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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온 프란조18: 성 요한 23세 교황 (1) 파파 부오노, 가난한 농부의 13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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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10 ㅣ No.692

[창간 34주년 기획 “부온 프란조(Buon pranzo)!”] (18) 성 요한 23세 교황 ① (제261대, 1881.11.25~1963.6.3)


파파 부오노, 가난한 농부의 13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다

 

 

어린 시절의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가 가족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뒷줄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인물이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훗날의 성 요한 23세 교황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러운 기억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로 고등학교 때부터 난 가난해졌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내 집에 누가 오는 것도 싫어했으며, 내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철부지 시절이었고, 나의 흑역사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로마 유학 중 알게 된 베르가모(Bergamo) 출신 친구 마리아는 말할 적마다 “오, 내 집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서 파파 부오노(Papa Buono, ‘착한 교황’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인들이 요한 23세를 부르는 호칭이다)보다 우리가 더 가난했다고, 정말이야. 음, 파파 부오노의 집은 우리 집에 비하면 궁궐이었을걸?”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를 자랑처럼 늘어놓는 마리아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한 번도 학비를 늦게 낸 적도, 밥을 굶어본 적도 없었던 내가 외려 마리아에겐 어느 왕실의 공주였을 정도였다. 이렇듯 ‘가난’이란 단어가 나오면 즉시 ‘농부 출신 요한 23세 교황’(Papa contadino)이 아직도 자동으로 호출되니 파파 부오노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이럴지 금방 가늠이 될 것이다.

 

 

가난했지만 언제나 하느님으로 충만한 가정

 

1881년 11월 25일, 춥고 비 오는 금요일에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베르가모(Bergamo)시에서 15㎞ 떨어진 작은 마을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에서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는 13남매 중 네 번째 사내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무려 32명이 넘는 친족을 포함한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국민의 65% 이상이 농사를 지었고, 일자리 부재와 굶주림에 지친 이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매년 19만 명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또한, 영양 결핍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갔고, 영아들 사망률도 높았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여 빵은 먹지도 못했어요. 어머니가 주신 두 덩어리의 폴렌타(Polenta, 옥수수 가루를 쑤어 만든 수프의 일종)로 매일 버텨야 했습니다. 빵은 농부에게까지 오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신발다운 신발은 축일에만 신었어요. 평소엔 초라한 슬리퍼에 맨발이었지만, 마음은 부족할 것이 없었답니다. 우리 집은 언제나 하느님으로 충만했으니까요.”

 

“똑똑히 기억합니다. 4살 때였습니다. 28살의 어머니는 이미 네 자녀를 두었어요. 어린 자녀를 안고, 업고, 걸려서 집에서 1㎞ 떨어진 카네베 성모성지(Santuario Madonna delle Caneve)에 기도하러 가셨어요. 늦게 도착한 우리는 기도하러 모인 신자들로 인해 성당 안 성모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차례로 어린 우리를 한 명씩 번쩍 안아 들어 올리셨어요. ‘안젤로, 보거라! 성모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오, 아름다우신 우리 어머니, 엄마보다 아름다우시고 좋으신 분이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내 생애 최초로 어머니의 어깨 위에서 평생 잊지 못할 성모님의 아름다움을 본 날이었습니다.”

 

“어스름 하루가 저물 때 동네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커다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시계가 없던 우리 열두 형제(여덟 번째 동생 도메니코는 태어난 해에 사망)는 늘 정확하고 변함없는 어머니의 우렁찬 삼종기도를 듣자마자 일제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믿음은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받았으며, 성장해 나갔습니다.”

 

20세 무렵 신학생 시절(1900년)의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학비 낼 돈 없어 삼촌 도움으로 신학교 입학

 

