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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롬반 문서 탐구1: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골롬반외방선교회에 미친 영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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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09 ㅣ No.1755

[골롬반 문서 탐구 ·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골롬반외방선교회에 미친 영향 (1)


- 한국 선교 60년(1933~1993)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이번 호부터 9월호까지 연재될 성 골롬반외방선교회와 관련된 글들은 현재까지 그 전모가 공개되지 않은 「골롬반 문서」를 토대로 작성된다. 「골롬반 문서」는 총 27권의 파일 형태로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선교 관련 문서이다. 주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의 서한들(아일랜드 본부와의 교류 서신 포함), 문서들, 보고서들 등등을 망라하고 있다. - 필자 주

 

 

1933년 골롬반회 한국 선교 시작

 

1916년 아일랜드에서 무엇보다 먼저 광활한 땅 중국을 첫 선교지로 염두에 두고 창설된 성 골롬반외방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33년 10월이었다. 1933년까지 골롬반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었고, 아일랜드 달간(Dalgan)의 골롬반회 신학교에는 선교를 희망하는 수많은 신학생이 있었다. 1933년 6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한국의 전라남도 지역을 새로운 선교지로 맡아달라는 요청이 공식적으로 골롬반회에 전해졌을 때,1)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골롬반회의 첫째 그룹 10명2)은 1933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뒤 즉시 대구로 가 대구대목구장3)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골롬반회 신부들은 대구에 머물면서 6개월 동안 한국어 공부에 몰두했고, 이듬해인 1934년 봄에 전라남도로 향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선교 활동 방법과 목표는 본당 사목, 본당 설립, 현지인 사제 양성으로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또한 그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중국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이 세운 본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4) 이런 선교 방향은 무엇보다 당시의 교황청 지침과 관련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선교 신학5)

 

가령 가톨릭 선교에 관한 1926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레룸 에클레시애(Rerum Ecclesiae)」는 복음화를 수행할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교회의 질서와 구조를 세울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최초로 한국인 성직자의 자치 교구라 할 수 있는 전주지목구가 세워졌고,6) 광주지목구가 설정되면서 골롬반회 사제들이 전라남도 선교지를 관할하면서 기본적인 교회 질서를 세우는 활동에 집중했던 것은 이러한 회칙의 문맥 안에서였다. 그런데 그 당시 선교에서 무엇보다 강조된 것은 ‘영혼의 구원’이었다. 때로 선교 활동의 우선순위가 ‘영혼의 구원’이냐, 영혼 구원의 수단인 ‘교회 설립’이냐가 논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어떤 것이 ‘영혼 구원’보다 더 긴급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7)

 

하지만 골롬반회원들은 이 논쟁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수도회와는 다르게 그들은 한국에 영구적으로 그들의 회를 지속할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인 사제를 준비시키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 사이에 갈등은 없었다. 활동 면에서 그들의 직무는 교리교사들을 훈련하고, 소명 의식을 북돋우면서 본당을 설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라남도 지역에 “233만 2,000명의 인구 가운데서 오직 2,048명의 가톨릭 인구”가 있다고 들었을 때, 그들은 행복해했다. 얼마 안 되는 가톨릭 인구와 교회들이 있는, 그래서 그들이 가장 필요시되고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유형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하고 교리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신자들을 상담하고 성사를 집행하기 위해 우선 언어를 충분히 배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선교지 민족들의 문화나 종교적 전통들을 배우는 데 거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현지의 믿음들은 가톨릭과 관련 없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미신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8)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등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골롬반회원들은 한국에서 확장을 계속하였다. 1939년 4월 25일 강원도 지역이 춘천지목구로 분리되면서 골롬반회의 관할로 위임되었고, 1965년 3월 22일에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 · 설정되었다. 1954~1970년 사이에 광주대교구에는 21곳의 새 본당들이 설립되었다. 1969년 한국의 골롬반회원들은 총 150명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본당 사목을 하면서 광주 · 춘천 · 원주교구 설정에 도움을 주었다.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대부분의 관심을 새 회심자들을 모으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 두었다. 그러나 선교 신학에서의 주요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1970년대10)

 

