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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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05 ㅣ No.885

[레지오 영성]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요한복음은 제1장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장엄하게 증언하면서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로 우리의 생명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의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의 ‘영신수련’에서 하느님 성삼위께서 어떻게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시는가, 또 어떻게 성자께서 이 세상의 죄 속으로, 어둠 속으로, 아픔 속으로 사람이 되어 오시는가를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의 안위와 편리, 나아가 나의 이기심에 사로잡히기 쉬운 우리는 거듭거듭 이 하느님 사랑의 시선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도 더 넓게 또 더 깊은 연민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모든 것을 공동선으로 이끄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 활동에 협력할 수 있게 됩니다.

 

육화, 즉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는 하느님의 강생은 그야말로 신비입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계시이며,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믿음의 영역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육화의 이치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와 같아지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는 참으로 겸손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온 세상의 아니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시지만 결코 당신의 힘을 과시하시거나 당신의 존재를 강요하시지 않고 평범하고 겸손하게 우리 가운데에 사셨습니다. 평범하다 못해 비천하게 사셨으므로 당신의 놀라운 공생활 활동, 권위 있는 가르침과 복음 선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몰라보았고, 결국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온 우주를 주재하시는 하느님이시지만 이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가운데 현존하심은 참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부드럽고 겸손하게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그분의 놀라우신 경륜입니다.

 

 

육화의 이치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

 

영원히 살아계시고 또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에,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가장 어둡고 아픈 곳으로 임하시며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범으로 따르며 그분과 일치하고자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러한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시고 기르시고 봉헌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가장 깊게 관여하시고 가장 크게 협력하시는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초대에 가장 민감하게 응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죄가 많고, 문제가 많고, 갈등이 많은 곳을 피해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그러한 곳으로 씩씩하게 나아가며,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의 외아들에 대한 믿음과 구원의 상관성을 강조하면서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다름 아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 아둔한 군중들은 차치하고 하느님을 열심히 섬긴다던 종교지도자들이 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배척하고 심지어 그들이 멸시하던 이방인 로마의 힘을 빌려서 그분을 제거하기까지 하였을까요?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지만 정작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사랑, 말구유에 뉘어지시고, 머리 둘 곳 없이 떠도시고, 십자가의 길까지 묵묵히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악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들은 권력가였고 기득권자였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 가시가 되었고, 그들의 길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외아들로서의 참된 권위에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 독성죄의 올가미를 씌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을 만난 시메온의 예언처럼 빛이신 그분 앞에서 그들의 어둠의 행실은 밝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감실 안의 예수님뿐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 만나야

 

이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이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라고 자상하게 설명까지 덧붙인 마태오 복음은 그 25장 “최후의 심판”에서 다시 한번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기시켜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 선언적인 말씀은 그분께서 단순히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와 아주 깊게 일치하고 계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심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지금 나에게 가장 작은 이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게 됩니다. 우리가 무시하기 쉽거나 멀리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겠지요?

 

우리와 함께 죄인들의 대열에 서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신 겸손하신 성자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성부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언어와 몸짓으로, 인간의 눈높이로 하느님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사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체화 되었고,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 우리 안에서,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구체화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이웃들 특히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도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8월호,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이주노동자 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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