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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17) 산아제한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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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8-20 ㅣ No.1890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17) 산아제한 반대


생명 윤리와 인간 존엄성 저버리는 정책에 단호히 맞서다

 

 

1960년대 초, 한국교회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장면 정권이 수립된 것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를 지지하고 긴밀한 유착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서는 훗날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당시 교회는 군사정권의 반공주의 노선과 재건국민운동을 지지하며 정권의 주요 정책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교리와 윤리에 위배되는 정책들에는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공적인 산아 제한 정책이었습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 가족계획 홍보 포스터

 

 

한국 주교단, 산아 제한 반대 교서

 

가톨릭시보 1961년 10월 8일자는, 1면에서 산아 제한에 반대하는 주교단의 교서 발표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자연법 반한 산아 제한, 인간에 대한 흉악한 공격 – 건전한 가정의 방위 성명.

 

한국 가톨릭 주교단은 천주의 의지인 자연법에 반하는 방법으로 시행되는 ‘산아 제한’을 단죄하는 공동 교서를 발표하고 이를 교내외에 성명하였다. 교서는 ‘최근 인간의 존엄성과 가정 도덕을 위협하는 흉악한 공격에 자극되어, 신자들이 일반적 추악에 연루되거나 휩쓸려 마침내 질식당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할 필요를 느꼈다’고 하여, 교서를 발표하게 된 한국 사회의 정세를 시사하고 있다.”

 

19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인구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피임 약제나 기구의 수입 역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와 6·25전쟁 직후에는 출산율과 인구 증가율이 모두 매우 높았으며, 정부는 인구를 국가 발전의 자산으로 여겨 출산을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과 연계된 인구 억제 정책을 본격 추진했습니다. 1961년 4월 1일에는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창립되었고, 같은 해 11월 13일 국가재건회의는 가족계획을 통한 인구 조절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이는 “급증하는 인구를 조절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고, 모자 보건과 국민 생활 향상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진행됐습니다. 이로써 인공적인 산아 제한 정책이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되었고, 피임약과 기구의 수입과 국내 생산이 허용됐습니다.

 

 

인공적 산아 제한의 막대한 후유증

 

이러한 상황에서 1961년 주교단이 공동 교서를 통해 산아 제한에 대한 절대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은, 해당 정책이 사회에 미칠 막대한 영향을 깊이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기사에서는 교서의 내용을 대거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인구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신자들의 생활과 현실적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대 교황들도 이에 대해 권고와 규정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은 유물론적 해결책을 강요하는 시련장이 되었으므로, 교회는 중대한 논평과 경고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교서는 이미 교회가 인구 문제에 대해 확고한 가르침을 제시해 왔음을 전제하며, 인공유산, 단종법, 자위행위, 피임을 위한 기구 사용 등은 천주의 법과 자연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어떤 이유로도, 경제적 사정이나 모체의 생명 보존 등을 근거로 하여도 이러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윤리적 오류는 “인간의 온전한 행복을 현세적 쾌락에만 두는 유물론적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창조주의 법과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단죄했습니다. 이어 결혼 적령기의 연장, 축첩 폐습 시정, 극기 정신 함양, 해외 이민, 외국 원조의 원활한 활용 등 다섯 가지 현실적 제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단의 이 같은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책과 사회 분위기는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는 반대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 한국 주교단은 1961년,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에 반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가톨릭시보 1961년 10월 8일자 1면. 

 

 

모자보건법 제정 반대

 

가톨릭시보 1963년 2월 17일자 3면은 정부가 여고 3학년 교과 과정에 가족계획 내용을 포함하려 한다는 소식과 함께, 시정을 요구하는 교회의 진정서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진정서는 고교 교과서에 가족계획 관련 내용을 삽입하는 것은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해 성도덕을 문란하게 할 뿐이며, 국민 복지를 위해서는 오히려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1964년에는 모자보건법 제정 논의가 본격화됐습니다. 모자보건법 제정은 1973년에 이루어졌지만, 관련 논의와 입법 준비는 이미 1960년대부터 진행됐습니다. 모자보건법은 국가 주도 산아 제한과 가족계획 사업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인공 임신중절의 허용 요건을 규정하여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가톨릭시보 1964년 3월 15일자 2면 사설 ‘우생에 관한 입법설을 듣고’는 ‘우생법’으로 지칭되는 이 법안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우생법이 지양하는 바가… 당장에 노리는 바는 산아 제한 운동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나아가 산부인과 의사들의 낙태 행위를 공인하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비록 ‘우생법’이 독립 법률로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우생학적 관점이 정부의 보건정책, 가족계획 사업, 그리고 모자보건법 제정 과정에 반영된 것은 분명합니다. 즉, 유전 질환이나 장애가 있는 이들의 생식을 제한하거나 배제하려는 우생학적 사고가 인구 억제 정책과 보건의료 정책에 스며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인권 침해 및 차별의 요소를 담고 있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됐습니다.

 

 

낙태 반대는 교회의 소명

 

1960년대 초 산아 제한 정책에 대한 주교단의 반대 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생명윤리 논의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 초기부터 이에 반대하며 「인구문제와 산아 제한」(1961), 「국민 우생법안에 대한 우리의 견해」(1964), 「모자보건법의 독소를 고발한다」(1973) 등의 사목 교서를 발표했고, 1992년에는 모자보건법을 근거로 한 형법 제135조 폐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도 전개했습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형법상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교회의 생명운동은 또 다른 국면을 맞았으나,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존중은 교회의 일관된 입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8월 17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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