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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금쪽같은 내 신앙70: 사람은 현존으로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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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70) 사람은 현존으로 산다 예수님 현존이 주는 용기와 희망
‘현존(現存)’이란 말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평소에 늘 하는 경험일 것이다. 누군가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함께 있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곁에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면 진정한 현존이 아닐 것이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늘 향하고 있다면, 그 또한 현존일 것이다.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신자들께 고백한 적이 있다. “저는 고국을 떠나있었지만, 여러분, 한국 신자들을 잊은 적이 단 한순간도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현존으로 산다는 것을. 아기가 우는 이유는 엄마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엄마의 현존을 목말라하고 있다는 표시가 아닐까.
큰 병에 걸렸을 때 실의에 빠지고 삶의 의욕을 잃는 경우가 많다. 치료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음에 조금씩 가까이 감을 느낄 때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그럴 때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은 누군가의 현존이 아닐까. 누군가 나의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힘이 되고 희망을 갖게 하며 오늘을 의미 있게 살게 한다.
얼마 전 방영된 다큐 ‘언니들은 못 말려’에서 벨기에에서 온 배현정 의사는 호스피스에 대해 “일생을 마무리하는 장소이지만 죽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 함께 잘 살아보기 위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돕는 일을 하는 것이 호스피스 사목이다.
필자도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모친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 경험이 있다. 보통 죽으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곳에서 어머니와 가족들이 함께 지내며,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냈음을 기억한다. 현존이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현존은 죽음을 넘어 서로를 연결시키는 힘이 있다. 삶을 기꺼이 내어놓는 현존은 서로를 살리고 희망을 꿈꾸게 한다.
예수님의 현존을 생각해본다. 그분은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 중에 있고 상처 입은 이들 곁에 계셨다. 그분의 현존은 다정다감한 말씀과 손길과 눈길을 건네시는 현존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셨다. 그렇다면 그 순간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을까? 고요한 침묵 중에 당신 아드님과 함께 계시지 않았을까?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작은아들이 가진 것을 탕진하고 돼지를 치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누군가의 현존이었다. 정신이 든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아들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오신다. 아버지는 한순간도 아들을 떠난 적이 없다. 늘 아들 곁에 현존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사랑의 현존이 아들을 돌아오게 하고, 아들을 살린 것이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이름은 현존이다. 우리 안에 늘 함께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병으로 고통받고 죽음 앞에 번민할 때 우리 안에 더 깊이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더 깊이 머무르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실 수 있다.
나는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는가? 나는 내 존재를 나누며 누군가와 함께 머물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우리 삶의 깊이를 더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0월 20일, 한민택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겸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0 38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