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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성당 스케치38: 산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경당과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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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38) 산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경당과 도서관 조각가 시선으로 건축 재해석하며 르네상스 질서를 깨다
-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출처 위키미디어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르네상스 예술의 고장인 피렌체에서 살았고 특히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문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을 접하고 인문학과 철학 등의 학문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는 젊은 시절에 피렌체를 기반으로 로마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스물한 살에 처음으로 로마에 가서 <피에타상>을 조각했습니다. 그리고 피렌체로 돌아와서 로마에서의 유명세로 <다윗상>을 조각하고 그림 작업도 했으며, 서른 살이던 때 율리오 2세 교황의 부름으로 다시 로마에 가서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완성했습니다.
그 후 어렸을 때부터 잘 알았던 메디치 가문의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마흔한 살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요청으로 피렌체로 돌아와서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설계 공모에 참여하였습니다. 산 로렌초 성당은 15세기 초에 ‘구 성구실’과 함께 브루넬레스키에 의해서 세워졌지만, 성당의 파사드는 미완의 상태로 백 년이 흘렀습니다.
-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설계 공모에 제출된 미켈란젤로의 목재 모형. 실제 성당의 파사드는 석재의 수급 문제로 지금까지도 마감 없이 남아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이에 레오 10세 교황은 당대의 이름 있는 건축가들인 줄리아노 다 상갈로, 라파엘로, 안드레아 산소비노, 미켈란젤로를 설계 공모에 초대하였고, 그 가운데 미켈란젤로의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시공에 필요한 도면과 목재 모형을 만들었는데, 석재의 수급 문제로 결국은 공사가 취소되어 지금까지도 파사드는 마감 없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머물며 ‘메디치 경당’과 ‘도서관’의 설계도 맡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당의 외관 특히 파사드는 성당의 내부 구조와 일치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3랑식 바실리카형 성당의 파사드는 네이브 부분이 높게, 아일 부분이 낮게 처리됩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 없이 파사드 전체를 같은 높이로 설계했습니다. 파사드는 벽기둥 네 쌍으로 분할되는데 이 또한 내부의 구조와 무관한 파격적 설계입니다.
이는 성당이 아닌 팔라초에서 볼 수 있는 파사드 형태로, 건물의 성격이나 내부의 구조가 아닌 오로지 파사드의 예술적 완성도만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입체적 설계는 그가 조각가라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결국 외관과 내부의 구조적 일치에서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규칙을 깨트림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 메디치 경당(신 성구실 )외관. 미켈란젤로는 신 성구실을 설계하며 기존 질서에 어긋나는 확장을 통해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탈피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레오 10세 교황은 산 로렌초 성당 안에 그의 동생인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 데 메디치(1516년 사망)와 조카인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1519년 사망)를 위한 메디치 경당(신 성구실)을 원했습니다. 1520년 이 경당은 브루넬레스키가 백 년 전에 만든 ‘구 성구실’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는데, 돔 천장을 가진 정사각형의 중앙집중형 공간과 세 개의 부속 공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경당 평면의 크기와 구성은 구 성구실과 유사하나 돔을 받치는 드럼의 높이를 두 배로 하여 공간을 수직으로 확장하였습니다. 높아진 드럼은 두 개의 층으로 분할되었으며 각 층은 여러 형태의 기둥과 벽감으로 분절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기존의 질서에 어긋나는 확장을 통해서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탈피했습니다. 특히 1층과 2층 사이의 코니스를 두 개로 분리 설치하여 층과 층의 유기성을 거부하였으며, 벽면의 양 끝에 벽감을 설치하여 벽면의 가장자리를 중앙에 예속된 부분으로서가 아닌 독립된 부분으로 간주하였습니다.
- 메디치 경당(신 성구실) 내부. 제대의 정면인 사진 왼쪽에는 레오 10세 교황의 아버지 로렌초와 삼촌인 줄리아노의 무덤이, 오른쪽에는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의 무덤이 보인다. 출처 위키미디어
조르조 바사리는 이 경당을 보고 미켈란젤로가 치수와 오더의 법칙으로 규정되는 르네상스 건축과는 매우 다른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메디치 경당은 줄리아노 로마노의 ‘팔라초 테’보다 수년 먼저 설계된 것으로, 매너리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입니다.
경당의 조각상들을 살펴보면, 제대의 정면에 레오 10세 교황의 아버지 로렌초와 삼촌인 줄리아노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 성모자상과 양옆에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의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의 양쪽에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의 무덤과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의 무덤이 있는데, 그들의 삶에 드러난 모습인 듯 하나는 활동적인 모습을 다른 하나는 관상적인 모습을 상징합니다.
먼저 줄리아노의 무덤은 활동적인 삶을 묘사하는데, 그는 고개를 돌린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아래에 두 인물상은 일종의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로 낮과 밤을 상징합니다. 로렌초의 무덤은 관상적인 면을 보이는데,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고 성모자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새벽과 황혼을 의미하는 두 인물상이 있습니다.
1523년 미켈란젤로는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의뢰로 피렌체의 마지막 작품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설계를 맡았습니다. 이 도서관은 산 로렌초 성당에 부속된 건물로, 도서관에 들어가는 현관과 도서관 본관으로 나뉘는데, 본관은 폭 10.5m 길이 46.2m 높이 6.8m이며, 현관은 10.5m 정사각형 바닥에 높이 14.83m의 규모입니다. 따라서 현관에 서면 마치 우물 속에 갇힌 기분이고, 본관으로 들어서면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아서, 두 공간이 조성하는 대비가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현관의 미켈란젤로의 계단. 출처 위키미디어
바닥 높이에서 8m 이상의 큰 차이가 나는 두 공간은 계단으로 이어집니다. 계단은 중앙과 양옆의 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의 계단은 아래쪽을 향하는 원형의 형태이고 양옆의 계단은 위쪽을 향하는 직선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앙의 계단은 본관에서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 같아서 올라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느낌이고, 양옆의 계단은 3분의 2 지점에서 중앙 계단과 합쳐지면서 사람을 본관으로 끌어 올리는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중앙과 양옆의 계단 역시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관의 벽면 역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탈피하고 있는데, 현관 전체에서 토스카나식 쌍기둥이 벽 안에 들어가 있어서, 독립된 기둥이나 벽기둥의 형태로 수행되는 일반적인 기둥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둥 위에는 아무 하중도 걸리지 않은 채 기둥은 장식품으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이 현관은 벽체가 내력 역할을 하면서 기둥을 받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미켈란젤로는 정해진 뻔한 규칙을 넘어서야 직성이 풀리는 상상 이상으로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9월 28일,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0 4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