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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성사]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성품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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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8) 성품성사 ①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어떠한 일이든 충분히 해내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시면서 열두 명의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파견된 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사명은 이들을 통하여 계속되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56항)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이 임무는 성품성사를 통하여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 수행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36항) 물론 사제들은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제들이 지니는 인간적인 약점이 성사의 효과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사의 은총은 사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제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자신의 능력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제직의 근원이자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함으로써 완수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사제들에게 주어진 직무는 바로 “봉사의 직무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목자들에게 맡기신 임무는 바로 참 섬김입니다. 사제직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사람들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사제직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유일한 사제직에 속한 것이며,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제정되었습니다. 성품성사는 ‘거룩한 권한’, 바로 그리스도의 권한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므로 이 권위의 행사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고 가장 낮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51항)
그래서 성품성사를 혼인성사와 함께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성사들은 개인적인 구원에도 이바지하지만,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34항)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예수님을 닮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품성사에서 주어지는 “겸손”과 “굳셈”의 은총 없이 사제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사제의 인간적인 공과(功過)가 어떻든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보다 결코 앞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2019년 6월 2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9) 성품성사 ②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 3,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성경의 여러 장면들 그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왜” 그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설명해주지 않으십니다. 그저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르실 때, 베드로 사도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라고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그들이 이미 제자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거나, 그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활에 함께 하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 곧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그 배움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참된 ‘사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교회 안에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자기 교도직의 자리를 넘겨 주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7항)
오늘날, 주교들은 바로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그 교도권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성경)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성전)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 직무는 매우 고유하고 권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듣는 이들이 자기 입맛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도권의 해석을 따르고 존중함으로써 올바른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교도권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과 일치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봉사합니다. 이 권한은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고 충실히 해석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6항)
이처럼 성품성사의 품위와 권위는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하느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지닌 인간적인 재능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 말씀에 봉사함으로써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는 것이 성품성사를 살아가는 사제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2019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40) 성품성사 ③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우리 의정부교구는 매년 초에 부제서품식과 사제서품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의 학제에 따라 대학원 2학년을 마친 신학생들은 부제서품을 받게 되고, 대학원 3학년을 마친 부제들은 사제서품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고 부제서품과 사제서품을 단순히 신학교의 학년 진급에 따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품성사에 있어서 품계(品階, ordo)는 주교품과 사제품, 그리고 부제품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직무를 구분함과 동시에 각 품계에 속한 이들의 유대관계를 통해 그 직무의 일치 또한 드러내 줍니다.
세 가지 품계 가운데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주교품”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교회의 전례 관습과 교부들은 분명히 대사제직, 거룩한 봉사 직무의 정점이라고 하였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57항)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축성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는 임무와 가르치는 임무 그리고 다스리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주교들은 자기 봉사직의 임무를 여러 단계로 교회 안의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주교들의 봉사 임무는 그 아래 사제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로써 사제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도적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하여 주교품의 협력자들이 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62항)
그러므로 사제들이 수행하는 봉사 직무의 권한은 주교들에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존은 사제들의 직무수행이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제들은 주교들과 이루는 일치와 결합을 통해 성품성사의 영예와 성품성사를 통해 주어진 직무의 고귀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끝으로, 주교와 사제보다 낮은 품계에 속해있는 부제들이 있습니다. 부제는 다른 품계에 있는 성직자의 편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모든 하느님 백성의 ‘봉사자’(diaconus)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물론 이 역시도 주교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무에 일치와 결합함으로써 온전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제 서품 때에 주교와 다른 사제들이 새로 서품되는 사제에게 안수하는 것과는 달리, 부제 서품 때에는 오직 주교만이 부제로 서품되는 이에게 안수하게 되는데, 이는 부제 직무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품성사의 이러한 품계는 결코 성직자들의 개인적 영예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각 품계에 속한 이들이 더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도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2019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41) 성품성사 ④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성품성사가 “하느님 백성의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라고 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오직 사제들에게만 맡겨져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제들은 성품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서 고유하고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맞습니다. 사제들은 하느님 말씀의 교역자로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성사들의 교역자로서 가장 중요한 성체성사를 비롯하여 다른 성사들을 집전하면서 신자들이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 머물 수 있게 해 줍니다. 사제들이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헌신은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들에게만 주어지는 몫이 아니라, 세례성사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제들과 신자들은 서로 다른 모습과 방법으로 사랑과 헌신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교와 사제들의 직무적이고 교계적인 사제직과 모든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세례의 은총과 믿음 · 바람 · 사랑의 삶, 성령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반면, 직무 사제직은 보편 사제직을 위하여 봉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세례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47항)
이처럼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들이 “살아가는” 직무 사제직과 신자들이 “살아가는” 보편 사제직은 구분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경쟁하고 배척하거나 그 직무를 떠넘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제는 권위로서 신자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며, 신자들은 사제들에게 모든 봉사의 책무를 넘긴 채, 그저 성사의 수혜자(受惠者)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품성사”가 직무 사제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사이기에, 보편 사제직을 살아가는 신자들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묵상함으로써 사제들의 수고를 격려하고, 신자로서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다짐하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신자들 역시도 함께 묵상해봐야 할 성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42) 성품성사 ⑤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1코린 12,20)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들이 받게 되는 직무가 매우 고유하고 특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유함과 특별함 때문에 사제직이 교회 안에서의 특별한 ‘계급’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들의 직무 사제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고자 쓰시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사제가 머리이신 그리스도, 곧 은총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자신을 다른 모든 이들 위에 드높이는 승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존엄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세례에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역할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월 의식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당공동체 안에서 사제들이 신자들보다 우위에 있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높은 사람’으로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과도 다를뿐더러, 신앙공동체의 성숙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물론 사제들이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된 데에는 신자들이 자신의 ‘보편 사제직’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적인 반성도 필요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평신도들은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바로 주님께 사도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하느님의 구원 소식을 사람들과 온 세상에 알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을 수행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00항)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할 책임은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자들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그 책임은 서로 경쟁하여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수행해야 할 공동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교회 안에서,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은 모두 예수님과의 일치 안에 있는 것이며, 그 일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교황직을 사임하면서 로마교구의 사제들과 인사하시는 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회는 나의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것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의 것입니다.”
교회는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제들의 것도 아니고,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신자들의 것도 아니며, 오직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제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하느님의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0 5,07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