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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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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17 ㅣ No.1162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구약이 하느님과 만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했다면 신약은 역사적이면서도 역사를 뛰어넘는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귀한 책입니다. 또 예수님을 만난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식을 함께 듣게 된 이방인 신자들의 족적을 증언한 책입니다. 끊임없이 이방인, 이민족과의 대결 속에서 야훼를 찾았던 유다인들의 기록인 구약에 비해 어떤 종류의 타자(他者)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신약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공통적인 울림을 줍니다. 어떤 민족인지,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어떤 성별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조건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좁은 편견과 차별의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려 애썼습니다. 누군가에게 회의가 들 때 무언가 잘 풀리지 않아 좌절할 때, 또 정의롭지 못한 사건에 분노를 느낄 때 신약을 읽다 보면 꽁꽁 얼었던 마음이 풀리고 다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천 년이 넘은 과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지만, 특히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들도 보이기 때문에 예전과는 좀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정신 건강 의학과 의사로서 일한 지 40년이 되어가고, 융 분석가가 된 지 2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사람의 마음에 대해 모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의학이나 심리학의 설명 역시 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인과응보나 신상필벌 같은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여러 가지 불행들, 또 아직까지 과학으로도 도저히 규명되지 않는 인생의 과제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왜 죄 없는 아이들과 사람들이 전쟁과 폭동으로, 또 살인강도로 다치고 죽어 가야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갑작스러운 사고와 죽음, 그리고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누구나 겪게 되는 노화와 질병,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대처하고 준비해야 할까요. 의학과 심리학으로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의논한다 해도 그런 인생의 근본적인 숙제들 앞에서는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종교는 유일하게 매달릴 마음의 동아줄이 되어 줍니다.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릇이 작은 탓에, 제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 쩔쩔 매고 좌절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경과 교리, 성직자들, 그리고 성인 성녀의 가르침은 큰 힘이 됩니다.

 

무엇보다 오로지 끝없는 사랑만 실천하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신비롭습니다.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고, 어쩌면 그 상황을 피할 만도 한데, 사랑 때문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비탄이나 억울함,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시고, 용서하시며 배려하시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까지 남기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놀랍습니다. 부활의 과정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을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감동에 말을 잃게 됩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예수님께서는 못난 인간들의 세상을 그다지도 사랑하고 아끼실 수 있었을까요. 저의 좁은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신비입니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경외의 사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참 많은 상상과 추측을 하게 됩니다. 기록된 분량이 워낙 소략한데, 그 상징과 내용이 방대해 구절 하나하나에서부터 장면들까지 해석도 다양합니다. 모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연관시킬 수 있는 주제들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주제를 분석심리학에서는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부모, 탄생, 죽음, 사랑, 일, 친구 등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게 되는 대상들과 그 대상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들입니다. 인류가 이런 상황에 대한 공통의 경험을 언어로 공유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역사에는 문화도, 진화란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형적 개념이 녹아 있는 장르로 흔히 민담, 전설, 신화를 이야기하지만 문학 등 모든 예술 작품에는 이런 원형적 상징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한데 종교 경전에도 이런 원형적인 상징들과 관련된 내용이 보입니다. 특히 인류의 고전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 사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도 아주 좋은 연구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 지면에서는 성경의 내용을 심리학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대신 저의 주관적인 성경 체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수수께끼 같은 대목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는 계속하겠지만 저의 생각들은 검증된 객관적인 주장이기보다는 검증의 영역과는 다른 주관적 체험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신앙과 예술은 주관적 체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포용해 주는 영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가차 없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과학의 영역에 비해 상상과 추측과 감정의 소중함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어쩌면 살아가는데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흔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의미를 ‘가르치고(teaching), 강론하고(preaching), 치유하는(healing) 기적’으로 이해합니다. 제 잘난 맛에 겨워 스스로의 심각한 오류에 대해 무지한 우리들처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도대체 깨달은 것이 없는 무지한 대상을 가르치고, 강론해야 했으며, 그들을 치유해 주기 위해 애쓰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무지와 비겁과 욕심들은 바로 나 자신의 무지와 비겁과 욕심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스스로를 보며 살피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나마 예수님이 살아계셨던 시기가 어떠했는지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내 삶의 오류를 탐색하고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기는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위기와 격동의 시기입니다.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동방 원정군 사령관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다시 파르티아인들이 팔레스티아를 점령해서 마카베오 왕조의 마지막 왕 안티오코스를 후원합니다. 당시 권세가였던 헤로데는 일단 로마로 피신해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후 약 33년간 팔레스티아를 다스리는 위치에 섭니다. 이미 전란과 침략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살림은 돌보지 않고 헤로데는 자신이 살 왕궁과 허세를 부릴 예루살렘 성전 증축 공사를 단행합니다. 유다인도 아니면서 로마를 등에 업고 왕이 된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키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허세 가득한 로마 문화에 찬탄하며 흉내 내기 급급했을까요. 정권과 결탁된 토호들과 토건족의 배를 불려주기 위함일까요.

 

어쨌건 헤로데 왕의 성전 건축 전후의 행동을 보면 신앙심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까 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기록이 된 것을 보면(마태 2,17 참조) 헤로데는 국가나 민족보다는 자신의 안녕에 삶의 목적을 둔 부패한 권력자로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윤리적인 면은 또 어떤가요. 헤로데는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는데, 이는 유다 법상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지적하는 요한을 미워한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이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자 얼른 요한을 죽여 버립니다.(마르 6,25 참조)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율법과 전통을 무시한 권력자가 전횡을 휘둘렀던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요. 이후 헤로데 일가는 팔레스티아를 분할 통치하면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각 지역에서 공물을 뜯어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어땠을까요. 외세인 로마와 정통성을 잃은 왕가에 대한 반감이 깊었을 것입니다. 열혈당처럼 테러와 혁명을 꿈꾸는 사람부터 에센파처럼 아예 사막으로 칩거한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빛이 될 것 같던 세례자 요한은 그러나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길을 잃은 백성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고 격려와 위로를 보내며 병을 낫게 해 주는 예수를 오해해서 그를 중심으로 그 세력이 결집될 수 있다고 꿈꾸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죽음, 부활 이야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세속의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석심리학적인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물에 대중들이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자신의 생각을 투사(Projection)한 것이지요. 누구에게는 그저 최하층 계층인 목수의 자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랍비, 메시아, 새로운 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민족을 실망시킨 가짜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오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하느님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신약이 아닐까요.

 

다음 호에서는 그 당시의 이른바 엘리트인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왕과 귀족들이 어째서 예수님을 그리 두려워했는지, 또 혁명을 꿈꿨던 열혈분자(Zealot)나 일반 대중들이 왜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렸는지에 대해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종교사학자도, 주석학자도 아니니 그다지 권위는 없을 추론입니다. 다만 현대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사회적 과제들에 대한 생각과 연결시키면서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봅니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이나미(리드비나) 교수님의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 건강 의학과 박사인 이나미 교수님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로 한국 융 연구원 상임이사 및 지도분석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관련된 저서로는 『슬픔이 멈추는 시간』(민음사), 『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이랑),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들』(생활성서사) 등이 있습니다.

 

[월간 빛, 2024년 1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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