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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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어떤, 교회: 죄인들의 피난처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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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7-14 ㅣ No.838

[어떤, 교회] 죄인들의 피난처인 교회

 

 

신학생 시절, 신학교라는 공간이 참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정해진 틀 안에서 교회에서 제시하는 정확한 답을 답습하는 그 생활이 숨을 막게 하는 느낌이었죠. 저는 진실을 좇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시절 학교 안에는 ‘진실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게 진실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신학교에서는 정답을 말할 수밖에, 정답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겠죠.

 

그때 제 삶에 숨골이 되어 주었던 건 몇몇의 선생님과 마음으로 따르던 형들, 그리고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특히 몇 년간 영성면담을 맡아 주셨던 선생님은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함을 아는 분이었고, 가끔 그분의 선한 마음 앞에 무너져 버리곤 했습니다. 또 신학이 정답을 말하고 단죄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섬세히 성찰하면서 정해진 답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임을 알려 준 선생님도 있었기에 저는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함께 고민하면서 공부하며 좋은 책과 영화를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활동을 다니고, 학교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궂은일에 온몸을 던지며 일하는 친구들과 형, 동생들 덕분에 저는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걸어가고 있지요.

 

한번은 영성담당 선생님 방에 모여 선생님과 친구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는 죄인들의 피난처니까 망가진 자들은 다 모이면 된다.” 선생님은 그러면서 시집을 한 권 보여 주셨죠. 그 시집의 이름이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였습니다. 그 시집을 사서 읽었는데, 한 페이지에 시인이 이렇게 써 놨습니다.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 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아름다운 꽃들이고 늘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 받고, 때로는 관계에 치이는 게 싫어 혼자 남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죠. 사회가 정한 법을 어기는 범죄뿐만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향한 태도와 마음의 거리로 생기는 문제들로 인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 

 

지금의 교회가 꼴을 갖추게 된 건 바오로 사도의 역할이 컸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사이, 열정으로는 박해자, 율법에 관한 엄격한 규율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 바오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죄인임을 명확히 인식합니다. 그 후 바오로가 개척한 교회에는 자유인뿐만 아니라 노예들도 있었고 남자와 여자, 성인과 아이, 유다인과 이방인 등 여러 사람들이 구성되어 있었죠. 당연히 바오로에게는 정치 사회적 법규와 문화 속에 녹아있던 신분적 차별을 넘어 어떻게 형제애 속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통합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유를 본성의 차원으로 소급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로 봤고(로마 5,15-16) 인간의 영혼 깊이 침잠할수록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끈질기게 따라붙어 있는 죄의 굴레를 발견했죠.(로마 7,14-25)

 

죄인들이 모인 그곳에 바오로는 죄와 은총에 대한 가르침, 율법에 관한 해석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끊임없이 알려주며 교회가 하나의 몸이 되기를 바랐지요. 그런 공동체 안에 모인 사람들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겁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나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오고 가는 이야기 안에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을 느끼며, 비로소 그의 삶과 행위를 신앙 안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을 때 교회는 하나가 되었을 겁니다. 쌓여가는 이해 속에서 마음 한구석이 아파오며 삶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불현듯 곱씹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스승님을 찾았습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나약한 면도 많고 무언가에 기대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냐며 서로를 좀 더 이해해 보자고 다독이며 교회는 돈독해졌지요.

 

지금의 교회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삶의 어떤 부분은 우리가 만들어 가지만, 삶의 어떤 부분은 주어지기에 주어진 삶이 빚어내는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교회, 건강한 사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부서진 죄인들이 와서 위로를 받고 본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회, 저는 그런 교회,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또 오늘을 살아갑니다.

 

[월간 빛, 2024년 7월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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