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어머니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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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05 ㅣ No.886

[허영엽 신부의 ‘나눔’] 어머니의 시계

 

 

부모님 기일이라 형제들이 묘소에 모여서 기일 미사를 드렸다. 각자 떠나는 길에 형님 신부님이 작은 쇼핑백 하나를 주셨다. 사제관에 오자마자 풀어 보니 어머니의 시계가 들어있었다.

 

장례 후 형제들이 유품을 정리할 때 나는 어머니 집에 가지 않았다. 늘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그 집이 어머니 없이 텅 빈 사실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보통은 강한 인상적인 장면이나 마지막 순간이 기억에 오래 남기에 나는 그 슬픈 기억을 담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때 누나와 형제들은 어머니가 쓰던 묵주나 십자가 등 성물들을 가져가 어머니를 기억하려 했다.

 

어머니의 오래된 시계를 보자 그제야 1987년 어머니의 환갑 때 형님 지인이 시계를 선물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머니는 평생 시계를 차지 않으셨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 시계를 보며 어머니가 양장을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늘 손에 물이 젖은 상태로 지내셨기에 시계도 차지 않으셨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께 용돈은 드렸지만 선물은 딱 한 번 했다는 생각도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여에 수학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전날 친구들이 시내를 걸어가다가 시장을 보더니 우르르 몰려갔다. 부모님 선물을 산다는 것이었다. 나도 얼떨결에 항상 한복을 입으시던 어머니 생각에 값싼 브로치 하나를 샀다. 포장지는 고사하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방에 쑥 집어넣었다. 다음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방에서 돋보기를 쓰시고 큰 이불을 꿰매고 계셨다. “수학여행은 재미있었니?” 나는 대답 대신 브로치가 든 신문뭉치를 이불 위로 툭 던졌다. “이게 뭐니?” “선물!”

 

난생처음 어머니께 선물을 드리는 게 왠지 낯설어서인지 말없이 휙 돌아서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외출 때마다 몇 개 있는 브로치 중 내가 드린 그 싸구려 브로치만 항상 매셨다. 그 브로치만 몇 년 쓰시다 보니 결국 망가져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브로치도 많은데 내가 어린 시절 드린 싼 브로치만 몇 년 내내 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시공을 초월해 지금 느껴졌다.

 

 

내가 드린 값싼 브로치를 항상 매셨던 어머니

 

기억은 참 이상하다. 무언가를 생각하면 단서가 되는 것을 통해 기억 저편에 있던 기억들이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는 특별한 체험을 한다. 마치 무의식이란 칸 속에 저장되어있는 데이터가 어떤 명령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성서못자리 지도신부를 할 때 어머니의 생신 전 집에 가다가 길에서 잡화를 파는 상인을 보았다. 허름한 여러 잡화를 늘어놓고 팔고 있었는데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사실 스카프를 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다른 것은 생활용품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싼값이었고 내가 봐도 아주 조악한 것이었다.

 

선물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집에 갔더니 어머니는 늘 하시던 대로 나를 맞아주셨다. “식사는 했어요?” 어머니는 늘 누구를 맞을 때도 그렇게 물으셨다. 나는 어릴 때 “어머니 요즘 굶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짜증 섞인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때 빙그레 웃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굶을 때가 많았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인기척이 나서 누운 채로 밖을 내다보았는데 어머니가 외출해서 돌아오셔서 부엌에서 소금을 한 줌 가져다가 드시고는 물을 한 바가지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왜 소금과 물을 드실까 했는데 나중에 먹을 것이 없을 때 생긴 버릇이라 늘 허기가 지면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안함에 늘 눈에 이슬이 맺힌다.

 

내가 가져온 선물을 드리려고 앉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들뜬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막내 신부님이 이것을 선물로 주었는데 너무 비싼 것 같기도 하고 맞으면 작은 신부님이 입으세요”

“아니 선물 받으신 것을 왜 내가 입어요?”

 

자세히 살펴보니 가디건과 폴라티였는데 한눈에 봐도 아주 고가의 제품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선물에 흠뻑 취해 내심 기뻐하시는 것을 보니 이천 원짜리 스카프는 손이 부끄러워 도저히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을 떠나기 전 현금을 어머니 손에 쥐여 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돈과 함께 그 스카프를 드렸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막심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어린애 같은 생각을 했을까 자책이 든다.

 

 

왜 나는 어머니가 아프실 때 손 한번 따뜻이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어릴 때를 생각하면 우리 가족은 가족끼리만 산 적이 없다. 우리 집에는 가족 외에 다른 군식구들이 항상 함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시골의 작은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했던 아버지는 고아가 된 아저씨 두 명을 데리고 집으로 오셨다. 어머니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 집 식구(?)가 또 늘었다. 늘 있는 일이라 그런지 어머니는 별로 놀라지도 않으셨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많은 가족들, 지인들이 우리 집에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머무르셨다. 한 가족 7명은 8년을 살다가 떠나셨다.

 

지금 생각하면 식사며 빨래며 모든 수발을 어머니가 다 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때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겠지만 속으로 누르고 눌렀던 어머니의 일생이 마음 아프다. 어머니는 평생 병원 한번 안 가시고 노년에 수술하실 때야 비로소 병원에 가셨다. 머리가 아프시면 이마에 찬 수건을 얹고 가루 두통약을 드시고는 오히려 대청소, 이불 빨래를 하시면서 몸을 더 힘들게 해서 병을 이기신 것 같았다.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늘 기도하셨던 어머니는 무슨 지향으로 기도를 그렇게 하셨을까 궁금해진다.

 

왜 나는 부모님의 생일만이라도 작은 선물을 하지 못했을까? 아파서 누워 계실 때 왜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왜 한 번도 따뜻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꼬옥 안아드리지 않았을까?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기지만 글을 읽는 독자 중의 한 명이라도 이런 행동을 한다면 큰 기쁨이 되겠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8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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