이처럼 어린 시절, 베르가모의 일상은 배고프고 고되었지만, 안젤로는 가난 속에서도 예수님과 닮은 영성을 배우며 성장해 나갔다고 고백한다. 사제가 되고 싶은 어린 안젤로는 신학교 입학을 원했으나, 도저히 그의 가정 사정으로는 학비와 기숙사비 낼 형편이 안 되었다. 같이 살던 대부인 사베리오 삼촌은 천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조카 안젤로(Angelo)를 위하여 기꺼이 베르가모 신학교 입학(1892년)을 전적으로 도와주었다. 독신에 경건한 사람이던 삼촌은 다른 조카들이 신앙심을 키워나가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11살에 신학교에 들어간 안젤로는 라틴어와 철학, 그리고 신학을 배워나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영혼의 일지」(Il Giornale dell’Anima)는 14살이던 1895년부터 죽음이 가까워진 1962년, 교황의 나이 82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중단되지 않고 쓴 일련의 그의 영성에 관한 독백 형식의 글이다. 그가 하느님과 함께한 영성의 고백, 끊임없는 양심의 성찰을 기록한 글이다. 60년 넘게 쓴 그의 글은, 베르가모에서의 어린 시절과 신학생 시절, 30여 년간 로마에서의 사제와 주교, 외교관 시절,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 그리고 로마에서 교황으로 살았던 시기의 영성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그가 쓴 작은 공책들의 겉표지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의 말을 제목처럼 적어 놓았는데, “단순함과 신중함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정점이고, 이는 ‘천사적 삶(Vita Angelica)’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는 성인의 말이 라틴어로 적혀 있다. 단순함(Simplicitas)과 신중함(Prudentia)에 대해서는 프랑스 작가 죠르주 베르나노스(1888∼1948)도 언급했다. 베르나노스는 어린 시절의 단순함을 잃지 않고 지닌 사람이 진정한 성인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소명을 키워나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안젤로는 바로 그 어린 시절의 단순함을 통하여 성장하고 싶어 했으며, 그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소 짓고 싶어 했다. 사후에 2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일지에서 교황은 스스로 “내 영혼은 나의 다른 어떤 글보다 이 ‘사랑의 일지’에 더 많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흰 빵 그리워하며 지겹도록 먹었던 ‘폴렌타’

 

정확히 4년 7개월 6일의 교황이었던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즉, 요한 23세! “교회는 더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가꾸어 나가는 정원과도 같습니다”라고 말한 그는, 교회는 더는 예전의 교회가 아니었음을, 그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교황은 사제이며 아버지이며 목자임을, 문화에 대한 사목적 배려, 교의에 대한 경건함과 과학을 통한 지혜를 충분히 안고 가는 교회임을 천명(闡明)하였다. 여기서 내가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요한 23세의 위대함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하느님 사람으로서 하느님에 귀를 기울였고, 하느님을 말하였으며, 하느님의 눈과 입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한 사람이다. 프란치스코, 베네딕토 16세,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1세, 바오로 6세 교황들의 탄생은 바로 여기서부터, 즉 요한 23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 호부터 만나볼 파파 부오노, 요한 23세에 가슴이 설렌다. 가난한 집 아이 안젤로가 어렸을 적 흰 빵을 그리워하며 지겹도록 먹었던 폴렌타가 오늘의 레시피이다. 우리네 보릿고개의 배고픔 안에서 쌀밥을 그리워하듯 말이다.

 

 

레시피 : ‘폴렌타’(Polenta, 옥수수 가루를 쑤어 만든 수프의 일종)

 

▲ 준비물: 옥수수 가루 250g, 물 1ℓ, 한 찻숟가락(Teaspoon)의 올리브유(엑스트라 버진), 한 찻숟가락의 굵은 소금.

 

→ 예전에는 동으로 된 냄비에 폴렌타를 만들었으나, 바닥이 두꺼운 스테인리스 냄비를 써도 좋다.

→ 냄비에 물을 넣고 올리브유와 소금을 넣고 저어가며 녹인다. 중간 불 위에 옥수수 가루를 비 오듯 뿌려가며 동그랗게 한 방향으로 젓는다. 다 넣은 다음, 계속 35분에서 40분간 저어가며 익혀야 한다. 죽보다는 좀 된 형태의 폴렌타가 되었으면 나무 그릇에 담는다. 일반 접시에 담으면 물이 생기기 때문에 나무 접시를 사용한다.

→ 폴렌타와 곁들여 먹는 요리로는 송이버섯 볶음이나 돼지갈비를 넣고 푹 끓인 토마토소스를 얹는다.

 

▲ 모니카의 팁

 

폴렌타는 주로 이탈리아 북부 농가에서 먹는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다. 밭에서 일하다 모인 대가족의 점심을 일일이 접시에 담아 먹을 수 없다 보니, 커다란 식탁 위에 뜨거운 폴렌타를 펼친 다음 그 위에 돼지갈비의 토마토소스를 얹고 포크 하나로 자기 앞의 폴렌타를 땅따먹기하듯 떠먹는 것이 이탈리아 농가의 예전 모습이었다. 나도 실제로 먹어 본 적이 있다. 남부 풀리아(Puglia)에서는 남은 폴렌타를 굳혀서 얇게 잘라 튀긴 것을 스갈리오체(Sgagliozze)라고 하는데, 길거리 음식으로 이 또한 별미이다. 옥수수 가루는 인터넷에서 살 수 있다. ‘폴렌타용 옥수수 가루(Farina di mais)’로 사면 된다. ‘인스턴트 폴렌타’(Polenta istantanea)라는 것도 있는데, 짧은 시간 안에 만드는 것이라 제대로 된 맛이 나질 않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0월 2일,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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