해 드러난 바 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4장 4절, ‘하느님의 모상(模像)이신 그리스도.’

 

11) Oratio III contra Arianos 5, PG 26, 332 A f: http://patristica.net/graeca/#t026.

 

12) De imaginibus, oratio I, 9 ff., PG 94, 1240 C ff. ; De imaginibus, oratio III, 18 ff., ibid., 1337 C ff. https://archive.org/stream/patrologiaecurs62migngoog#page/n629/mode/2up.

 

13) 이러한 사상의 근원은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전, 아레오파기타의 위 디오니시오스(Pseudo-Dionysius the Areopagita), 프로클로스(Proklos), 플로티노스(Plotinus), 성 바오로, 필론(Philo), 그리고 플라톤(Plato)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Gerhart B. Ladner, “The Concept of the Image in the Greek Fathers and the Byzantine Iconoclastic Controversy”, Dumbarton Oaks Papers 7, 1953, p. 5.

 

14) Timaeus 29b : 플라톤, 박종현, 김영균 공동 역주, 《티마이오스》, 서광사, 2008, 79~80쪽 : “이 우주가 어떤 것의 모상(eikon)일 것임이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

 

15) 케네스 솅크, 송혜경 옮김, 《필론》, 바오로딸, 2008, 223~224쪽 : De opificio mundi 24f.

16) 위의 책, 138~139쪽 : Legum Allegoriae 3.69.

17) Adversus Haereses V, 16, 1 : Irenäus von Lyon, Norbert Brox, Adversus Haereses, Freiburg : Herder, 2001, p. 134.

 

18) Symposium I, 4(24) : St. Methodius, Herbert Musurillo, The Symposium : a treatise on chastity, New York: Newman Press, c1958, pp. 46~47. “He took upon himself our form, spotted and stained as it was by our many sins, in order that we might be able to receive in turn the divine form which He bore for our sake.”

 

19) John Damascene, De imaginibus, oratio III, PG 94, 1420 B.

20) 게라두스 반 데르 레우후, 윤이흠 역, 《종교와 예술》, 열화당, 1988, 76쪽.

 

21) De opificio hominis, 5.1 : PG 64, 137 A: http://www.ccel.org/ccel/schaff/npnf205.html,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는가?”

 

22) John Damascene, De imaginibus, oratio I, PG 94, 1269 A f : http://www.documentacatholicaomnia.eu/04z/z_0675-0749__Iohannes_Damascenus__De_Imaginibus_Oratio_I_(MPG_94_01231_1283)__GM.pdf.html.

 

23) Theodore of Studion, Antirrheticus III, 2, 5, PG 94, 420 A.

24) 그들은 본성적 이미지를 모방적 이미지, 관습적 이미지, 기교적 이미지와 구별하였다.

25) Gerhart B. Ladner, op. cit., p. 5.

 

26) Saint John (of Damascus), Andrew Louth, Three Treatises on the Divine Images, St. Vladimir’s Seminary Press, 2003, pp. 125~126.

 

27) Ibid.

28) De imaginibus, oratio III, PG 94, 1361 D f.

 

29) Gerhart B. Ladner, op. cit., p. 19. 라드너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한 결정이, 그리스도의 육화를 강조하는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콘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실존했던 예수의 모습과 같은가에 관한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가 비잔티움 세계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는데, 이는 역사적인 접근보다는 사변적인 접근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며, 픽셀 단위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현대적 사고방식이 비잔티움 세계에서 매우 낯선 것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30) 로마서 1, 20.

31) Gerhart B. Ladner, op. cit., p. 10.

 

32) De imaginibus, oratio I, 9 ff., PG 94, 1240 C ff. ; De imaginibus, oratio III, 18 ff., ibid., 1337 C ff. https://archive.org/stream/patrologiaecurs62migngoog#page/n629/mode/2up.

 

33) Michel Kaplan, Le saint, l’évêque et l’empereur : l’image et le pouvoir à l’époque du second iconoclasme d’après les sources hagiographiques, Les images dans les sociétés médiévales : pour une histoire comparée, éd. J.-M. Sansterre, J.-Cl. Schmitt, Bulletin de l’Institut Historique belge de Rome 69, 1999, pp. 185~201.

 

34) 성화상 파괴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은 지하교회를 통해 은밀히 전개되었다. 스투디온의 성 테오도로스(St. Theodoros of Studion)는 매우 많은 서한을 통해 수도자들에게 인내, 정통신앙의 옹호, 그리고 순교를 각오하는 자세를 요구하며 성화상 파괴주의에 맞서도록 격려하였다. Paul J. Alexander, op. cit., pp. 246~253, 262.