1970년대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 또한 한국교회와 골롬반회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표명하는 새 방향에 적응하기를 추구함에 따라 쇄신의 시기가 되었다. 골롬반회원에게 중요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문서는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Ad Gentes)」,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였다.11 우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재천명하였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인류의 빛」 14항).12) 그러나 같은 문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한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인류의 빛」 16항).13) ‘그들 편에서 잘못 없이 하느님에 관한 분명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아이디어는 나중의 교회 문서에서 더 발전되었다.14)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이 한국 또는 어느 다른 곳에서 복음화에 어떤 즉각적이고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은 한편, 구원에 관한 그 새로운 이해는 선교 안에서 영혼 구원의 긴급함이라는 과업을 필연적으로 약화하는 결과를 빚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간다는 사명을 가치 있게 여겼던 선교사들은 이제, ‘사람들을 그들의 전통적 믿음 안에 놔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에 관한 공의회 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 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한다”(「우리 시대」 2항).15) 교회가 선교의 절박함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많은 이들이 선교 사도직을 떠나게 되었고, 선교회를 위한 많은 신학생이 급격하게 줄었다.16)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골롬반회와 같은 선교회에 준 중요한 암시의 두 번째 양상은 선교에 책임을 갖는 이들에 관한 관점이었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 6항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임무(선교 활동)는 온 교회의 기도와 협력으로 베드로의 후계자가 앞장서는 주교단이 수행하는 것이다.”17) 선교를 이끌고 협력함에 있어서 신앙 확장을 위해 교황청의 역할이 재천명되는 한편, 실제에서는 우선권을 취하는 지역 주교와 주교회의에 달려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공의회는 수도회의 사목에 특정 영토들을 위임하는 실천을 종결지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역 주교들과 성직자가 그 지역들을 인수하고, 수도회들은 이차적 역할로 물러선다는 것이었다. (골롬반회 같은) 특별한 선교 단체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하였지만, 골롬반회원들은 수도회 공동체 소속이 아니었던 한편, 이러한 변화가 뜻하는 바는 그들의 사목이 가능한 한 빨리 성직자의 책임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험으로 보아 선교 활동 자체도 혼자서는 수행할 수 없으므로, 공동 소명을 지닌 개인들이 단체를 이루어 거기에서 힘을 합쳐 적절히 양성되고 교회의 이름으로 교계 권위의 뜻에 따라 선교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만민에게」 27항).18) 이 단체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한편, 이 교령은 선교 단체들의 미래를 ‘형제적 협력’의 정신에서 그들의 ‘열정과 경험으로’ 새 교회들에 ‘봉사하는 것으로’ 바라보았다.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시 이행하기20)

 

한국에서 몇 년 동안은 공의회로 인한 큰 변화없이 골롬반회원들의 활동이 지속되었다. 교회 확장은 여전히 매우 빠르고 새 회심자의 수는 많았기에, 일어나고 있었던 변화에 대해 반영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즉각적인 관심 중에는 교회 쇄신, 전례에서 활기 되찾기, 라틴어 대신 현지 언어 사용하기, 교회를 ‘세상의 빛’으로 바라보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입장은 무시될 수 없었다. 그래서 6년마다 열리는 전 세계 골롬반회 대표 총회에서 그 공의회에 대한 주제가 토의되었다. 특별히 중요한 총회는 1970년과 1976년 총회였다. 1970년 총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새 지시들의 시행을 추구하였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광범위하게 제시되었고, 그것들이 암시하는 바가 토의되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가 어디에서 활동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볼 때, 골롬반회에 깊은 의미가 아니었던 공의회 문서는 거의 없었다. 골롬반회는 끊임없이 가톨릭교회의 이 새로운 자기 비전에 흡수되고 스스로 적용하기를 추구해야 함이 명백하였다. 이는 골롬반회뿐 아니라 당시 활동하던 세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었다.21)

 

1970년 총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상황에서 골롬반회원들의 임무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재촉했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 제안을 수용했다. 첫째, 골롬반회는 지역 교회가 독자 생존이 가능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우, 특히 그 자신의 사제들을 공급할 수 있는 경우, 모든 사목을 그들에게 맡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둘째, 골롬반회가 선호하는 고유의 활동 영역은 복음화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 또는 지역 교회가 매우 작고 약해서 외부 도움 없이는 팽창하거나 생존할 수 없는 이들 가운데 있다. 셋째, 골롬반회원들이 아직 그 지역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도, 그 지역 교회의 상황이 생존 가능한 쪽에 더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골롬반 회원들은 그곳에 들어가기를 주저할 것이다. 만약 골롬반회원들이 그 지역에 있다면, 회원들은 그곳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22)

 

골롬반회의 직무는 영혼을 구원하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함께 모아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총회를 통하여 골롬반회의 필요성은 재긍정될 수 있었다. 평신도 선교사와 관련해서 그 총회는 선교회가 선교 활동에 관해서 지나치게 성직자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물음을 던졌다. 그 결과 평신도 선교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교회에서 그들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선교회는 평신도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공감하며 그들을 북돋을 것을 추구해야 함을 인식했다. 그리고 학생들, 선교 영성, 공동체 구조, 소통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제시되었다.23)

