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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11-12: 성 베네딕도회 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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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11) 성 베네딕도회 진 토마스 신부 (상) 처음 마주한 한국...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이 애처로웠죠"
1962년 3월 10일, 29살 때 독일 함부르크에서 배를 타고 42일간의 고생 끝에 부산에 도착한 일을 ‘좋은 휴가’였다고 웃어넘긴 진 토마스 신부(토마스 모어·Joseph Wilhelm Timpte·91·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순분원). 진 신부는 한국에서 사제로, 교수로, 선교사로, 수도원 수련장으로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다. 올해 수도서원 70주년을 맞은 진 신부의 한국에서의 여정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 1963년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보좌 신부 시절 진 토마스 신부(오른쪽). 진 토마스 신부 제공
선교사 꿈꿨지만 한국행은 뜻밖
“꼭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선교사가 꿈이었지만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아 수도회에 들어와 양성 과정을 자연스레 받고 사제가 됐다는 진 신부. 1950년대 전 세계에 퍼져있던 공산주의의 심각성 때문에 그를 해결하기 위한 선교 열망이 커졌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파견됐습니다. 그냥 순명했죠.”
순명이 쉽지만은 않았다.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를 경험한 선배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조언해 주는 말은 언어를 배우기 어렵고 너무 춥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엔 파견지를 바꿔달라 얘기도 해봤지만 수도회 결정에 순명한 결과로 한국에 온 것을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성 베네딕도회의 기본 원칙인 ‘순명’을 하면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진 신부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으로 “너무 가난하고 비참해 보여서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학교와 병원을 제외하고는 전부 판잣집이었고,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 밖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초가집뿐이었다. 진 신부는 “한국이 가난하다고 말은 들었지만 직접 심각한 현실을 마주치자 너무 슬프고 불쌍했다”고 밝혔다. 이 애처로운 땅에서 진 신부는 몇 년 안 되는 본당 사목을 시작한다.
33세에 수도원 수련장이 되다
“오토바이 타고 전깃불도 없는 거리를 달리며 공소를 찾아다녔어요. 스릴 있었죠.”
많은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혹은 구호물자 때문에라도 세례를 받던 시절이었다. 경북 상주 서문동본당 주임으로 2년 있을 땐 신자 수가 2000명에서 2500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한국 이름도 지었다.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관련되도록 글월 ‘문’에 길 ‘도’를 써서 ‘문도’가 이름이 됐다. 원래 독일어 이름의 ‘진’을 성으로 써 한국 이름은 ‘진문도’가 됐지만 거의 병원이나 공공기관 등에서만 쓰고 평소에는 ‘진 토마스’로 불린다고.
- 1963년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보좌 신부 시절 진 토마스 신부(가운데)가 신자들과 나들이를 나가 함께 식사하고 있다. 진 토마스 신부 제공
본당에서 잘 지내던 진 신부는 갑작스레 왜관수도원 수련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아빠스가 35세에 수련장이 될 수 있다는 교회법을 따르지 않고 로마에서 관면을 받으면서까지 33세인 저를 수련장으로 발령했어요. 너무했다고 생각했죠.”
한국 생활 4년 차. 한국말은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지만 지난 29년을 보냈던 독일 문화가 더 익숙할 때였다. 뜻하지 않은 수련장 발령에 놀랍고 걱정됐지만 진 신부는 다시 순명했다.
“독일인들과 많이 다른 한국인들을 수련시키기 너무 힘들었다”고 그때를 회상한 진 신부는 수련장을 세 차례나 역임하며 15년 동안 현재 왜관수도원장인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를 비롯한 100여 명의 수도자 양성에 힘썼다.
‘말씀’의 선교사
진 신부는 상주 가르멜 수녀원 언저리에 예쁜 공소를 하나 지은 적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성당을 짓거나 다른 사업을 하는 능력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은총을 받은 것은 ‘말씀’ 쪽이 아닐까 진 신부는 조심스레 추측했다.
- 2020년 8월 16일 진 토마스 신부가 사제 수품 60주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저희 부모님과 이모, 고모 등 모두 학교 교사였어요. 그 유전이 어느 정도 있나 봐요.”
1965년 로마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진 신부는 30년간 왜관 가톨릭신학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신학원 원장도 역임했다. 영남지방 수녀들은 거의 자신을 안다고. 뿐만 아니라 피정 지도나 외부 강의도 많이 나간다. 진 신부는 “작년엔 두 번 정도밖에 피정 지도를 못 나갔지만 그 전엔 못해도 다섯 번은 나갔다”고 말했다.
