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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36: 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 세상 안에서 평신도로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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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24 ㅣ No.111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36) 평신도를 통한 한국 교회의 쇄신, 그 대안은 복음화  세상 안에서 평신도로 살아간다는 것


세상에 그리스도적 가치와 사상을 당당히 외쳐라

 

 

많은 분이 상처받고 있습니다. 삶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 갈증이 많은 시대입니다. 갈증을 채우려다 보니 그리스도인조차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합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생깁니다. 이에 발맞춰 새로운 영성운동도 급증했습니다. 여러 신흥 영성운동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알고 있어야 할 영성운동이 있습니다. 바로 ‘뉴에이지’입니다. 왜 뉴에이지가 그리스도교에 악영향을 주는 신흥 영성운동으로 대두가 됐을까요? 두 가지 점에서 그리스도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와 같은 신흥 영성운동의 방해

 

첫째, 뉴에이지는 예수님을 구원자,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성인, 성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분을 구원자,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뉴에이지는 그리스도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둘째, 이들은 하느님을 우주의 거대한 힘,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유일신, 창조주로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많은 평신도가 뉴에이지의 내용을 접하면 그리스도교와 비슷한 점이 많아 익숙해하고 빠져들곤 합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뉴에이지는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 아주 깊숙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문제는 재밌고 즐겁게 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신으로서 믿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혼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점점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그냥 착하게 살고 열심히 살면 구원받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세상에서 평신도로 살아가는 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는 또 다른 신흥 영성운동은 ‘기’(氣)입니다. 하나의 정신운동으로 생각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를 신앙화, 종교화하는 현상이 이미 오래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를 신앙화하면서 새로운 종교, 사이비 종교가 이미 여러 개 생겼습니다. 정신 운동을 넘어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이것을 신앙화, 종교화합니다.

 

또한 ‘가치관’이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가치관의 부재, 혼란의 시대로 보입니다. 현대인들은 돈이나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지극히 세상의 것들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인간에 대한 가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가치, 하느님에 대한 가치는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말로는 돈보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천은 반대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현대인들 사이에 의식적이라도 돈보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가치를 잃어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계시고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곧 절대자가 인간 예수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환경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결코 손상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의 특성 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순수함 등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제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항상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봅니다.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엄마 이게 뭐야?” “엄마 이거 먹어도 돼?” “엄마 친구네 집에 가도 돼?”“엄마 이거 어떻게 해야 돼?”

 

 

내 판단대로 내 생각대로의 삶 멈춰야 

 

그런데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느님께 질문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내 판단으로 내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일도 벌여 놓고, 저 일도 벌여 놓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몸만 바쁘고 말이죠. 몸만 바쁘게 돌아가는 그런 생활을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가치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사상과 가치관을 적립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8월 25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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