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2일 (목)
(자)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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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우리 성인을 만나다25: 성 우세영 알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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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26 ㅣ No.2244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5. 성 우세영 알렉시오


성 우세영 , 16세에 등과했지만 관직 포기하고 일가 20여 명 전교

 

 

윤영선 작 ‘성 우세영 알렉시오’

 

출 생  1845년 황해북도 서흥군

순 교  1866년(21세) 새남터 / 군문효수

신 분  번역가, 동정

 

 

왜고개에 묻힌 북녘땅 출신 우세영 성인

 

6·25전쟁 기념일이 되면 분단된 한반도 현실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정해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위로하려는 교회의 배려일 것이다.

 

여전히 전쟁의 위협을 안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건강한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 복무를 한다. 복무 중인 신자 장병의 신앙을 돌보고, 군 복음화를 담당하는 곳이 군종교구다. 군종교구청과 주교좌 국군중앙성당은 서울 용산 왜고개 언덕에 있다. 공교롭게도 왜고개는 8분의 성인을 포함해 10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성지다. 황해도 출신 순교자 우세영 알렉시오도 그중 한 분이다. 한반도의 아픈 현실 때문에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땅 출신이라 왜고개의 성인 알렉시오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잠시 배교했다가 마음 고쳐먹고 순교

 

총명한 양반집 자제였던 알렉시오는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성교의 진리를 전해 듣고는 벼슬 대신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열망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의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워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동정을 결심한 우세영은 집을 떠나 정의배의 집에 머물며 매일 같이 묵상과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가족의 개종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던 알렉시오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자신을 반대하던 형과 아버지, 일가 친척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스무 명 넘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기적은 순교가 아닐까 한다. 1866년 초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 알렉시오는 잠시의 배교로 풀려났다. 하지만 이내 뉘우쳐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 신자임을 밝히고 다시 체포되었다.

 

혹독한 형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천국 본향에 대한 열망이 더욱 크고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육신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왜고개에 묻혔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의 고향을 찾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와 우리는 분쟁도 전쟁도 없는 영원한 천국 본향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성인이시여, 이 땅에 평화를 되찾아주소서”

 

성인을 만나기 위해 성인이 33년간 묻혀 계셨던 왜고개 성지를 방문했다. 이곳은 조선 시대부터 기와를 만들던 곳이었으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중림동약현성당·주교좌 명동대성당을 지을 때 성인들의 피와 살이 섞인 이곳의 흙을 사용하여 붉은 벽돌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거룩한 땅이다.

 

교중 미사가 시작되기 전 성당 뒤쪽 마당을 둘러보며 이 땅에 묻히셨던 열 분의 순교자비 앞에서 묵상하고 기도했다. 미사에는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특히 입교식을 하는 예비자들을 축복하는 기쁜 날이었다.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도 함께 자리하시어 두 손을 가슴에 고이 모으신 채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계신 듯 느껴졌다.

 

“성인이시여, 이 땅에 평화를 되찾아주시고 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의 영육 간의 건강을 보호해 주시고, 많은 젊은이가 주님의 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23일, 윤영선 비비안나(강동대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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