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9일 (토)
(녹)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순교영성: 복자 정광수의 벽동 교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8-06 ㅣ No.2410

[순교영성] 복자 정광수의 벽동 교회

 

 

- 초창기 조선 교회 지도자였던 정광수가 주문모 신부님의 편지를 김건순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탁희성 화백, 절두산 순교성지 제공)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사학죄인들의 공초 기록인 《사학징의》는 교회 모든 관련자들의 진술이 종횡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인물들의 관계 속에 교회 조직의 세부가 촘촘하게 드러납니다.

 

벽동은 복자 정광수 바르나바를 주축으로 형성된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그는 1799년에 여주에서 상경해, 미리 점찍어둔 마당 넓은 집을 웃돈을 주고 사서 그곳에 몇 칸의 집회 공간을 새로 지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집은 교회의 공적 자산이었습니다.

 

옆집에는 광주(廣州)에서 1795년에 상경한 심낙훈이 여동생인 동정녀 심아기와 함께 살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공주에서 온 신자 김홍철이 살았습니다. 경기도 고양에서 1795년 봄에 이사 온 조섭 예로니모가 그 옆집에서 여동생 동정녀 조도애 아나타시아와 함께 살았지요. 정광수의 행랑채에는 충청도 강경에서 올라온 신자 이중필이 살았습니다. 정광수의 교리서를 소지했다가 체포된 최경문은 그 구역의 통수(統首), 즉 통장이었습니다. 결국 구역 전체가 교우의 집이었던 셈입니다.

 

정광수는 이 집에 주문모 신부를 모셔와 미사 첨례를 가졌습니다. 강완숙과 홍익만, 최필제, 최해두 등 초기 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신부와 함께 사흘간 집중 학습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교회 지도자 연수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정광수의 여동생 정순매 바르바라는 교리 교사의 역할을 수행했던 듯하고, 장인 윤현은 인근 안국동에 살며 교회 일을 도왔습니다. 윤현의 아내 임조이, 딸 동정녀 윤조이, 계집종 신옥 등의 공초가 따로 남아 있습니다. 윤현은 훗날 유배지에서 《자책》을 썼던 최해두의 장인이었습니다. 근처 김치 가게 주인 최조이 이사벨라와 딸 성조이 마르타까지 포함하면 당시 벽동 일대는 거의 천주교 조직에 의해 한 구역이 장악되어 철옹성처럼 에워싸인 구역이었습니다. 정광수의 아내 윤운혜는 윤유일의 조카였고, 그녀의 언니는 복자인 동정녀 윤점혜 루시아입니다. 얽히고 설킨 인맥이 어마어마합니다.

 

《사학징의》의 부록 〈요화사서소화기〉에서 가장 많은 물건이 쏟아져 나온 윤현, 김희인, 정광수 세 집의 압수품은 모두 정광수의 것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정광수의 구역은 실제로 당시 조선 교회의 성물 교리서 보급 제작소의 역할까지 맡았던 것입니다. 이 막강한 벽동 교회 조직은 두려움을 못 견딘 어린 여종 금이(今伊)의 자백으로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사학징의》는 초기 교회 조직의 세부와 운영방식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짚코드입니다. 그간 우리 교회사 연구가 각 개인의 시성시복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기록의 입체성에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요? 살아남기 위해 고급 정보를 누설했던 배교자의 진술 속에 우리가 놓친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25년 8월 3일(다해) 연중 제18주일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