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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유치진 돈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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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2-26 ㅣ No.108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9) 유치진 돈 보스코 (상)


한국 연극의 아버지… 피압박 민족의 설움 무대로 달래다

 

 

- 집필중인 유치진. 「자서전」에서

 

 

1970년대 초, 서울 남산에 있는 드라마센터에서 연극 ‘금관의 예수’가 공연되었다. 무대에는 머리에 금관을 얹은 예수 입상 하나, 그리고 나병 환자, 걸인, 매춘부, 순경, 사장, 수녀, 신부 등 갖가지 인간상이 등장해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사회 정의의 타락과 위선을 이야기한다. 또한 썩어빠진 사회 현실 앞에 무기력한 종교의 모습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가톨릭 단체인 ‘한국 팍스 로마나’가 주최하고 가톨릭시보사와 한국정의평화위원회의 후원으로 공연되었다. 예전부터 종교단체는 선교의 수단으로 연극을 활용해 왔다. 그래서 종교단체에서 올리는 연극은 성스럽고 계몽적인 내용이 일색이었다. 그런데 가톨릭 단체가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을 질책하며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판한 연극을 올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치진(돈 보스코, 柳致眞, 1905~1974)은 자신이 건립한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된 ‘금관의 예수’를 보고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예수는 외롭다. 왜? 예수는 황금이나 권력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예수를 팔며, 그러기 위해 입상의 머리 위에 금관을 씌워 놓았다. 정작 예수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 그리고 굶주리고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격리되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고와 굶주림에 못 견디던 나병 환자가 하루는 콘크리트 예수의 입상 머리 위에서 금관을 발견한다. 그 황금 덩어리가 탐이 나서 훔치려 든다. 콘크리트 입상이 입을 연다. ‘가시관이 마땅한 내게는 금관은 아무 소용없다. 그 금관을 가지고 가라. 이왕이면 내 전신을 싸고 있는 콘크리트를 벗겨 나를 황금광과 권력광으로부터 해방시켜 나를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게 해 달라’ 이 얼마나 오늘의 격하되어 가는 교회에 대한 대담하고 신랄한 비판인가?”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 우리와 함께하소서.” 연극 ‘금관의 예수’에서 부른 이 노래는 시인 김지하가 작사하고 김민기가 작곡했다. 그리고 양희은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한때 저항의 노래로 많이 불렸다.

 

 

허약했던 어린시절 죽음 자주 생각

 

유치진은 구한말 풍운이 몰아치던 위태로운 시기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맏아들이었고, 시인 청마 유치환이 동생이었다. 유치진은 심신이 허약했다. 한번은 보통학교 자연 시간에 선생님이 지진과 해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무서워서 바닷가에 나가지 못했고, 산등성이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유치진은 키만 컸지 몸은 마르고 다리가 길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기린’이라고 놀렸다. 병치레도 잦아 감기, 소화불량, 배탈, 설사를 몸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극예술연구회 창립 당시 회원들. 뒷줄 오른쪽 끝이 유치진. 「유치진 평전」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 책 즐겨 읽어

 

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우체국에서 일했다. 유치진은 부친에게 일본으로 유학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부친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3·1운동이 일어났다. 횃불 들고 만세 부르던 사람 중에 동창생이 있었는데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해 옥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부친은 아들의 일본 유학을 허락했다. 유치진은 일본 도야마 중학에 입학했다.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을 즐겨 읽었다. 그러다가 유치진의 인생관을 크게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진도 7.9의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도쿄와 요코하마를 비롯한 간토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40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일본인을 살해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소문이 급격히 돌았다. 일본인들은 총과 칼 그리고 죽창을 들고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죽였다. 이렇게 희생된 조선인은 1만 명 가까이 되었다. 유치진은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강하게 느꼈다.

