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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18)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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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8-27 ㅣ No.1893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18)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시대 변화에 발맞춘 보편교회…한국교회 쇄신 여정 첫 발 내딛다

 

 

1962년, 한국교회는 성숙한 지역교회로 인정받아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됩니다. 교황청은 선교지 교회가 자립 능력을 갖춘 교회가 되면 이처럼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해서 교회 안의 입법, 사법, 행정 업무와 관련되는 완전한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을 인정합니다.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바로 그해, 세계교회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형성하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게 된 것이지요. 가톨릭시보는 10월 7일자 1면 톱기사와 사설을 통해 10월 11일 개막하는 공의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신자들의 기도를 청했습니다. 아울러 공의회 참석을 위해 로마로 떠나는 한국 주교단 소식을 전했습니다.

 

“한국 주교단 로마 등정(登程), 7日 일본주교단과 합류 - 오는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특설된 공의회 본회의장에서 엄숙히 막을 올리게 될 제21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는 한국 주교단은 10월 7일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을 SAS편으로 향발한다.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각 주교들의 한국 출발은 2, 3일의 간격을 두고 있다. 인천 굴리엘모 주교께서는 9월 27일 출발했다. 광주 현 대주교께서는 10월 3일 도쿄로 향발했으며, 춘천 귄란 구 주교 출발은 5일, 청주 파 주교께서는 6일 각각 김포공항을 출발했다.”(가톨릭시보 1962년 10월 7일자 1면 중에서)

 

- 가톨릭시보 1962년 10월 14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공의회의 의미

 

10월 14일자에서도 1면 톱기사 ‘우리는 공의회에 무엇을 바라는가’와 사설 ‘동정성모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게재했습니다. 또한 10월 21일자에서는 일반 언론의 공의회에 대한 성급하거나 잘못된 보도들을 지적한 ‘공의회 보도의 조급성’에 대해 사설로 꼬집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공의회에 무엇을 바라는가? - 공의회가 우리와 같은 평신자에 불과한 개인에게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공의회에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혹시 있다면 공의회가 무슨 효과를 나 개인의 신앙 생활에 끼칠 것인가? 이런 의문도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부주의한 편이다. 이 굉장한 역사적이며 종교적인 중대성을 띤 행사를 위해 9일 기구까지 바치고 있으니 말이다.”(가톨릭시보 1962년 10월 14일자 1면 중에서)

 

기사는 이어 공의회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신자들이 알기 쉽도록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 공의회는 “지난 20차의 공의회처럼 어느 특별한 이단에 대하여 성교회를 방위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슨 새 신덕 도리를 공의회가 성문화하지 아니할 것만은 확실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이번 공의회는, 지난 1000년 동안보다 더 큰 변화가 지난 100년 동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열린 것이며, 따라서 교회가 이러한 급격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할 방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공의회, 현대 교회를 형성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이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제시한 화두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즉 현대 세계와 사회에 대한 적응과 쇄신이었습니다. 

 

세상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가던 교회가 빗장을 풀고 세상과 대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지요. 그 결과로 발표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은 이후 교회 쇄신 지침이 되어 현대교회의 모습을 형성합니다.

 

정식 교계제도 설정으로 보편교회의 일원이 된 한국교회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와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조국과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쇄신 여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교회일치에 대한 관심과 노력, 타종교에 대한 관용,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적극적 관심, 사회정의 실현과 민주화 운동 등 사회 참여에 열린 자세, 토착화에 대한 열의가 모두 공의회의 결실이었습니다.

 

특별히 1984년 열린 한국 천주교 200주년 사목회의는 공의회 정신을 한국적 토양에 적용하고자 한 가장 걸출한 성과였습니다. 사목회의의 성과를 교회 안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부족했지만,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내실 있는 사목적 회의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2000년을 전후해 열린 각 교구의 시노드들은 바로 이러한 쇄신 노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 요한 23세 교황이 1962년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개막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CNS 자료사진

 

 

끝나지 않은 공의회

 

공의회는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참된 의미는 폐막과 함께 구현되기 시작됐습니다. 공의회가 폐막한 지 올해로 60년이 됐지만 여전히 공의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이 교회의 모든 삶에 적용되고 실천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 폐막 20주년을 기해 공의회 문헌 해설 총서를 저술한 H. V. 스트라렌은 공의회의 의의를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시야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수 세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공의회를 둘러싼 논란, 확신과 의혹은 공의회가 진행되던 그때, 폐막한 지 얼마 안 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가톨릭시보 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공의회 폐막 후에도 공의회 이후 변화되는 교회의 모습들을 자주 기사로 전했습니다. 특히 주교회의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1967년 6월 18일자 가톨릭시보에 실린 사설 ‘주교회의에 건의한다’는 주교회의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사설은 공의회 정신 실현에서 주교회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주교회의의 활동이 소극적이고 때로는 ‘임기응변’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주교단 공동의 노력이 미비함을 지적하고, 한국교회 전체의 사목적 전망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사목계획을 수립, 추진하지 못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이 사설은 당시 교회 지도층의 ‘분노’를 유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당시 젊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과 대조적으로, 교회 지도층은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최대한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 주교단은 공의회 폐막 직후인 1966년경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바탕으로 한국의 모든 신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제시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8월 24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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