 

 

1976년 총회24)

 

6년 후인 1976년 총회에서도 주제는 비슷했으나 더 자세하게 안건들을 다루었다. 골롬반회의 목적과 특성이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재언급되었다. 첫째 골롬반회원들이 속한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 안에서 복음 구현하기, 둘째 골롬반회원들이 일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억압받고 가난한 이들에게 온전한 그리스도의 자유를 가져다주기, 셋째 그리스도교인들과 비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대화 촉진하기, 넷째 지역 교회들 안에서 아이디어 · 프로그램 · 구성 인원들의 교환 촉진하기. 이런 것들은 문화화, 정의와 평화,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타종교들과의 대화, 선교 교육의 필요성, 사제 자원 봉사 프로그램, 평신도 선교 프로그램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에 대한 인식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한국 지역 상황에서도 이런 목표들을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문화화와 관련하여 많은 골롬반회원이 광주 전남대학교, 서울 연세대학교,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의 대학들에서 한국 문화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랭귀지 교습 시설이 개선되었고, 새 골롬반회원들은 적어도 언어 공부에 2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25)

 

1974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체포로 강원도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전 골롬반회원들이 한국의 인권 이슈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정의·평화 위원장이 임명되었다. 골롬반회원들은 서울 을지로에 있는 노동자들의 센터(JOC)에, 서울 왕십리에 있는 대학생 사도직에, 원주에 있는 대중 매체에, 그리고 병원 사제직, 교리교수학, 카운셀링, 사회적 프로젝트 등에 관여하게 되었다. 골롬반회원들은 이제 광주 · 춘천 · 원주뿐만 아니라 서울 · 인천 · 수원 · 안동 · 부산교구에도 머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는 한국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골롬반회원들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수의 한국에 있는 골롬반회원들이 다른 교구에 진출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한편, 본당이 아닌 새로운 사도직에 그들이 관여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한국 사회의 정책과 한국 상황에 대한 개별적 골롬반회원들의 반응이었다. 당시 골롬반회원들은 정의와 인권이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보다 덜 중요했던 사회에 희망을 주면서, 본당 확장이나 개인적 회개라는 목적보다는 교회를 진정한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을 돕는 자신들의 의무에 대한 자각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필요를 인식하고 그에 응하는 것이 개인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던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선교회 본부의 총회는 본당 밖의 보다 큰 이슈들에 대한 그런 관심을 격려하였다.26) (계속)

 

……………………………………………………………………………………

 

1) 오기백(Donal O’Keeffe, S.S.C.) 신부, 『한국 선교 60년』,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지부, 1993, 9쪽.

2) 맥폴린(O. McPolin, 林), 헨리(H. Henry, 玄海), 라이언(T. Ryan, 羅), 도슨(P. Dawson, 孫), 모나간(P. Monaghan, 牟), 스위니(J. Sweeney), 마리난(G. Marinan, 梅), 게라티(B. Geraghty, 池), 넬리건(T. Neligan, 干), 맥메나민(D. McMenamin, 明) 신부였다.

3) 당시 대구대목구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4) 「골롬반 문서」 17(Hugh MacMahon, The 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 : Its Mission and Future in Korea, 17-403~404, 서울, 1993).

5) 이 글은 위의 문서 17-404~406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6) 1937년 4월 13일 전주지목구로 설정되고 최양홍(崔洋洪, 스테파노) 신부가 지목구장이 되면서 한국인 성직자들이 사목과 운영을 관장하는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가 되었다.

7) 위의 문서 17-404.

8) 위의 문서 17-404.

9) 위의 문서 17-406.

10) 이 글은 위의 문서 17-406~408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11) 위의 문서 17-406.

12)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인류의 빛」, 제2장 하느님의 백성, 14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8(개정판).

13)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인류의 빛」, 제2장 하느님의 백성 1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8(개정판).

14) 「골롬반 문서」 17, 위의 책, 17-406~407.

15)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우리 시대」, 다른 종교 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8(개정판).

16) 「골롬반 문서」 17, 위의 책, 17-407.

17)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만민에게」, 제1장 교리 원칙, 선교 활동 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8(개정판).

18)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만민에게」, 제4장 선교사, 선교 단체 27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8(개정판).

19) 「골롬반 문서」 17, 위의 책, 17-407~408.

20) 이 글은 위의 문서 17-408~409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21) 위의 문서 17-408.

22) 위의 문서 17-409.

23) 위의 문서 17-409.

24) 이 글은 위의 문서 17-409~410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25) 위의 문서 17-409.

26) 위의 문서 17-410.

 

[교회와 역사, 2024년 6월호, 글 전경미 체칠리아(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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