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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메리놀 수녀회와 평양 지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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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1-06 ㅣ No.1923

[한국 교회의 인물상 132] 메리놀 수녀회와 평양 지목구

 

 

메리 조셉 로저스 수녀와 메리놀 수녀회의 창설

 

메리놀 수녀회(Maryknoll Sisters)는 1912년 메리 조셉 로저스(Mary Joseph Rogers, 1882~1955) 수녀가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한 미국 최초 외방 선교 수녀회이다. 1920년 설립 인가 당시 수녀회의 명칭은 ‘성 도미니코 외방 전교 수녀회’(Foreign Mission Sisters of St. Dominic)였으나 통상 메리놀회(Maryknoll, 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가1) 그랬듯이, ‘메리놀 수녀회’로 불렸다.2)

 

창설자 로저스는 1882년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록스베리(Roxbury)에서 보스턴(Boston) 출신 에이브러햄 로저스(Abraham T. Rogers)와 메리 조세핀 플럼머(Mary Josephine Plummer)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녀는 보스턴에 있는 웨스트 록스버리 고등학교(West Roxbury High School)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01년 매사추세츠주 노스샘프턴(Northampton) 스미스 칼리지(Smith College)에 입학하여 동물학을 전공, 1905년 졸업하였다. 이후 1906년 스미스 칼리지 동물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조교로 활동하던 중 ‘가톨릭 미션 클럽’(Catholic mission club)을 조직하였다. 이 당시 그녀는 메리놀회 공동 창설자 월시(James A. Walsh, 1867~1936) 신부를3) 만나 선교에 대한 조언을 구하였고, 그의 선교 비전에 감화되어 1907년부터 선교잡지 『그 먼 땅에』(The Field Afar) 원고 번역과 편집 업무 등을 도맡았다. 그리고 로저스 수녀는 월시 신부, 프라이스(Thomas F. Price, 1860~1919) 신부와4) 함께 미국 최초의 외방 선교회인 메리놀회 창설에 협력하였다. 오늘날 로저스 수녀는 월시 신부,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메리놀 공동체의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메리놀회 창설 이듬해인 1912년 월시 신부는 해외 선교와 수도 생활을 지향하는 로저스를 비롯한 여성 6명을 뉴욕(New York)주 호손(Hawthorne)의 메리놀회 본부에 모았고, 로저스에게 이 모임을 이끌도록 하였다. 메리놀 수녀회의 시초가 된 이 공동체는 호손의 임대주택에 거주하다가 오시닝(Ossining) 언덕 메리놀 본부의 한 구역에 머물며 메리놀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수녀회 설립 인가 신청을 준비하였다. 공동체가 시작된 지 8년 만인 1920년 2월 14일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교구 수도회 설립 승인, 1954년 12월에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교황청 수도회 승인을 받았다.5) 로저스는 1921년 2월 15일 수련을 마치고 메리 조셉(Mother Mary Joseph) 수녀로 첫 서원을 하였고, 1925년 첫 총회에서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6) 메리놀 수녀회는 1920년 설립 승인을 받자마자 미국 서부 연안에 정착한 다수의 일본 이민자를 위해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4명의 수녀가 첫 서원을 미루고 시애틀과 로스앤젤레스에 파견되어 첫 선교 사업을 시작, 선교지에서 남은 수련 과정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메리놀 수녀회의 한국 진출

 

메리놀 수녀회의 지원자가 꾸준히 늘어나자 월시 신부와 로저스 수녀는 수녀회의 설립 목적대로 수녀들을 아시아의 선교지에 파견하고자 하였다. 로저스 수녀는 해외 선교 현장 경험과 지식을 얻기 위해 1923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본을 거쳐 중국과 한국 등 메리놀회 선교지를 순방하였다. 1924년 2월 11일 로저스는 마지막 방문지인 한국의 신의주에서 폴 맥케나(Mary Paul McKenna, 1888~1984) 수녀와7) 함께 종신서원을 하였다. 모리스(John E. Morris, 睦怡世, 1889~1987) 신부가8) 미사를 집전하였고, 패트릭 번(James P. Byrne, 方溢恩, 1888~1950) 신부가9) 서원을 받아들였다.10)

 

메리놀 수녀회는 메리놀회 선교사가 파견된 곳에는 함께 파견되었다. 메리놀 수녀회는 1921년 홍콩에 첫 선교 수녀 파송을 시작으로 1923년 중국, 1924년 한국에 진출하였다.11) 메리놀회 선교사가 한국에 진출한 1923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에서 활동하던 수녀회는 1888년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Sisters of Saint Paul of Chartres)가 유일하였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에는 1909년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파견되어 평양, 진남포, 의주 본당에 분원을 신설하고 본당, 학교, 양로원, 보육원, 시약소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12)

 

 

 

