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노동자를 내 몸처럼 사랑한 선교사 박기홍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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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9-10 ㅣ No.1736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노동자를 내 몸처럼 사랑한 선교사 박기홍 몬시뇰

 

 

요셉 플라처(Josef Platzer 1932. 6. 12. - 2004. 1. 4.)

 

요셉 플라처는 오스트리아 라브의 성마르가리다 마을에서 작은 농장을 가진 부모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소신학교를 졸업했고 1956년 대신학교를 졸업하며, 그해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곧이어 아른펠스성당과 폰스도르프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사목했고, 코벤즈성당에서 1962년부터 4년간 주임신부로 사목했다. 그리고 1966년 9월 1일 한국에 처음 입국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다른 선교사와 교류하며 문화를 익혔다.

 

특히 대구에서 사목하고 있던 루돌프 신부의 도움을 받아, 마산교구가 1971년 그라츠교구와의 자매결연체결을 주선하는 큰 역할을 했다. 먼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 루돌프 크라네뷧터 신부는 요셉 플라처 신부에게 그라츠-섹카우교구를 연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 이름 박기홍, 드디어 마산교구로

 

요셉 플라처 신부는 박기홍이란 우리이름으로 노동자와 함께했다. 1973년 10월부터 대구 영남가톨릭노동교육원 지도신부로 일하다가 독일 해외원조재단 미세레올의 지원을 받아 1975년 6월 대구에 가톨릭근로자회관을 설립했다. 이어서 마산의 가톨릭여성회관 건립에 대한 오스트리아 지원이 있기까지 하 마리아 선생과 협력하여 크게 노력하였고, 마산교구로 옮겨 오게 되었다.

 

1975년 12월 8일 설립한 양덕동본당에 초대 주임신부로 박기홍 신부가 임명되어 12월 26일 부임했다. 아직 성당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1976년 3월 1일 개관된 가톨릭여성회관의 공간을 나누어 쓰며 본당 사목을 시작했다.

 

박기홍 신부는 가장 먼저 양덕동성당 건축이라는 큰 과제에 직면했다. 당시 남성동성당이 주교좌였으나 마산교구에서는 기왕 새로 짓는 양덕동성당이 주교좌본당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컸다. 그래서 요한 베버 주교에게 건축비 후원을 요청하였고, 그라츠교구의 지원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게 된다. 주교좌에 걸맞은 기품 있는 성당, 신심을 자아내게 하는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려고 밤낮없이 노력하며 장익 신부의 소개로 건축가 김수근을 만나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말이 서툰 박 신부는 기차로 마산과 서울을 29차례나 왕래하면서 정성과 땀을 쏟았다. 그리하여 양덕 들판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수정을 형상화한 고귀한 건축이 완공되었고, 1978년 11월 28일 양덕동성당 봉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 1978년 양덕동성당 봉헌미사

 

 

노동사제 박기홍

 

안주할 줄 모르는 박 신부는 힘들여 새로 건축한 성당을 뒤로하고, 1979년 5월 다시 대구로 가서 가톨릭근로자회관 관장에 부임했다. 대구·경북지역 노동자총연합회 고문직을 맡았고, 가톨릭노동장년회 지도신부로 활동했다. 진정으로 노동자와 함께 살기를 원한 ‘노동사제 박기홍’은 1984년 몬시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85년에는 그라츠교구의 지원으로 노동자가 많은 창원에 가톨릭사회교육회관을 건립하고 관장에 취임하여 마산교구 노동사목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박기홍 몬시뇰은 대구와 마산을 오가며 더 부족한 곳에서 자신의 몫을 채우려 했다. 더 필요로 하는 곳을 선택하여 1990년부터 다시 대구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1992년에는 대구광역시 명예시민증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대구대학교 산업복지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1996년에는 노사화합상을 수상하게 된다.

 

 

소탈하고 재치 있는 유머로

 

박기홍 신부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유머감각과 열린 마음으로 만나는 상대를 편안하고 유쾌하게 만들었다. 노동자와 일하면 노동자의 표정과 말을 하고, 삼겹살과 소주로 일치하여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외국인 신부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거나 노골적인 구걸을 한다 해도 기쁘게 기꺼이 맞아들였다. 곁에서 누가 성가신 그들을 제지하려 하면 “저는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몸을 낮추며 누구라도 만나고, 사람을 품위 있게 대접했다.

 

본당 신자들과도 일치하여 열정적으로 사목했다. JOC(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였고, 노동자를 위해 뛰어다녔다. 낡은 옷과 구두의 파란 눈 사제는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으며 친근했다.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양덕동성당을 오가며, 이후 창원의 가톨릭사회교육회관에서도 소탈한 박기홍 신부를 만난 사람들은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마음에 행복 한가득 깃들이게 되었다.

 

- 1996년 그라츠에서



- 박기홍 몬시뇰 묘소참배

 

 

다시 그라츠교구에서 사목

 

마산과 대구에서 노동사제로서의 몫을 다했던 박기홍 요셉 플라처 몬시뇰은 1996년 12월 그라츠교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98년 1월부터는 성 라데군드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게 되었다. 그라츠에서 유학하여 2000년 6월에 사제서품을 받은 우리 교구 박철현 미카엘 신부는 따뜻한 박기홍 몬시뇰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했다. 특히 성 라데군드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던 기쁨과 고마움을 잊지 못한단다.

 

박 몬시뇰은 2004년 1월 4일 선종할 때까지 성 라데군드성당에서 사목하며 자매교구인 마산교구의 신학생이나 사제와 신자들의 교류에 힘을 쏟았다. 우리 이름 박기홍, 아름다운 사제는 선종하여 성 라데군드성당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참고: <그라츠-섹카우교구와 동행 50년> <양덕동성당 25년사> <가톨릭여성회관 27년사> 가톨릭근로자회관 자료 등 

 

[2024년 9월 8일(나해) 연중 제23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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