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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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말라키 예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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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말라키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예언서를 탐구할 때,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은 예언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말라키서는 연대기, 역사적 사건, 임금의 이름 등 역사와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아 시대적 배경과 저작 연도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말라키서의 내용을 토대로 시대를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말라키서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그릇된 경신례를 비판하고, 잘못된 십일조와 부정한 예물 봉헌을 지적합니다. 그러니 귀환 후에 제2성전이 지어진 다음 경신례가 행해지고 있는 시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 다룬 이방 민족과의 혼혈혼에 대한 비판도 등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말라키 예언서가 작성된 시대는 성전이 지어진 기원전 515년 이후에서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었던 기원전 455년 사이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들뜬 희망과 부푼 기대를 안고 귀환한 이스라엘은 성전의 완공과 함께 다윗의 황금 시기가 곧 시작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했죠. 여전히 강대국의 지배와 지배층의 억압은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의 가난과 불평등으로 불안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 백성은 실의와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의 열정은 식어버렸습니다.
여섯 번의 논쟁
이런 시대에 말라키 예언자는 당시 백성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문제들을 논쟁 형식으로 고발합니다. 연속성이 없는 개별 주제를 담고 있는 여섯 개의 논쟁은 하느님의 호소, 이에 반대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위, 예언자의 변론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라는 일정한 틀 속에서 전개됩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논쟁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1,2)라고 하시고, 이에 백성이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1,2)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에돔에 내린 심판으로 유다에 베푸신 사랑을 입증하십니다. 이와 같은 형식 안에서 참다운 경신례, 혼혈혼과 이혼, 심판과 정화, 올바른 십일조와 예물 봉헌, 주님의 날에 드러나는 정의 등의 다양한 주제가 이어지죠.
사실 말라키 예언서에서 논쟁의 주제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질문으로 표출되는 백성의 반박입니다.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1,2), “저희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업신여겼습니까?”(1,6),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더럽혔습니까?”(1,7), “어찌 이러십니까?”(2,14), “저희가 어떻게 싫증 나게 해 드렸습니까?”(2,17),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3,8)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3,13).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이 같은 질문이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기대가 좌절로 변화된 백성의 처지가 이해는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를 짓고도 당당하며 하느님을 이겨 먹으려 대드는 오만함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오만함이 지금 나의 모습은 아닌지 성찰하게도 되지요.
“하느님의 감추어짐”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여섯 개의 논쟁은 형식이 같다는 공통점 외에도 ‘하느님의 감추어짐’을 주제로 다루는 접점이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과 절망이 가득했던 시대에 지쳐버린 백성은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현존에 의심을 가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악인에게 벌을 그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라 믿어왔는데 정작 현실은 착하게 살아도 복을 받지 못하고, 악하게 살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자마다 다 좋고 그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좋아하신다.”(2,17)라며 비아냥거립니다. 심지어 주님을 경외하는 자마저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3,14)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3,15) 이렇게 ‘굳이 하느님을 섬기며 착하게 살 필요가 뭐 있나?’ ‘힘들게 법을 지키고, 남을 배려할 필요가 뭐 있나?’라는 마음 깊은 곳에는 ‘하느님은 보지 않고 듣지 않으신다. 어차피 하느님은 모르신다. 하느님은 없다.’라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백성의 반문에 하느님이 응답하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3,16)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이를” 가릴 것이다(3,18 참조).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시며, 다 알고 계시고,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나아가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3,19)라고 하시며 심판 날에 악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올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3,22)라고 합니다. 심판 때에 악인은 징벌로, 의인은 구원으로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위로가 되지만,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더 큰 위안이 됩니다.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
사제에게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평범한 신앙 상담 외에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러 오거나 남의 잘못을 일러바치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간혹 공동체 안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교우를 마주할 때, “그런 일이 있었냐? 정말 몰랐다.”라고 하면 더 마음이 격해져 호소가 길어집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하면 놀란 눈빛을 보내며 한결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때로는 ‘알고 있다’라는 말 한마디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도 말라키 예언자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봉사와 희생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어 헌신하는 사람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마치 하느님은 눈을 감고 계시고,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만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활동과 기도가 무의미해 보이고 단원으로서의 열심이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말라키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3,16) 사랑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0월호, 여한준 롯젤로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0 15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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