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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8: 명당에 집착하는 건 후손의 현세적 욕심일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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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와 이웃 종교 (8) 명당에 집착하는 건 후손의 현세적 욕심일 뿐
‘환생’은 정말 있습니까?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진다.”(히브 9,27)
영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환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죽음을 생물학적 단절을 넘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뉴에이지(New Age)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 안에 신적인 것이 내재한다는 입장이나 만물 안에 신성이 내재해있다는 범신론의 경향을 띠는데, 그리스도교는 예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단호히 거부해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환생론은 불교의 윤회 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불교의 윤회는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고통의 수레바퀴 같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현대의 환생론은 오히려 끝없는 삶의 순환을 고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환생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뿐인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선사받아 세상에 태어나고 죽음으로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 도달하는 여정을 걸어갑니다.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한 이들을 위하여 ‘패자 부활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논리로 환생을 정당화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 악과 모순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은 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위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조상을 잘못 모시면 벌을 받거나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까?
“넘치는 사랑을 베풀고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며 결백과 진실의 모범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의 근거가 되는 ‘대속’의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넘치는 사랑은 우리를 모두 구원해줍니다.”(「강생의 신비」 10항)
돌아가신 조상을 잘 섬기면 자손들이 큰 복을 얻고, 잘못 섬기면 화를 입는다는 생각이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섬기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처럼 하라”(事死如事生)는 유교의 효가 보은 사상과 연결되어 우리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최근에는 그릇된 ‘가계 치유’ 신심이 퍼지고 있습니다. 집안에 큰 죄를 짓거나 한을 품고 죽은 조상이 있으면 자손들의 안녕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위하여 많은 예물과 기도를 봉헌해야 한다는 가계 치유 신심은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 사상을 그리스도교적 틀로 왜곡한 결과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가계 치유 신심을 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모든 이가 하느님의 품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이의 영혼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모든 성인의 전구와 그리스도교 전체 공동체의 기도를 통하여 필요한 도움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묘소를 어디에 써야 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당신 은총의 자녀를 바쳐 드리고,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날 육체의 씨앗을, 희망을 가지고 땅에 묻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83항)
겨울에 찬바람[風]을 막고 농사에 필요한 물[水]을 얻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땅을 살피는(地理) 일이 풍수지리입니다.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발전한 풍수지리설은 자연환경을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결시키며 지리 조건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합니다. 살기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살아있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터인 양택(陽宅)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매장하는 묏자리인 음택(陰宅)과도 관련됩니다.
우리 민족 안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풍수지리가 유교의 효사상과 만나면서 돌아가신 조상을 편안한 자리에 모시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민간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좋은 묏자리를 확보하려고 가문 사이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명당에 대한 집착이 컸습니다.
조상의 묏자리를 중시하는 태도는 조상을 편안한 곳에 모시려는 효성에서 비롯된 우리 고유의 종교적 심성입니다. 그렇지만 후손의 길흉화복 때문에 명당에 집착하는 자세는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의 본뜻을 흐리고, 후손의 현세적 욕심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30일] 0 3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