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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 관상, 명상, 그리고 묵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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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31 ㅣ No.1751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관상, 명상, 그리고 묵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관상과 명상, 그리고 명상과 묵상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관상과 명상의 열매는 무엇인가요? 삶의 어떤 변화가 오나요?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것이 관상기도인가요?

 

필자가 모 출판사의 북 콘서트에 참여했을 때 “관상과 명상, 묵상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이 세 가지 개념의 차이를 모호하게 느끼는 것은 서구인들과 한자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인들의 정서적 언어적 차이에도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영어의 Contemplation은 ‘관상’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Meditation은 ‘명상’ 혹은 ‘묵상’으로 번역된다.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Meditation은 ‘묵상’의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를 ‘명상’이라고 본다. 사실 ‘관상’이란 용어는 동양인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이러한 차이를 갖게 된 배경 중에 하나는 ‘마음’(心)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는 ‘mind’인데, 서구인들에게 mind는 ‘머리’에 있으며 이성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 동양인이 말하는 ‘마음’(心)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heart’(심장, 가슴)이다. 서구에서 말하는 Meditation은 심장으로서의 마음의 활동이 아니라, ‘머리’로서의 마음의 활동이다. 이는 동양의 ‘명상’이라기보다는 ‘묵상’으로 보는 편이 더 낫다. 가령 복음서의 구절을 ‘묵상’할 때, 이성적인 추리를 사용하여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 보거나 그 상황 속에 자신을 대비해 봄으로써 기도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결실을 보게 된다. 이는 동양에서 말하는 명상과 차이가 난다. 이성을 사용하거나 텍스트를 분석하기보다는 동양의 명상은 마음을 비워내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관(觀)의 개념과 가깝다. 물론 선 불교에서도 화두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명상법도 있다. 그러나 결국 삼매(三昧 Samādhi)를 지나 무(無) 혹은 공(空)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동양, 특히 불교의 명상은 삶의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眞我)를 찾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를 깨닫고 내가 사라져(無我) 해탈에 이르는 것에 그 목표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관상기도의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과의 지복직관의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의 명상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관상은 동양의 명상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시작된다. 신약성경 안에서 관상은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하거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과 일치하는 길로 묘사되고 있다. 가령,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 예수님을 바라보던 사마리아 여인(요한 4,26), 예수님 곁에 머물던 마리아(루카 10,38-42)는 관상의 예표가 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도 관상(theoria)은 ‘하느님을 보는 것’, ‘하느님의 환시 체험’ 등으로 이해되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 상태에 이르는 관상의 과정으로 헤시키즘(Hesychasm)을 가르쳐왔는데 이는 하나 안에서 마음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금욕적 전통에 따른 수행이다. 7세기의 요한 클리마쿠스는 관상을 죄 지은 옛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변화의 과정이며 선과 신성을 지닌 우리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누군가가 하느님 현존에 있다면 ‘신화’(神化 Divinization) 되고, 하느님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관상의 실제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지 이론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관상적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이가 ‘하느님화’ 되어간다는 의미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점점 닮아 하늘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이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참된 사랑의 열매가 없는 모든 기도는 울리는 징에 불과하다. 자기만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서양의 관상기도 혹은 동양의 명상은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 대부분의 고등 종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수행 방법이다. 절대자 혹은 신(神)의 이름을 부르든, 무(無)를 반복하며 깨달음을 얻고자 하든 상관없이, 특별한 자세를 하고 일정한 호흡에 맞춰 ‘명상’을 하며 깊은 영적인 영역에서 자기 소멸과 참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인간의 영원한 갈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명상과 관상기도의 방법들을 서로 교류하는 것을 종교 간 대화에서는 ‘관상적 대화’라고 한다.

 

[2022년 1월 30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마산 8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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