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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9-10: 파리 외방 전교회 임경명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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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9) 파리 외방 전교회 임경명 신부 (상) 산업화 시대 소외된 노동자들의 '기댈 언덕'으로 함께하다
임경명 신부(Emmanuel Kermoal·파리 외방 전교회)는 고향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된 ‘노동’에 대한 관심과 경험을 간직한 채 1974년 한국으로 왔다. 이 젊은 선교사는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열악한 환경과 차별 속에서도 땀 흘리며 경제를 일구던 1970~198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을 목격했다. 단순한 사목이 아닌 노동자들과 ‘동반’하고자 왔다는 임경명 신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선교사 그리고 ‘노동’에 빠지다
“초등학생 때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이 베트남에서 사목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게 들려 선교사 성소가 자라나기 시작했지요.”
파리 외방 전교회의 한 신부가 들려준 베트남과 아시아 이야기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사제가 되고 싶었다는 임경명 신부. 그 뒤로 “너는 커서 뭘 하고 싶니?”라는 어른들의 질문에 “사제, 선교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임 신부는 12살 때 집을 떠나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생이 된 임 신부는 당시 프랑스 법률대로 군 복무까지 마쳤다. 하지만 신학교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뜬금없게도 철강공장에 들어갔다. 임 신부는 “군 복무 외에는 교회, 학교의 울타리 안에만 있다 보니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숙사까지 딸린 큰 철강공장에서 1년간 지내며 청년 노동자들과 부대꼈다. 임 신부는 공장에서 사회 경험은 물론이고 젊은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전했다.
“1년간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노동자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며 살았어요.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돈은 어떻게 벌고 또 결혼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많이 배웠습니다. 신학교보다 더 많이 배웠지요.”
공장 생활을 마치고 신학교로 돌아가 양성과정을 마쳤다. 1973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군 복무 후 철강공장에서 얻은 남다른 경험은 임 신부가 한국에 선교와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
- 어린시절의 임경명 신부(왼쪽). 임경명 신부는 어린 시절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의 선교 이야기에 빠져 사제 성소를 키웠다. 임경명 신부 제공
한국 노동 사목에 뛰어들다
임경명 신부의 한국행은 사실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장상이 결정한 선교지에 순명해야 했다. 다행히 임 신부는 아시아 선교에 이미 관심이 있었다. “남아메리카는 현지인 중 이미 신자가 많아 제대로 된 선교를 하려면 아시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임 신부는 “그래서 아시아에 파견 나간다는 것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렇게 한국에 온 임 신부는 한국어를 배우는 와중에도 JOC(가톨릭노동청년회) 모임에 나가거나 당시 JOC를 담당했던 고(故) 도요안 신부(John. F. Trisolini)를 따라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에도 자주 참례하곤 했다. 얼마 뒤 전교회는 임 신부와 동료 신부를 안동교구로 파견하려 했지만, 임 신부는 노동자들이 많은 서울에 있길 바랐다. 서울에 젊은 노동자들이 마구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1985년부터 서울대교구 북부 JOC 사목을 맡았다.
교회가 하는 역할은 노동자들과 ‘함께 있기’였다. 임 신부는 “노동 사목의 주인은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도 신부라는 말 대신 동반 신부, 동반자라는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모일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스스로 역할을 찾도록 이끌었다. 또 노동자에게 보장된 권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왔다.
- 7월 16일 서울 성북구 파리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에서 임경명 신부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박원희 기자
노동자들은 대여섯 명씩 모임을 하며 각자 일상과 직장생활, 가정생활에서 있었던 일과 느낌을 나눴다. 모임에는 비신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임 신부는 “노동 사목을 하려면 그들과 함께하며 ‘깊이’ 만나야 하기에 4~5년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말 그대로 노동 사목에 깊숙이 뛰어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노동자에 대한 편견은 교회 내에도 만연했다. 본당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임 신부는 “JOC 미사가 봉헌된 성당의 주임 신부가 나에게 ‘JOC 소속된 사람들은 다 깡패다.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제가 그 신부님께 JOC 회원들 이름은 아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지 못하셨죠. 노동자들도 하느님 백성이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 사목에 뛰어들었고, 그들을 더 많이 만나 더 일하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WDT3Efhas-g?si=8NiaSvKFQQk5pvlO
-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한 임경명 신부. 임경명 신부 제공
일하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이들을 위해, ‘산재사목’
임 신부는 1998년 한국 선교를 잠시 멈추고 전교회 참사로서 파리 본부로 돌아갔다. 임 신부는 본부 생활 내내 “여기 일을 끝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지”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에겐 노동자 문제가 시급하고 중요하게 느껴졌다.
2004년 한국으로 돌아온 임 신부는 산업 재해로 힘들어하던 노동자들과 광부 생활로 병을 얻은 진폐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산재사목’에 뛰어들었다. 임 신부는 “팀을 만들어 산재·진폐환자들을 방문하며 환자들이 노동조합 같은 단체와 함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일명 ‘진폐법’ 개정을 요구하러 국회의원 사무실에 찾아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진폐법’은 법률이 정한 합병증이 없으면 치료를 받지 못하고 휴업급여 등을 받을 수 없는 등 생활 대책이 규정에 없어 문제가 있었다. 임 신부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함께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들에게 신앙을 전하러 왔다는 말 대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시위에도 참여했다. 그 결과 ‘진폐법’은 개정됐다.
임 신부는 “노동자는 자신을 어느 기업의 사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나는 노동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현실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이 무엇인지, 어떤 권리와 역할이 있는지 등을 확고하게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임 신부가 오랜 시간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노동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 덕분이었다.
