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5일 (수)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가톨릭 교리

생활교리: 너에게 난 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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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1-14 ㅣ No.5277

[생활교리] ‘너에게 난 누구니?’

 

 

서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관계를 맺고 평생을 함께 동반해 나가기 위해서는 나를 향한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예수님께서는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과 삶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제자단의 맏이인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모범적인 답변을 하지만, 얼마 못 가 스승에 대한 그의 멋진 ‘고백’은 세 번의 ‘배반’으로 바뀌어버린다. 왜일까?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에 관한 깊은 물음과 성찰 그리고 의식 없이 마치 머릿속에 저장된 익숙한 조문을 외우듯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존재’, 곧 그분께서 약 2천 년 전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곧 “당신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신 나머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필리 2,6.7), 무엇보다 끔찍하고 치욕적인 십자가 죽음마저도 “스스로 원하신”(감사 기도 제2양식)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교황 베네딕토 16세)이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사도 4,12 참조)로 잘 알고 있다. 단,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 그리고 사명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은 이것이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나는’ 그분을 누구로 고백하고 있는가?

 

그분은 정말 ‘예수’(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처럼 구원, 곧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를 당겨서 건져낼 수(救援) 있는 분이신가? 그분은 정말 나에게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 성경에 약속된 모든 기대와 희망을 온전히 채워주시고 실현해 주시는 분이신가? 그분은 정말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요한 10,30 참조), 나를 하느님과의 사귐과 친교로 인도해 주시는 유일한 중개자이신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은 정말 온 세상의 주권을 지닌 ‘주님’으로서 내 삶의 기준이요 주인이신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례식 직전에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고백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베드로처럼 순식간에 바뀌고 달라질 수 있다. 곧 지금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그분께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도, 갑자기 삶이 건네주는 짓눌림과 무거움을 만나면 어느 순간 예수님에 관한 최소한의 믿음조차 고백하기 힘든 것이 우리네 자화상이다. 때문에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어느 한순간에 단 한 번으로 끝날 수 없으며 계속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더군다나 누군가 나를 위해 대신 기도해줄 수는 있어도, 믿음을 고백하는 일만큼은 오로지 나의 몫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을 향한 ‘나의 고백’은 머릿속에 맴도는 추상적인 생각과 언어가 아닌, 조금은 부족하고 서툴러도 확신에 찬 “내 생각과 내 말”(공동번역성서 시편 19,14)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공동번역 성서 요한 20,28)하고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바로 지금-오늘 나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초대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너에게 난 누구니?’

 

[2025년 1월 12일(다해) 주님 세례 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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