메리놀회가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를 위해 파견된 이듬해 1924년 10월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메리놀 수녀회 수녀 6명이 의주에 도착하였다.13) 1925년 10월에는 수녀 6명이 입국하였다. 그중에는 미국 본원에서 수년간 수련 생활을 하던 한국인 장정온(張貞溫, 아네타, 1906~1950) 수녀와 김교임(金敎任, 말가리다, 1906~1998) 수녀도 있었다.14) 메리놀 수녀들은 의주에 임시 수녀원을 마련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익히며 선교 활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영유(永柔)에 공사 중이던 수녀원이 1926년 준공되면서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의주에서 영유로 옮긴 후 메리놀 수녀들의 진출이 계속되었다.15)

 

메리놀 수녀회의 활동을 살펴보면, 한국지부가 영유로 이동 뒤에도 의주에 남았던 3명의 수녀가 양로원을 운영하고 고아들을 양육하였으며, 시약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 시약소는 1936년 신의주에 성모병원이 설립될 때까지 운영되었다.16) 새로운 한국지부 영유에서도 수녀원 내에 여자기예학원(女子技藝學院)을 신설하고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 습득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본당의 전교 사업을 돕고 시약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치료하고, 고아원도 설립하는 등 본당, 교육, 의료 등 여러 방면에서 선교 활동에 헌신하였다. 메리놀 수녀회는 신의주 본당에도 분원을 개설하였다. 신의주 본당의 4대 주임 페티프렌(Roy D. Petipren, 邊聖行, 1893~1977) 신부17) 때 의학박사 멜시(Hirschboeck Meercy)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수녀원 건물에서 시약소와 병원을 운영하였다. 멜시 수녀가 매일 오전에 신의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곤궁한 이들을 무료로 치료하고 오후에는 병원에서 외래환자를 치료하였다.

 

메리놀 수녀들은 어쩔 수 없는 언어 소통의 한계로 힘들어했는데, 서혜련(徐惠蓮, 헬레나)이18)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수녀들 곁에서 적극 협조하였다. 그럼에도 평안도 각 지방에서 활동하던 메리놀 수녀들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사목 분야가 다양화되면서 수녀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창립

 

당시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 수녀회의 설립을 절감하고, 그 책임을 메리놀 수녀회에 위촉하였다. 1931년 7월 16일 메리놀 비즈(Mary Genevieve Beez, 1896~1945) 수녀, 콜린스(Mary Sylvester Collins, 1896~1942) 수녀, 헤세(Frances Teresa. Hesse, 1897~1977) 수녀 3명은 평양 상수구리 257번지에 마련된 숙소와 수련소에서 한국인 수녀 양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 27일 첫 입회자 서원석(안젤라), 김 루치아, 문 바드리시아, 김 체칠리아, 홍 루실라 5명과 함께 새로 탄생할 수녀회의 ‘수호자’를 길의 인도자로 알려진 ‘영원한 도움의 성모’로 정하고, 그 축일인 6월 27일에 창립 미사를 봉헌,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탄생하였다.19)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설립된 이후 1933년에 8명, 1934년에 2명 등 지원자는 꾸준히 있었다. 이와 함께 지도 수녀들은 소학교를 졸업한 지원자들의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해 중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도록 시켰고, 그 결과 여러 명의 지원자가 교원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소학교 교원 자격을 획득하였다. 1935년 6월 27일에 첫 청원식을 거행하였고, 9월 15일에는 수녀회의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20) 평안도 지역에서 본당 사무, 사회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등에 종사하던 메리놀 수녀들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영유수녀원에 감금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오셔(William F. O'Shea, 吳, 1884~1945) 주교는21) 한국인 수녀인 장정온 수녀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원장으로 임명하였다.22) 한편 메리놀 수녀들은 1942년 6월 1일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23) 이후 메리놀 수녀회가 한국에 재입국한 것은 1949년 12월이었다. 홀로 남은 장정온 수녀는 1950년 피랍될 때까지 수녀회를 책임졌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4일 북한당국은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본원 건물을 양도하라고 통보하였다. 5월 14일 장정온 원장 수녀는 마침내 수녀회의 임시 해산을 결정하고 수녀들을 각자의 집과 본당으로 돌려보냈고, 다음 날 수녀원 건물을 북한당국에 압수당하였다. 북한당국은 수녀원을 몰수하여 한국전쟁 때 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장정온 수녀는 월남을 계획하다 실패하고 신자들 집에 숨어 있다가 1950년 10월 4일 보위부원에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1955년 본원을 서울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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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11년 4월 27일 미국 주교회의의 인가를 얻었고,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의 인준을 받았다. 메리놀회는 창설 1년 후 본부를 뉴욕(New York)주 호손(Hawthorne)에서 오시닝(Ossining)에 있는 언덕으로 이전하여 이때부터 ‘메리놀’(Maryknoll)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2) 메리놀 미션아카이브(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mother-mary-joseph-rogers/).