 

중학을 졸업하고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릿쿄대학은 세인트 폴 대학으로 알려진 일본 최대의 기독교 계열 대학이었다. 유치진은 그곳에서 프랑스 극작가 로맹 롤랑의 「민중예술론」에 깊이 빠졌다. 이 책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유치진의 막연한 생각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래서 일생동안 연극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유치진은 극장을 많이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안톤 체호프와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었고, 스타니슬라브스키 「배우론」도 공부했다.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지 지배받으며 수치와 고통을 겪은 아일랜드 연극에 마음이 와 닿았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인물이 숀 오케이시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울분이 담겨있었다.

 

유치진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김진섭, 이하윤, 서항석, 이헌구, 함대훈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극연)를 만들었다. 극연은 해외 근대극을 번역해 공연하면서 신극 운동을 펼쳤다. 정지용, 김동인, 현제명, 변영로, 이희승 등이 찬조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극연은 단순한 공연단체가 아닌 민족운동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극연은 유치진의 ‘토막’을 무대에 올렸다. 유치진은 연출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는 김동원, 이해랑, 이진순, 황순원 등의 유학생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목표로 동경학생예술좌를 만들었다. 첫 공연으로 유치진의 ‘소’를 올렸다.

 

유치진은 국립극장장 시절 ‘뇌우(雷雨)’를 직접 연출했는데 연극 공연 역사상 관객 동원 신기록을 수립했다. 「유치진 평전」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병 얻고 정신 황폐화

 

귀국 후, 경성미술학교 영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심재순을 만나 결혼했다. 심재순의 집안은 명문가였다. 친할아버지는 고종 황제와 이종사촌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참정대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들이 유치진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종로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일본에서 공연한 ‘소’가 사회주의 선동극이라며 그 배후를 대라고 혹독하게 고문했다. ‘소’는 농촌의 붕괴와 농민의 몰락을 묘사한 순수 농촌극이었다. 유치진은 당시 고문의 후유증을 “육체적으로는 불치의 신경통이라는 고질병을 안겨주었고, 정신적으로 황폐할 정도여서 나로 하여금 모멸감을 갖도록 해줌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유년 시절의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조선총독부는 유치진에게 일제에 협력할 극단을 만들라고 협박했다. 이를 거절하자 경찰서로 연행해 일주일 동안 심문했다. 그리하여 국민연극을 내세운 ‘현대극장’이 급조되었다. 첫 작품으로 유치진의 ‘흑룡강’을 올렸다. 이는 일제의 분촌 정책을 합리화한 작품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유치진은 심한 자괴감과 수치심으로 괴로워했다.

 

해방 후에 유치진은 3·1운동 이야기를 다룬 ‘조국’을 썼다. 그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국제극장 무대에 올랐다. 유치진은 이에 대한 감격을 “해방 이후 내 작품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가는 감격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일제 말엽 치욕스런 국책극을 하는 가운데 ‘북진대’를 공연한 뒤 자못 5년여 만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주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유치진은 한국무대예술원 원장에 취임해 ‘전국연극경연대회’를 개최했고, 연극학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정부에 부민관(현 서울시 의회)을 국립극장으로 만들자는 건의를 해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유치진은 초대 국립극장장으로 임명되었다. 국립극장의 개관작품으로 유치진의 ‘원술랑’이 공연되었다. 이어서 ‘만리장성’, ‘춘향전’ 등을 계속 올리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뇌우(雷雨)’는 유치진이 직접 연출을 맡았는데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정동까지 늘어설 정도로 연극 공연 역사상 신기록을 수립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2월 25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50·) 유치진 돈 보스코 (하)


연극계의 다빈치… 극작부터 연출 · 이론 · 경영 · 교육까지 다재다능

 

 

서울연극학교에서 유치진. 「자서전」에서

 

 

유치진은 세계 연극 기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통해 무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드라마센터를 짓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미국 록펠러재단에 편지를 보냈다. 고맙게도 재단에서 지원금을 보내왔다. 그 지원금은 센터를 짓는데 일부분밖에 되지 못했다.