말씀으로 무장한 선교사로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 싶지만 선교가 어려운 나라들이 있다. 파키스탄, 북한 등은 신자가 되려면 이민을 가야 할 정도이고 베트남과 중국도 박해가 어느 정도는 남아있다. 한국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 진 신부는 “6·25전쟁 때 한국 사제들이 많이 사살당해서 그 수가 독일 사제들보다 적었다”며 “지금은 많아진 한국 사제가 독일에 가는 것도 교회의 보편성 안에서 서로 새로운 자극을 주고받는 데 좋은 것 같다”고 선교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RgZX51b4fKs?si=4GPOWeOL5b0DRjIA
[가톨릭신문, 2024년 9월 15일, 박효주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12) 성 베네딕도회 진 토마스 신부 (하) "진정 하느님 사랑을 원하신다면... 기도하십시오"
진 토마스 신부(토마스 모어·Joseph Wilhelm Timpte·91·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순분원)는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을 중요치 않게 여겼다. 양성 과정에 몸을 맡기니 자연스레 받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자신을 수도자, 수도승으로 자처한다. 이런 진 신부가 수도자로서 한국 땅에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알아본다.
- 기도하는 진 토마스 신부. 진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탁 기자
수도 영성 잡지 「코이노니아」 편집장을 지내다
진 토마스 신부는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에서 매년 발행하는 수도승 생활·영성 전문잡지 「코이노니아」 편집장으로 오랜 기간 지냈다. 1977년부터 발행된 「코이노니아」를 시작한 것도 그다. 진 신부는 “이런 성격의 잡지가 교회에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작했고, 이후 여러 수도자와 논의를 거쳐 사람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수도 영성을 담고자 했다”고 전했다.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영성적 내용이 담긴 외국 원고의 의미가 온전히 담기도록 한국어로 번역했다. 「코이노니아」는 지금도 영성, 특히 수도 영성에 관심 있는 이들의 ‘영적 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를 제외하곤 수도 영성을 다루는 잡지는 지금도 생소하다.
최근엔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 번역본이 코이노니아에 실렸다. 지금은 편집장이 아니지만, 이 담화집 출판을 위한 번역 등 과정엔 진 신부가 깊게 참여했다. 그런데 정작 출판 시기에 독일에 가 있는 바람에 출판된 줄도 몰랐다며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왜관수도원에서 판매 중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만든 책인데 제가 구매해 봤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터라 너무 기쁘더라고요.”
- 진 토마스 신부(가운데)가 금경축 축하식 후 축하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진 토마스 신부 제공
종교 간 대화 주도, “타 종교에서도 배울 점 충분해”
진 신부는 종교 간 대화, 특히 불교와의 교류에 진심이었다. 교회가 타 종교와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진 신부의 노력을 그의 단순한 취미 중 하나로 여기는 이도 있었다. 성 베네딕도회가 정식으로 불교와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 주제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는 게 알려졌다.
진 신부는 “교회도 최근 계속해서 종교 간 대화를 권고하고 있듯이 타 종교와의 진심 어린 소통은 세상 평화에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면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하나의 종교를 뛰어넘은, 초교파적인 수도승(monk)의 면면이 모든 종교에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사실 우리 수도회 생활 양식도 이 ‘수도승’과 비슷한 면이 있어 적절한 단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진 신부는 불교 스님들을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서로 간 왕래도 잦았다. 해인사 스님들이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방문하기도 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고(故) 성철 스님과도 인연이 있다. 해외 행사로 성철 스님과 함께 지내며 얻은 화두(話頭)를 바탕으로 절에서 며칠간 묵상했다. 진 신부는 이에 더해 3000배와 관련한 일화도 전했다.
“성철 스님은 본인을 만나려는 이에게 부처님 앞에서 3000배를 먼저 하도록 했는데, 그러다 보니 스님을 만난 저도 3000배를 했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죠. 하지만 성철 스님은 다른 종교 성직자에게까지 3000배를 요구하지는 않으셨어요.”
- 진 토마스 신부가 한국의 한 절에 방문한 모습. 진 신부는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와의 대화는 서로에게 영적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진 토마스 신부 제공
한국인은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라
21세기 한국은 진 신부가 처음 발을 디딘 1960년대 모습과 거리가 멀다. 그 후 62년간 한국에서 생활한 진 신부도 “경제가 비교도 안 되게 발전한 데다 외적인 생활의 변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세계 경제 강국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면의 어두움도 명확히 짚었다. 진 신부는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나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라는 점은 외적인 발달이 과연 큰 의미가 있는지 반문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진 신부는 “한국인은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아직 모르고 눈앞의 욕구만 따른다”며 “진짜 행복에 대해선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치신다”고 말했다.
“부유함, 쾌락, 권력 등. 하느님께서 만든 인간인데 왜 이렇게 위험한 욕심이 많은지, 진정한 행복을 모르는지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요청하는 것이 기도
한국에서 사제 생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화순분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진 신부는 “그저 하느님께서 날 불러가실 날을 기다린다”며 웃어 보였다. 요즘은 손님을 맞으며 인사드리고 대화하고, 강론하는 데 힘 쏟는다고 한다.
그럼 선교사이자 60여 년간 사목한 원로 사제에게 기도란 무엇일까. 진 신부는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건 계명을 지키는 것을 넘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솟아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모든 일이 쉬워진다고 진 신부는 확신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도 교리를 잘 아는지, 지도력이 있는지 묻지 않으셨죠.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가톨릭신문, 2024년 9월 29일, 이형준 기자] 0 2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