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1일 (토)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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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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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9-18 ㅣ No.1172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어린 나귀(donkey)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까닭은

 

 

열왕기 상권 1장 32절에는 다윗 임금이 솔로몬에게 자신의 노새(mule)를 타라고 하면서 후계자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 19장 30절에는 예수님께서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donkey, colt)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를 끌고 오자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어린 나귀에 덮고 예수님께서 그 위로 올라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 21장에는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마르코 복음 11장 1-10절에는 어린 나귀를 데리고 와서 제자들이 겉옷을 덮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옷을 땅에다 까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복음서기자마다 디테일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이 부분이 열왕기에 나오는 노새 타는 왕의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설명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왜 하필이면 말이 아니고 나귀나 노새일까요. 또 재미있는 것은 솔로몬 임금은 노새를 탔는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우선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말보다는 노새와 나귀가 더 좋은 운송 수단이자 노동력이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귀건 노새건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노새나 나귀는 야생말보다 체구는 좀 작지만 훨씬 더 힘이 세고, 주인의 말도 잘 복종하고, 꾀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가성비가 좋은 가축입니다. 반대로 말은 전쟁을 하거나 마차를 끄는데 제격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가까운 곳을 가는 데에는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귀는 노새를 낳을 수 있지만 노새는 더 이상 새끼를 낳지 않아 대가 끊깁니다. 그럼에도 나귀와 노새는 둘 다 현대사회에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까지는 일종의 훌륭한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었고, 또 말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지혜롭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멋지게 기사나 군인들을 태우고 달리는 말과는 달리 큰 짐을 지고 가다 힘이 들어 움직이지 못해 채찍질을 당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말도 아니고, 노새도 아닌 어린 나귀를 마을에서 끌고 오라고 했는지 혹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솔로몬 임금 이후로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고 그 이후 영성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계속 박해와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왕국은 붕괴나 쇠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상징이 혹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아직 크지 않아 짐 싣는 것도 버거울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 해서 타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의 죄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대신 지고, 거기에 더하여 채찍질을 당한 후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라는 예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한편 부처님을 낳은 마야부인은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부처님을 낳았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힌두교에서 가네샤, 즉 신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귀족이나 왕가의 귀한사람들이 타는 영험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힌두 신화에는 인연 업(karma)으로 인해 가네샤가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일화도 있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읜 부처님과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보다 먼저 하느님께 가신 예수님의 탈 것조차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나귀와 노새의 상징을 우리 자신의 심리에 적용해 보면, 대부분 여러 가지 노동에 시달리며 일상을 살아 내고 참아 내야 하는 시기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공부를 했을까,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을까. 내가 이러려고 서울로 왔을까,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고된 노동과 희생의 시간은 마치 자신이 채찍질 당하며 견디는 나귀나 노새처럼 생각됩니다. 정말 형장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몹시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가 누구든 인생에는 한 번 이상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에 있는 약하고 불안한 인류를 위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은 아닌지 상상해 봅니다.

 

특히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준비하시면서 앞으로 어린 나귀 보다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주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도 다 깊이 사랑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창세기에 인간을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관장하는 존재로 신이 창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리스도인 중에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마치 주종 관계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짐승이나 식물을 독단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대하면서도 마치 하느님께 허락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식물과 동물을 다양하게 비유의 소재로 쓰고 계시지만, 행간에서 따뜻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리셨을 때도 있었지만, 입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들풀과 꽃보다 못한 존재라고 우리를 나무라시기도 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귀를 타는 모습을 보이신 것도, 그 이면에 많은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유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나귀보다 더 고통스런 채찍을 맞으며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모습, 모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한없이 몸을 낮추고 묵묵히 견뎌내셨던 모습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나귀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등을 내어 드릴 수는 없을까요. 서로에게 의존적인 인간은 사랑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 나귀보다 오히려 더 약한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월간 빛, 2024년 9월호,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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