 

집에 있는 재산을 모두 건축비로 사용했다. 그런데도 돈이 많이 부족했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다. 그런데 융자받은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수십 년 동안 살던 집과 처남의 집, 남은 부동산까지 모두 처분했다. 이제 유치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곳은 드라마센터 뒤쪽에 임시로 마련한 거처뿐이었다. 드라마센터 설계는 건축가 김중업이 맡았다. 천신만고 끝에 드라마센터가 완공되었다. 드라마센터는 서양의 고대극장과 근대극장 구조를 모델로 했으나 가톨릭 성당 구조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유치진은 ‘객석 뒤의 원형 무대는 그리스의 야외극장을 본뜬 것이지만 힌트는 사실 가톨릭교회의 성가대 무대에서 얻었다’고 했다.

 

개관기념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올라갔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이후에도 드라마센터는 계속해서 공연을 올렸다. 그렇지만 공연 적자는 끝없이 불어났다. 이에 유치진은 처절한 고통을 느꼈다.

 

“사람이 빚에 시달리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고 치사스러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참으로 인격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고문 그 자체이고, 오직 정글의 법칙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센터는 공연뿐만 인재 육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문 연기자와 학구적 연극 인재를 키운다는 목적으로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연극아카데미는 후에 서울예술대학교로 도약 발전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극, 영화, 방송, 문학, 음악, 무용, 디자인 분야에서 기라성같은 예술가를 배출했다. 연기 분야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신구, 전무송, 이호재, 정동환, 독고영재, 길용우, 유동근, 박상원, 최민수, 신동엽, 황정민, 전도연, 김하늘, 손예진 등을 들 수 있다.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 관람 후 파티장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유치진 평전」에서

 

 

배우 ‘신구’ 이름 지어준 선생님

 

유치진과 제자들과의 따뜻한 일화가 전해진다. “내 이름은 원래 신순기다. 동랑(유치진의 호) 선생님이 ‘신순기’는 배우 이름으로는 너무 촌스러우니 하나 지어주시겠다 말씀하셨다. …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서재로 부르시더니 종이에 내 이름을 불쑥 써서 내미셨다. 바로 ‘신구(申久)’였다. … 내게 영원히 붙어있는 선생님의 그림자는 바로 내 이름의 두 글자 ‘신구’다.”(신구)

 

“선생님은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해. 술과 여자를 조심해라. 넌 민들레 씨앗 같은 배우가 돼서 이 척박한 연극 풍토에 꽃을 피워야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민들레 씨앗’은 내 인생의 지침이 되고 있다.”(전무송)

 

“주인공이었던 내가 무대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 팬티를 보시더니 당장 빨간 팬티를 사오라고 하셨다. 빨간 팬티를 사왔더니 입으라 하셨다. 옷을 갈아입는 공연 장면에서 빨간 팬티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주신 선생님의 연출 감각에 모두 놀랐다.”(이호재) “나는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무대의 막을 올리고 내리는 것을 배웠다. 선생님은 ‘연극은 막을 여는 것에서 시작해 막을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막이 잘못 올라가면 연극 또한 시작부터 잘못되는 것이다. 막을 내릴 때도 역시 제때 내리지 못하면 마무리가 잘못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지금도 내가 무대에 설 때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정동환)

 

-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함께.(오른쪽 두번째 유치진)

 

 

6·25 전쟁으로 가톨릭과 인연

 

유치진은 자신의 수필 ‘나의 이상적 여성 타입’에서 자애로 넘치는 성모 마리아를 ‘나의 영원한 동경이며, 구원(久遠)의 여성상’이라고 했다. 유치진은 극예술연구회가 제작한 영화 ‘애련송’에서 비록 단역이기는 하지만 자청해서 신부(神父) 역을 맡았다. 가톨릭과 직접적인 인연은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유치진은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국제시장 위쪽에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지리한 피난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병으로 나타났다. 유치진은 만성 맹장염을 앓았고, 딸은 폐렴, 큰아들은 늑막염, 막내아들은 심장병을 앓았다. 그래서 밤이면 온 식구의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다행히 미국 가톨릭 선교회가 운영하는 메리놀병원에서 삼 남매가 무료로 치료받아 병이 모두 나았다. 유치진 부부는 이에 크게 감격했고 가톨릭에 깊은 호감을 가졌다.