 

35) 이 지역의 비잔티움 유적에 관한 연구로 다음을 참고. Veronica Kalas, “The 2004 Survey of the Byzantine Settlement at Selime-Yaprakhisar in the Peristrema Valley”, Dumbarton Oaks Papers 60, Cappadocia, 2006, pp. 271~293. 다울루 킬리세의 건축과 회화에 관해 다음을 참고. Nicole Thierry, “Mentalité et formulation iconoclastes en Anatolie”, Journal des savants 2.1, 1976, pp. 82~88. ‘다울루’는 터키어로 ‘북’이라는 의미이며, ‘킬리세’는 교회를 의미한다.

 

36) 조수정, 《비잔티움 미술의 이해》, 46~52쪽.

37) 게라두스 반 데르 레우후, 《종교와 예술》, 79쪽, 재인용.

38) Nicole Thierry, “Mentalité et formulation iconoclastes en Anatolie”, p. 84.

 

39) 조수정, 〈데이시스(Deisis)의 도상학적 정의에 관한 소론 - 카파도키아의 교회벽화를 중심으로 -〉, 《대구사학》 110, 2013, 249~278쪽.

 

40) 앱스의 천장에는 식물 잎사귀 문양과 관목, 그리고 좌우에 대칭적으로 그려진 두 개의 램프 그림이 남아있으나, 주변 도상이 많이 훼손되어 원래의 주제를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41) 조수정, 〈비잔티움 콤네노스 왕조의 동물싸움 도상연구〉,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46, 2017, 31~54쪽.

 

42) 성 에우스타키우스는 원래 플라치두스(Placidus)라는 이름을 가진 로마의 장군으로서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의 인물이다. 그는 사냥을 하던 중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뿔에 십자고상이 달린 수사슴을 보게 된다. 사슴은 “나는 네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네가 존경하고 있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했고, 이 신비롭고 강렬한 체험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이때 자신의 이름을 에우스타키우스로 개명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세속적으로는 불행한 일들을 계속 겪게 되는데, 집과 나라를 떠나야만 했고, 그의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는 다시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승리 축하식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 지내기를 거부한 죄로, 그의 아내 성녀 테오피스테스(Theopistes)와 두 아들 성 아가피투스(Agapitus), 테오피스투스(Theopistus)와 함께 온 가족이 황소 모양의 불타는 청동 가마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H. Delehaye, La légende de saint Eustache, Mélanges d’hagiographie grecque et latine. Bruxelle, 1966, pp. 212~239 ; Holger Petersen, “Les origines de la légende de saint Eustache”, Neuphilologische Mitteilungen 26, 3/4, 1925, pp. 65~86.

 

43) 《클루도브 시편집》(Chludov Psalter), fol. 67r, 97r : Hist. Mus. MS. D.29 folio 67r, 850~875, 모스크바 역사박물관.

 

44)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를 성 바오로의 회심 사건과 비교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역설하였다. P.G., 94, 1381~1383 ; Nicole Thierry, “Mentalité et formulation iconoclastes en Anatolie”, 각주 16 재인용.

 

45) 카파도키아 지역 교회에 그려진 성 에우스타키우스의 환시 도상 목록은 다음 논문을 참고. Thierry Nicole. “Le culte du cerf en Anatolie et la Vision de saint Eustathe”, Monuments et mémoires de la Fondation Eugène Piot, 72, 1991. pp. 41~56.

 

46) G. de Jerphanion, Les églises rupestres de Cappadoce, II, Paris, 1925~1942, pp. 105~111 ; Nicole Thierry, Mentalité et formulation iconoclastes en Anatolie, pp. 88~95 ; 조수정, 《비잔티움 미술의 이해》, 127~128쪽.

 

47) Marie-France Auzepy, Iconodoules et iconoclastes : La querelle des images 730~843, Le Monde de la Bible 142, 2002, pp. 40~43.

 

48) 가운데 십자가 주위에는 “CHΓNON TOV AΓIOV KOCTANTINOV”라는 글귀가 적혀있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나타난 영광의 십자가임을 나타낸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니콜 티에리는 세 십자가를 〈골고타의 십자가 처형〉으로 해석하였으나, 이는 비잔티움의 전통적 앱스 장식 프로그램과 거리가 있는 것이다. Nicole Thierry, “Mentalité et formulation iconoclastes en Anatolie”, p. 91.

 

49) Ibid., p. 90.

50) 조수정, 《비잔티움 미술의 이해》, 128쪽.

51) Gerhart B. Ladner, op. cit., p. 21.

 

52) Vesselina Vatchkova, “La méthode byzantine de la damnatio memoriae”, Memory and Oblivion in Byzantium. Sofia, 2011, pp. 164~181.

 

53) Nicole Thierry, “L’absence du statut du peintre après l’iconoclasme”, Zograf 26, 1997, pp. 17~26.

 

[교회사 연구 제51집, 201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수정(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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