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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성령의 종이 되어 성당장돌뱅이로 산 제옥례 루갈다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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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성령의 종이 되어 ‘성당장돌뱅이’로 산 제옥례 루갈다 선생
통영에서 제옥례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신앙뿐만 아니라 문학과 전통 음식에서도 통영 사회에서 관심을 오롯이 받았던 분이었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산문 글에서, 통영의 큰 어른을 뵈러 간다며 100세 넘긴 제옥례 선생을 옛집 뒷마루로 모시고 가서 큰절 올리고 싶다며 존경의 뜻을 표현하기도 했다.
소설처럼 얄궂은 운명 옥례
옥례는 1915년 6월 19일 통영서호동에서 2남3녀중 맏이로 출생했다. 조부는 서호 동갑부제기준으로 승지벼슬을 받아 ‘제승지’라 불렸다. 통영초등학교,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왔고, 18세 에 경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1937년 명동성당에서 훗날 대주교가 된 노기남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한때 수녀원에서 생활하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병약하여 수도자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자 고향 통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1943년 28세에 통영으로 온 루갈다는 그 당시 하동집이라 불리던 박부잣집 부인을 위해 함께 기도하던 중,그 부인이 죽음을 앞두고 8남매의 새어머니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오지랖 넓다 할수 있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마산교구와 대구대교구 산하의 성당을 다니며 수소문했 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이 없어 루갈다는 스스로 8남매 의 어머니가 되기로 했다.
소설 같은 삶의 주인공 30세 제옥례는 1945년 8남매를 두고 상처한 39세 박희영과 혼인하여 금슬좋게 살며,두 자녀를 더 낳아 10남매를 길렀다. 57세가 되던 1972년에 남편 박희영이 세상을 떠나 혼자서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통영군청 앞에서 간이식당을 운영했다. 10남매를 모두 출가시킨 그는 문학과 성령에 몰두하게 되었다.
마산교구 성령기도의 대모
제옥례 선생은 1977년 교구의 첫 성령세미나가 열릴 때 여러 사제들과 함께 참가 하였다.그는당시안수를받으면서 치유의 은사를 청했다. 한의원이었던 남편 생전에 조수 역할을 하느라고 병을 고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성령세미나에서 심한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진정된 후로 그렇게 아팠던 몸이 건강해졌다. 그렇다 보니 이듬해부터 성령세미나에 열성을 다해 참여했다. 교구에서 성령세미나가 열리면 강사로 초빙되는 일이 잦았고, 치유의 은사가 있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따지지 않고 달려갔다.
- 박정일 주교님과 함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를 신앙의 좌우명로 성령기도회에서 가르치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 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성령세미나를 받고 성령 안에서 새 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성령의 종’이 되어 살아온 세월이라고 그는 노래했다. 1991년에는 마산교구 설정25주 년을 맞아 로마교황청 십자훈장을 받았다. 그 영광의 시간에 감사했지만,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다.
통영 전통 음식을 전파하며
서호동 갑부로 일 년에 열한 번의 제사를 치르는 집에 서 자라.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만드는 집안 풍경에 익숙 했던 제옥례 선생은 음식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하동집이라 불리던 박부잣집에서의 혼인생활로 음식솜씨가 더해졌다. 배운 요리중 가장 익숙한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조선시대 통제사 음식이라고 했다. 이것은 조선시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도 수군을 총괄한 통제사에게 올리던 전통음식을 말한다. 통영음식은 한양에서 온 관리들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으며, 서울 궁중 음식과 닮아 있었다.
제옥례 선생은 잊혀져가는 통제사 음식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통영시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전통음식을 가르치고, 이 음식에 관한자료를 작성하는 데에도 몸을 던졌다. 선생은 통영뿐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제철 재료와 싱싱한 맛을 살리는 무공해 조리법을 알리며 복음을 전했다. 조선 관리들이 먹던 전통 음식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해 먹을 수 있고 생각보다 쉽다며 주부들을가르쳤다. 백세에 이르는 불편한 몸일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배우고, 배운 것을 모두 돌려주고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 가톨릭 마산교구 성령묵상회를 마치고(1976,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숨을 거둘 때까지
제옥례 루갈다 선생은 태평동본당(옛 충무본당)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대건성당 설립 당시는 성당건립추진위원회에서 역할을 맡아 애썼다. 다시 태평동본당에 돌아갔다가 행정구역에 따라 북신동본당 설립의 주역으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쉼자리를 찾아 미륵산 자락 12평 주공아파트에 자리하며 줄곧 대건본당 신자로 살았다.
이 고장에서 제일 오래된 신자이고 세 곳 성당에 옮겨 다니며 성모회를 만들었기에, 사람들은 흔히 그를 ‘성모회장’으로 불렀다. 그보다 더 리얼한 별명은 ‘성당장돌뱅이’라고 정흥식 신부가 붙여 주었는데,선생은 매우 흡족해했다. 다른 신자들에게는 좀 민망하지만 기어서라도 성당에 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숨을 거둘 때까지 주님을 붙들고 산 제옥례 루갈다. 선생의 주공아파트에 방문해 본 사람은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라며 선종기도를 바치는 그의 충심에 감화를 받았다.
이 지면에서 모두 나열할 수는 없지만, 문학의 도시 통영에서 한국문인협회 통영지부장, 한국문화예술단체 통영 지부장 등을 거치며 문학과 예술로도 복음을 선포했다. 여성복지에 대한 유공자로 대한민국 국민포장도 받았다. 가톨릭문인회를 매우 아꼈던 선생은 2015년 12월 10일 향년 101세에 이르러 선종했다. 곁에서 돕는 이에게 쌈짓돈으로 임마누엘 장학금과 교무금을 내도록 당부했다.
▶ 참고 : <마산교구40년사> 제옥례 저서, 마산교구 홈페이지 자료 등
[2025년 1월 12일(다해) 주님 세례 축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가톨릭문인회)] 0 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