 

부인과 아이들이 가톨릭에 입교하기 위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진의 가톨릭 입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장발 루도비코였다. 그는 예술원 창립 때부터 유치진과 함께 일해오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유치진은 6개월 동안 꼬박 교리 공부를 했다. 유치진 부부는 서울 세종로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박귀훈 신부가 세례성사를 집전했고, 대부는 장발이었다. 유치진의 세례명은 ‘돈보스코’이고 부인 심재순의 세례명은 ‘데레사’였다. 그 세례식은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정치계, 학계, 경제계 등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 33인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 파리 김환기 화백댁 방문. 「유치진 평전」에서

 

 

‘성야’ ‘이름 없는 꽃들’ 등 연극 통해 선교

 

유치진은 가톨릭 신앙을 연극으로 보답했다. 연극을 통해 선교활동을 한 것이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오혜령 작가의 단막극 ‘성야(聖夜)’를 유치진이 직접 연출했다. 오 작가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다. 유치진은 자신이 추구하는 수도자의 성속(聖俗) 문제를 오 작가가 대담하게 묘사한 것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유치진은 오 작가를 유난히 아꼈다. 오 작가가 두 번째로 쓴 ‘인간적인 진실로 인간적인’도 직접 연출했다. 이 작품 역시 가톨릭 신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다. 서울대교구는 유치진을 초청해 문화행사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유치진은 노기남 대주교와 친분이 깊었다. 노 대주교는 드라마센터에서 가톨릭 정신을 기리는 작품이 공연되기를 희망했다. 유치진은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문화계 대표로 참여해 연극 공연으로 화답했다. 그 작품은 가톨릭시보사가 공모한 ‘이름 없는 꽃들’로 김대건 신부의 일생을 다룬 극이었다. 극단 드라마센터가 이 작품을 올렸다. 수많은 교우가 공연을 관람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중진 작가가 쓴 작품 ‘김대건 신부’를 드라마센터 무대에 또다시 올렸다. 또한 유치진은 가톨릭문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회원은 시인 구상과 김남조, 극작가 이서구, 아동문학가 이석현, 평론가 구중서와 임중빈 등이었다. 그런데 임중빈이 「다리」지 필화사건으로 용공의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문우회는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유물론적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평론가’라는 진정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했는데 유치진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유치진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전교 사업의 일환으로 TV ‘드라마’ 상영을 계획하고 앞으로의 방향과 상영에 대한 의견을 듣는 모임에 초대되어 기탄없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치진은 가톨릭 복음화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유치진은 연극인 간담회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뇌 내출혈로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치료했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드라마센터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 미사는 유치진에게 세례를 준 박귀훈 신부 집전의 연극인장으로 거행되었다.

 

“유치진은 창작이나 이론 같은 어느 한 분야에 전념해온 예술인이 아니라 극작과 연출, 이론, 경영, 교육 등 연극의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게 활약했기 때문에 문단의 이광수와 비견될만한 다빈치적인 인물이다.”(연극평론가 유민영)

 

참고자료 : ▲ 유치진 「동랑 유치진 전집 9」(자서전). 1993. 서울예대출판부 ▲ 유민영 「한국연극의 아버지 동랑 유치진」 태학사. 2015 ▲ 백형찬 「한국예술의 큰 별 동랑 유치진」 살림지식총서 451. 살림출판사 ▲ 가톨릭신문(1972.3.12) ‘풍자극 금관의 예수-이동진 작·최종률 연출’ ▲ 가톨릭신문(1964.10.11) ‘서울 세종로본당에서 10월 1일 저명인사 33명 입교’ ▲ 가톨릭신문(1966.1.23) ‘TV에 전교 「드라마」, 의견 청취 CCK 신자 작가 초대’ ▲ 가톨릭신문(1971.6.27.) ‘가톨릭 문우회, 당국에 진정서 제출’ ▲ 가톨릭신문(1970.6.7) ‘가톨릭문우회 창립’ ▲ 서울예술대학교 홈페이지

 

※ 지난 1년 동안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를 연재해주신 백형찬 라이문도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월 1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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