“노동 사목을 하려면 당연히 그들을 사랑해야 하죠. 그래야 관심이 생기고 노동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는지 알게 됩니다. 노동자들도 하느님 사업에 참여하는 자녀들이기에 인정하고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 노동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톨릭신문, 2024년 8월 18일, 이형준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10) 파리 외방 전교회 임경명 신부 (하) 악취 그득한 '쓰레기 산'이라도 가난한 이들 만나기 위해서라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서울 마포구 난지도. 임경명 신부(Emmanuel Kermoal·파리 외방 전교회)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어 망설임 없이 난지도와 그 바로 옆 동네인 수색 플라스틱 공장까지 노동자들을 찾아 함께한다. 난지도와 수색, 그리고 1974년 첫발을 내디딘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임 신부의 감회를 살펴본다.
- 임경명 신부는 “같이 관계를 맺고 함께 한다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박원희 기자
지옥 한가운데 있던 천국 마을
1993년 1월, 임경명 신부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추천으로 난지도에 있는 마을을 찾아갔다. 난지도는 여의도처럼 한강 속의 섬이다. 난지도에는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쓰레기가 매립됐다. 난지도는 달동네 재개발이 한창이던 그 시절, 길거리로 쫓겨난 세입자들 700여 명이 판잣집 마을을 이루고 살던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폐기물을 분리하거나 재활용품을 수거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12시간을 난지도 현장에서 쓰레기 분리 작업을 했어요.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텔레비전이 모두 철이라서 분리해 팔기 위해서였죠. 일이 아주 힘들었어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데다 악취까지 심했던 난지도 쓰레기 더미에서의 노동이 지옥 같았다고 회상한 임 신부는 “하지만 난지도 마을 사람들은 하늘나라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임 신부는 난지도에서 폐기물 분리 작업을 2년 하고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이 94년 문을 닫자, 난지도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함께 바로 옆 수색의 플라스틱 재활용 공장으로 가 3년 일했다. 그가 난지도와 수색으로 향한 건 그곳이 가난한 사람이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것, 그뿐이었다.
“어떤 일을 하든 항상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돼요. 예수님께서도 다른 이의 이웃이 되라고 하셨잖아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이 되는 거죠.”
- 1993년~1994년 난지도에서 폐기물 분리 작업 중인 임경명 신부
쓰레기 더미 안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다
“처음에는 낯선, 게다가 외국인인 나에게 왜 왔냐고 묻던 사람들이 6개월 후엔 나를 ‘우리 신부님’이라고 불렀어요.”
난지도에 처음 갔을 땐 임 신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어떠한 종교인도 찾지 않았던 난지도, 그곳에 가톨릭 신부는 찾아왔다며 다른 종교를 가졌던 그들과 임 신부는 이내 친구가 됐다.
한번은 난지도를 찾은 수리 기사 중 한 명이 “나는 밤 11시까지 일하느라 고해성사를 볼 수 없었는데 이곳에 신부님이 계시다니 고해성사를 보고 싶다”고 말했고, 이에 임 신부는 폐냉장고 뒤에서 무릎 꿇은 기사에게 고해성사를 주기도 했다. 그는 이내 신자인 친구 10명을 데려와 임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도왔다고.
임 신부가 난지도와 수색에 갈 땐 별도의 상부 허락 없이 갔다. 그런데 고(故) 김수환 추기경(스테파노·1922~2009)은 임 신부의 소임을 후에 알게 된 뒤 그를 서울대교구청으로 불러 다른 신부들에게 직접 난지도에서의 사목을 소개했다. 혹시라도 있을 반대 여론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게 제 소임을 당신이 인정했음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시는 추기경님의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 노동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임경명 신부. 임 신부는 오랜 시간 노동자들과 동반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 임경명 신부 제공
삭막한 첫인상과 달리 사람 냄새나는 한국
임 신부는 1974년 29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다. 가뜩이나 남북으로 나뉜 나라인데다 박정희 군사독재까지 더해져 사회 분위기는 더욱 냉랭했다.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이 있은 보름 후에 입국한 그의 눈에는 군인으로 가득한 공항의 삭막하고 경직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금으로 이동의 자유까지 빼앗겼던 기억도 난다.
사회 분위기와 달리 일반 서민들은 소박하고 정이 넘쳤다. 그는 한국 사람이 얼마나 착한지 알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임 신부는 “부인이 신자인 신혼부부의 한옥집에 얹혀산 적이 있었는데, 밥상에 늘 김치찌개, 미역국 등을 푸짐하게 차려주곤 했죠”라고 전했다. 이어서 “그 뒤 프랑스 문화관에서 만난 이화여대생이 자기 집에 빈방이 있다며 공짜로 하숙을 해줬어요. 아침마다 부처상에 절을 100번 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도 말이죠”라며 덕분에 한국인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상명하복이 강조된 군사정권 시대를 경험한 임 신부는 “우리는 모두 같은 형제자매들이자 평등한 공동체”라고 말했다. 아울러 “책임자는 윗사람이 아니에요. 동반자로서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해요”라고 당부한 그는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눈 예수님을 닮자고 전했다.
“예수님은 특히 죄인들을 만날 때 관계를 만드셨어요. 관계가 없으면, 사랑 없으면 우리는 못 살아요. 사랑을 안 받으면 죽듯이 사랑을 안 주면 우리는 죽을 거예요. 같이 관계를 맺고 함께 한다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SnG47hlUnvA?si=aTcSo1Izq9BkSHyk
[가톨릭신문, 2024년 8월 25일, 박효주 기자] 0 5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