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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11-12: 히로시마 상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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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11) 히로시마 상념 (상) 피해 당사자들의 시간은 고통에서 멈추고 지속된다
- 1945년 원폭 투하 6개월이 지난 일본 히로시마 시내. CNS 자료사진
한국과 일본 주교단은 1996년 이후 공통의 역사 인식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거의 해마다 각 교구를 방문하며 상대국 문화와 교회 사목 현황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왔다. 한국 주교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도 있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관도 몇 차례 관람했다. 두 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에 모든 생명체와 건축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비극의 현장이다.
1945년 8월 6일 10만여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8월 9일에는 7만여 명의 나가사키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피폭 생존자들의 증언도 듣고 원폭 투하의 결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참극을 불러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히로시마 시민들은 참극을 직접 온몸으로 겪은 당사자나 그 후손들로서, 핵폭탄의 공포와 고통을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경험한 세대로 인류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할 소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는 심정은 수긍하면서도 ‘왜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고 아시아 대륙의 수많은 시민에게 일본이 입힌 가해 책임에 대한 성찰과 사죄는 못 하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쟁 중 히로시마에는 아시아 대륙을 향한 전쟁의 전초기지와 군부대가 있었고, 나가사키에는 무기와 군함을 건조하는 항만 시설들이 있었다. 미군에게는 당연히 이 두 도시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폭격의 최우선 대상이었다.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 안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먼저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시작한 근원적 책임 의식과 회심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에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최근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씨가 쓴 「히로시마 노트」라는 저서를 읽으며 히로시마 시민들의 원폭 피폭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됐다. 어찌 보면 그 전의 나의 히로시마 인식은 주로 원폭이 폭발한 당일과 며칠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 또는 가자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있는가를 각종 보도에서 보고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노트」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그동안 핵폭발이 가져온 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접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오에씨의 「히로시마 노트」는 1965년 4월에 쓰였다. 원폭이 폭발한 지 20년이 지난 다음이다. 오에씨 본인은 히로시마에서 거리가 먼 에히메현에서 태어난 타지역 사람으로, 히로시마 시민들의 피폭에 대해서는 평소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히로시마 시민들을 만나고 히로시마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피폭 히로시마 시민들, 바로 죽지 않고 생존한 피폭자들이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겪어간 고통과 죽음, 절망과 침묵을 들여다보며 엄청난 충격과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이 책을 남긴 것 같다. 오에씨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탄 문인이고 많은 소설을 남겼지만, 그가 쓴 이 「히로시마 노트」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히로시마를 여러 차례 찾고 피폭자들을 만난 후 기록한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보통 큰 사고나 재앙이 터지면 언론은 사고 규모와 사상자 수를 먼저 알린다. 희생자 수가 많을수록 세상은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기억에는 수치들만 남는다. 그러나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에게는 피해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과 트라우마로 시간이 멈추고 인생이 격변하고 세상이 뒤집히는 현재가 지속된다. 제주 4·3사건 관련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시간이 멈추듯이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도 원폭 폭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
- 2023년 가톨릭한반도평화포험 마지막날인 지난 해 10월 29일 희로시마 세계평화기념성당에서 일본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한국, 미국, 일본 주교단. 이날 미사를 주례한 일본 나가사키대교구 전 교구장 다카미 미쓰야키 대주교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성찰과 반성을 촉구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보통 우리가 히로시마 핵폭발을 거론할 때, 폭발 직후 사망자가 10만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상자도 10만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못한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의사는 28명, 치과 의사 20명, 약사 28명, 간호사 13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진 자신들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폭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히로시마 의사회 원로 마쓰자카 요시마사(松坂義正)씨는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상당한 시민을 구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채찍질해 가며 아들 등에 업혀서 다시 히가시 경찰서 앞으로 되돌아갔다. … 구조라고는 해도 보관하고 있던 자재가 모두 불타고 경찰서에는 기름과 머큐로크롬밖에 없어 모여드는 부상자들에게 화상에는 기름, 상처에는 머큐로크롬을 발라 줄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의 의료인들은 한 번도 배운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원폭증에 속수무책이었다. 많은 부상자가 피폭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가 켈로이드 상태로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들은 전신 피로, 식욕부진, 탈모, 심한 가려움증, 검붉은 피부발진, 궤양 증세를 경험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갔다.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26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12·끝) 히로시마 상념 (하) 핵무기, 어떤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9년 11월 24일 일본 사목방문 중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원폭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사진 CNS
