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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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역사 안의 또 다른 역사, 교회 -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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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20 ㅣ No.5184

[신약 성경 다시 읽기] 역사 안의 또 다른 역사, 교회 - 사도행전

 

 

역사를 기록한다는 건 역사를 평가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루카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다. 아니, 교회의 역사를 평가한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읽어낸다는 것은 2000년 전의 역사와 그 해석을 훑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전히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 신앙인들에겐 현실에 대한, 오늘의 역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신약 성경, 특별히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는 데 불가피한 고려 사항은 루카의 역사관 이다. 역사라는 게 그렇다. 이리 보면 빛나 보이는 일이라도 저리 보면 어둠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이 역사에 대한 기록이고 평가다. 대개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과 유다이즘 사이에 끼어든 약자들의 집합체로서 이해되곤 한다. 그럼에도 고단한 시간을 신앙과 인내, 때론 절제와 기쁨으로 살아간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에 우린 들뜨기도 한다. 교회의 삶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이렇게 늘 비교 우위의 영웅 서사로 읽혀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런 역사관으로 사도행전을 바라보면 힘없는 신앙인이 숱한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전능하심 덕택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진영논리의 배타적 폐쇄성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신앙인의 역사는 세상의 이해 관계 속에서 비교 우위의 힘을 자랑하는 치기 어린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의 주인을 하느님으로 규정하고 역사의 흐름을 그분의 섭리 안에서 이해한다.(3,25; 17,24-27) 하느님이 주도하는 역사는 특정 민족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8) 사도행전은 1장 8절의 내용을 스물 여덟 개의 장으로 나누어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전개해 간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선포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2-5장)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으로 퍼져 간다.(8,1) 이어서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시리아에 다다른 구원 소식은(11,19-22) 다시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출발하여(13-18장) 마침내 땅끝으로 여겨진 로마에까지 다다른다.(28,30)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도행전의 역사관은 전적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3,22.26; 4,12)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 사건이라고 강조한다.(3,18) 이러한 역사관은 계급 투쟁이나 그로 인한 승패의 결과를 따져 묻는 약육강식의 역사 인식에 저항한다.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선교 여 정은 로마 제국 안에서 분란과 소동을 일으키며 세속적 질서에 저항하거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른바 '개혁’이나 ‘혁명’을 갈망하는 게 아니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유다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소개하고(사도 2장)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 문화와 전통의 상징인 아레오파고스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며(사도 17장)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자신의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22,28) 세상의 질서 안에 스며든 그리스도인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단 하나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역사는 이미 메시아를 만났고 구원을 맛보았다는 사실 그 하나다.(4,12) 세상에 이미 오신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며(5,42) ‘오늘’, ‘지금’이 박해든, 고난이든, 역경이든 예수님 한 분으로 기쁨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견지하는 게 사도행전이 말하는 역사고 그 평가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은 새로운 세상, 구원의 세상을 열어놓는 마지막 시대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성령 강림 후, 베드로의 설교는 종말의 시간을 예고하는 요엘서 3장 1절에서 5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요엘서에 나타나지 않는 '마지막 날에’라는 표현을 사도행전 저자는 첨가하면서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오늘이야말로 마지막 때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2,17) 덧붙여 지난 시간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함’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3,17) 간혹 사도행전이 말하는 ‘무지함’을 두고 유다인들이나 그리스 문화에 젖은 수많은 이방인들보다 월등히 나은 지식과 진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우리는 알고 있는데, 너희들은 아직 몰라. 그래서 내가 가르쳐 줄게. 제발 내 말 들어!’라고 생떼를 쓰는 어린애 같은 우월감은 참된 신앙적 가치를 훼손하고 그 가치를 살아가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유다인이었던 베드로는 환시 중에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다. 하늘의 소리는 이랬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마라.”(10,15) 하늘에서 내려오는 온갖 길짐승을 보고 먹지 못하겠다고, 속되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하늘은 꾸짖고 있다. 이방인을 향한 폐쇄성, 그것도 먹거리 하나로 성속을 판단하고 구분하고 갈라놓는 참으로 어리석은 선민주의의 무지함을 하늘은 꾸짖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무지함’은 배타적 앎에 대한 결핍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자신 안의 완고함, 자신에 대한 과신, 심지어 자신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삶의 자세를 일컫는다. 구원을 전하는 베드로 역시 그러한 완고함과 폐쇄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구원의 역사를 가로막는 무지함은 ‘우리 안의 완고함’이다.

 

사도행전은 구원의 역사에 어울리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민중을 새롭게 규정한다. 바로 ‘교회’다.(5,11; 11,26)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닫힌 것을 열고 열린 것을 다시 열어 제치는 끝없는 확장성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11,26; 26,28) 교회의 일상은 나눔이다. “한마음 한뜻”을 지니기 위해(4,32; 2,44) 할례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서로 다른 문화와 관점을 공유하고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의 일이다.(15,1-35) 우린 이것을 ‘친교’라고도 부른다. 구체적으론 재화의 공유를 통한 각자의 필요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일(2,44-45; 9,36; 11,29; 20,34-35; 21,24)일테고, 그 일을 통해 교회는 본질적으로 땅끝까지 뻗어나가는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나누고 함께하는 일에 경계와 구분이 허락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인간은 바벨탑을 지어 획일화의 길을, 획일화에 따른 경쟁과 그 경쟁의 부산물인 ‘일등’을 꿈꿨었다. 그리고 그 초라한 ‘일등’은 지금도 여전히 오늘을 지배하고 단속한다. 저마다의 고유함이 사라진 오늘, 다시 사도행전 2장을 읽는다.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2,11) 다름의 자리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갈등의 자리에 성령께서 일치를 주신다.(15,25) 일치는 ‘너’를 향한 ‘나의 사유’다. 서로 다른 ‘사유들’이 한데 모인 교회는 늘 역사를 묻고 역사를 평가하며 역사를 거슬러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다.

 

[월간빛, 2021년 5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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