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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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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9-10: 카인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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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02 ㅣ No.1982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9) 카인의 후예 (상)


“한민족끼리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 배척하고 다투는 것일까”

 

 

- 지난 2019년 4월 27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민통선에서 열린 ‘4·27 비무장지대(DMZ) 민(民)+ 평화손잡기’ 행사에 참가한 광주대교구 신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줄지어 서 인간띠를 만들고 있다. 사진 광주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제공

 

 

우리는 내년이면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된 지 80주년을 맞게 된다. 우리 겨레는 일본제국에 강제로 병합된 기간 36년 동안 일본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웠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패전하고 우리는 잠시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으나 곧바로 세계열강의 동서 냉전 구도에 편입되면서 국토가 분단되고 체제가 대립하고 겨레의 혼도 반쪽으로 쪼개졌다.

 

일제 식민 통치 기간의 두 배가 넘었는데도,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린 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수록 멀어지고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 동포를 적대하며 비무장지대 양쪽에 한반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엄청난 무기를 배치하고 해마다 수시로 전쟁 훈련을 반복하고 있다. 같은 핏줄이고 같은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이어받은 한 민족인데 왜 이렇게 오래 서로를 배척하고 단절과 대결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뿐 아니라 소위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고 내세우는 남한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고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서 주고받는 극단적인 언어의 구사는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선거철이 되면 한 집안에서도 사회 문제에 대한 이념적 입장과 가치관 충돌이 두려워 가족 안에서도 솔직한 대화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정치·사회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도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미워하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응징하는 폭력적 상황을 연출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잘 아는 한 직장인은 직장 상사의 집요한 괴롭힘과 악의적인 모함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다가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고 말았다.

 

학원에서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이유로 벌이는 따돌림과 폭행은 오래전부터 일상화되어 있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또래 친구에게 어떻게 그토록 몸서리쳐지는 잔인하고 난폭한 가학행위를 집단으로 자행할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상대방에게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평생 치유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고도 별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이런 포악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가를 즐기고 서로 친목을 다지기 위한 각종 스포츠에서도 프로 영역으로 진입하면 선수들 사이에서는 따돌림과 폭력이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나는 테니스나 배구 시합 중계방송을 즐겨 보며 좋아하는 선수들의 재능 넘치는 활약에 감탄과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어떤 시합에서는 즐거움보다 마음속에 서늘함과 씁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선수들은 경기 중 자신의 강력하고 절묘한 스트로크를 상대가 받아내지 못하였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거나 탄성을 지른다. 이는 선수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몸짓이니 멋있고 장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 선수들은 그런 순간에 외마디의 괴성을 지르며 상대 선수를 향해 거의 전투적이거나 위협적인 시선으로 쏘아보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선수의 얼굴에는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단순한 성취감이나 기쁨보다는 먹잇감을 낚아채고 정복한 짐승의 포효나 강력한 적의가 여과 없이 묻어나는 난폭한 표정이 스친다.

 

나는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씁쓸함을 느끼며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흉포함에 놀라곤 한다. 그 사람 내부에 일상에서는 표출되지 않는 포악한 에너지가 숨겨져 있지 않고서는 그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부터 창세기를 읽으며 제일 알아듣기 쉽지 않았던 것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였다. 카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 무슨 큰 사건이 터졌거나 다툼이 있었거나 하지 않았는데 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우 아벨을 들판으로 끌고 가 죽여버렸다. 카인은 농사를 지으며 농부로 살다가 땅에서 난 소출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로 살다가 양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굽어보셨으나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이에 카인이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사실 아벨이 바친 어린양 몇 마리보다 카인이 바친 농산물이 훨씬 값나가는 제물이다. [가톨릭신문, 2024년 4월 28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10) 카인의 후예 (하)


예수님은 힘으로 맞서는 대신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리셨다

 

 

- 2024년 2월 25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주년을 맞아 군중들이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이탈리아어로 ‘비폭력’(Nonviolenza)이라고 적힌 무지개 깃발을 들고 프란치스코 교황과 삼종기도를 바치고 있다. 사진 CNS

 

 

고대사회에서 농경문화를 이룬 종족은 부와 풍요를 구가했던 데 비해 유목민들은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축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소박한 유랑 생활로 만족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카인은 아벨보다 훨씬 더 유복하고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더 값진 자기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벨이 바친 보잘것없는 어린 양을 굽어보시자 카인은 몹시 화를 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신 하느님께 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다. 아벨은 카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열악한 환경에서 가축이나 따라다니면서 박복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아우를 카인은 애틋이 여겨 감싸고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였으니 카인 안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몹시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카인의 자세 안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공감도 동의도 할 수 없는 부정적 태도의 표출이다. 세상에서는 더 부유하고 더 힘이 있는 자가 더 높은 자리와 앞자리에 앉고, 약하고 가난한 자는 아랫자리에 앉고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관행이다.

 

카인은 하느님이 그런 세상의 상식에 따르지 않으시고 약자를 높고 좋은 자리에 앉히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냈다.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하느님을 마주 보기도 싫어서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거부요 저항의 자세다. 하느님은 카인의 이런 태도를 보시고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그를 노리게 될 것이라 하신다. 

 

카인 안에 하느님과는 공존하거나 어우러질 수 없는 죄악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양새다. 이 용암이 폭발하여 친아우인 아벨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살인에까지 이르는 포악은 카인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인이 취한 하느님에 대한 거부의 자세는 이미 아담과 하와 안에 사탄이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안에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포악의 뜨거운 에너지가 끓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불의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저지른 불의와 폭력의 화염은 우리 안에 옮겨붙으면서 새로운 포악의 에너지를 증산한다. 전쟁에 나간 병사가 처음에는 적이라 해도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이 쏜 총알로 내 옆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노의 에너지가 활활 타올라 응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번만 방아쇠를 당기면 그다음부터는 거리낌 없이 적에게 보복의 총알을 무제한 난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상대 포악의 에너지가 자신에게 전염되고 확대되어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사슬이다.

 

인류는 과연 이 포악의 에너지와 폭력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온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 자신 안에 그럴만한 역량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주신 것 같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로데 왕은 무자비한 비인간적 폭력으로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몰살시키는 참극을 저질렀다. 

 

그때 하느님이 보여주신 대처법은 도망치는 일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헤로데 왕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하느님 몫이었다. 죄악의 우두머리와 싸우는 일은 하느님이 감당하셨다. 하느님은 시간으로 헤로데 왕을 심판하시고, 아기와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안배하셨다. 루카 복음 22장 36절에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음모가 절정에 달하자,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 오른쪽 귀를 잘라버리자, 예수님은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마태오복음 26장에는 같은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박해자들의 음모와 폭력에 힘으로 맞서는 길을 포기하셨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악의 우두머리와의 싸움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리셨다. 이것이 우리 안에 포악과 폭력의 불씨를 심어놓은 악의 괴수에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고 지혜다. 카인의 후예인 우리가 그 포악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길이다.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5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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