얼굴과 상체에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은 자신의 흉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랜 세월 집에서 숨어지냈다. 어떤 청년은 머리와 손에 켈로이드가 있어서 결혼도 못 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어떤 여성은 젖먹이 때 피폭을 당했고 18년 뒤에 임신했는데 출산 직후 골수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결혼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헤어지는 피폭자 부부도 적지 않았다. 어떤 아가씨는 우연히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이라 적힌 자신의 진료부를 보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히로시마시 외곽의 자선 시설에 있던 어떤 노인은 피폭자 수첩을 남겨두고 세토 내해의 페리 여객선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에게는 어떤 객관적 원폭증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노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피폭 때 생긴 독, 심각한 원폭증 노이로제에 빠져있었다. 87세의 또 다른 노인은 아들이 피폭하여 죽고, 손자를 힘들게 키우며 도쿄에 있는 대학까지 보냈으나 손자는 원폭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히로시마로 돌아왔다. 손자는 항상 피로를 느껴 누운 채로 지냈고 시력이 약해지더니 신장도 망가지고 백혈구 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얼마 뒤 손자는 안저출혈로 실명하고 한 달 뒤에는 피를 토하고 고통으로 발버둥 치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조용해져서는 “외로워, 외로워!”라고 말하더니, “아아, 아아, 아아” 세 번 흐느껴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노인은 정신 줄을 놓고 멍하니 앉아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손자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스모 최우수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오키나와의 한 건장한 청년은 나가사키 군수공장에서 피폭한 뒤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가 1956년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었다. 스스로 방사능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 섬에 있는 의사와 상담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의사는 당연히 원폭증에 대해 무지했고 그는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 스모의 요코즈나를 지낸 그는 결국 앉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이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1962년 그는 끝내 피를 반 양동이나 토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그런데도 오키나와에는 그가 원폭증으로 횡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의사가 여전히 없었다. 오키나와 원수폭금지협의회가 만든 리스트에 오른 피폭자 135명 대부분은 많든 적든 신체 이상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의사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불안감을 피로나 노이로제라고 진단할 뿐이었다.
히로시마 지역신문의 ‘히로시마의 증언’에는 원폭으로 자녀 다섯을 모두 잃고, 자신도 목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양팔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는 한국인 노부인에 관한 기사가 났다. 다 찌그러진 함석집에 ‘일본성결교단 히로시마 한국인기독회’라는 문패를 내걸고 살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그 노부인을 ‘미치광이 조선인 할망구’라 부르고, 본인 스스로도 절망하여 예전에는 “원폭을 투하한 미국을 저주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증오했다”고 한다. “그때 하느님의 은총을 입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자살하든지 미치든지 했겠죠.” 그녀는 신앙을 갖고 작고 가난한 교회를 세워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 대다수가 나의 아버지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일하러 갔거나 징용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피폭자 중 생존한 이들은 일본 패전 후 고향으로 귀국하고 오늘날까지 몸과 마음이 골병든 채 원폭증을 앓으며 서서히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는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이들이 피폭자들의 불행과 울부짖음을 전해왔으나 한국의 피폭자들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아무런 관심도 돌봄도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외로운 고통과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피폭의 고통과 비극은 2세대, 3세대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본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원폭증이 지금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 일본 청년들이 지난 2023년 11월 2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핵무기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 OSV
핵무기는 결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생명을 단숨에 학살하고, 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는 몇십 년을 두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하여 고문하고 괴롭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의 화신은 일찍이 없었다.
이러한 최악의 독극물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과 결정에 관여한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할지,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신들이 탄생시킨 역사상 최악의 작품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모든 유산에 비극적 종말을 초래할 거대한 마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마물은 어떤 핑계를 대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의 자식이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한때 냉전의 주체들이 핵무기 감축에 동의하고 함께 핵탄두 해체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오늘도 여전히 1만7000여 개나 되는 마물이 지구 구석구석에 숨어 추악한 자태를 감추고 있다. 이 좁은 한반도 북반부에도 이미 상당수의 핵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고, 남쪽에도 핵무기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불러들이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광포한 괴물인지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악마의 자식들을 세상에서 쫓아내기 위해 우리의 모든 능력과 지혜와 힘을 다 모아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톨릭신문, 2024년 6월 2일,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를 집필해 주신 강우일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0 6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