 

3) 1867년 2월 24일 개신교의 교세가 특히 강한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제임스 월시(James Walsh)와 한나(Hanna Shea Walsh) 사이에 태어났다. 월시 신부는 케임브리지 지역 개신교의 선교 프로그램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교세가 약하였던 이곳 천주교는 프랑스의 전교후원회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와 천주교의 선교 활동을 접한 월시 신부는 성 요한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순교에 대해 배우며 크게 감동하였다. 1892년 사제품을 받고 보스턴에서 사목하며 꾸준히 해외 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해외 선교에 관한 관심과 미국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선 그는 1907년 미국 천주교의 해외 선교에 관한 잡지 『그 먼 땅에』(The Field Afar)를 창간하였다(이민석, 「일제의 종교정책과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 –학무국 종교과 신설과 활동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65, 2024, 223~224쪽).

 

4) 1860년 8월 19일 노스캐롤라이나(State of North Carolina)주 윌밍턴(Wilmington)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 부부 알프레드 프라이스(Alfred Bond Price)와 클라리사(Clarissa Bond Price)의 여덟째로 태어났다. 프라이스는 1886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첫 사제 서품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수백 마일을 걸어 다니며, 주로 개신교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선교에 있어 천주교 진리를 알려주는 잡지 출간이 매우 긴요한 문제라고 판단, 1897년 잡지 『진리』(Truth)를 창간하여 천주교를 올바로 알리고 신앙을 증진하고자 하였다. 신학교 건립과 고아원 운영 등의 활동도 아울러 수행하며 점차 외방 선교를 진지하게 고려하였다(이민석, 위의 논문, 2024, 224쪽).

 

5) 클라우뎃 라베르디에, 김선실 옮김,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나이테미디어, 2013, 30~39쪽; 메리놀 수녀회 홈페이지(https://www.maryknollsisters.org/about-us/history/).

 

6) 클라우뎃 라베르디에, 김선실 옮김, 위의 책, 2013, 56~57쪽; 메리놀 미션아카이브(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mother-maryjoseph-rogers/); 메리놀 수녀회 홈페이지(https://www.maryknollsisters.org/about-us/history/).

 

7) 1888년 9월 21일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레딩(Reading)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2월 15일 메리놀 수녀회 첫 서원을 한 수녀 중 한 명이었다. 1921년 9월, 멕케나 수녀는 중국 남부 선교에 파견된 최초의 메리놀 수녀들을 인솔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원장 수녀의 첫 선교 순방에 동행, 같은 해 필리핀 선교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파견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8) 1889년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폴리버(Fall River)에서 태어났다. 1909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 성 던스턴 대학(St. Dunstan’s College)을 졸업하고, 볼티모어(Baltimore) 성 마리아 신학교(St. Mary’s Seminary)에서 공부한 후 1914년 폴리버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7년간 성 요셉 성당 보좌신부로 봉사하였다. 1921년 메리놀회에 입회하였고, 베나드(Venard) 메리놀 소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메리놀회 홍보 활동을 하다가, 1923년 한국 평양에 파견되었다. 모리스는 자신의 이름을 목이세(睦怡世)로 짓고, 1924년부터 영유 본당 신부로 활동하다 1930년 4월 1일 제2대 평양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9)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에서 패트릭 번(Patrick Byrne)과 안나 실즈(Anna Seales Byrne)의 10남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 1909년 9월, 그는 볼티모어 성 마리아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5년 6월 23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7일만인 6월 30일 메리놀회에 입회하였다. 패트릭 번은 그 뒤 메리놀회의 총장 비서 겸 참사 위원을 거쳐 1918년 6월부터 4년 동안 소신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 11월 27일 교황청에서 한국 평안도 지역의 선교를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면서 그 초대 한국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5월 10일 한국에 입국한 뒤 사제와 수도자들의 한국 파견, 평안도 지역의 교세 신장 등에 힘썼다. 1927년 3월 17일 평양 지목구가 설정되고, 그해 11월 9일 번 신부는 초대 지목구장에 임명되면서 1932년부터 메리놀 신학교의 학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그는 1934년 7월 12일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일본 선교 책임자에, 1937년 3월 19일에는 초대 교토 지목구장에 임명되어 1939년까지 재임하였다. 1947년 7월 17일 패트릭 번은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하지만 한국 전쟁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하던 도중 11월 25일 선종하였다.

 

10) 클라우뎃 라베르디에, 김선실 옮김, 위의 책, 60~63쪽; 이정순 엮음, 『목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1994. 58~59쪽.

 

11) 메리놀회는 일찍부터 전교지 『그 먼 땅에』(The Field Afar)를 간행하여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아시아 선교의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고, 아시아 선교지에 선교자금을 후원하는 등 아시아 선교 준비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18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중국 광동성(廣東省) 양강(陽江) 지역 선교권을 위임받고, 아시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0년 광서성(廣西省) 오주(梧州) 지역, 1924년 광동성의 강문(江門) 지역, 1925년 역시 광동성의 가응(嘉應)과 만주 지역의 무순(撫順), 1933년 다시 광서성의 계림(桂林) 지역을 관할하는 데 이르렀다. 1922년에는 한국의 평안도 지역을 위임받고 1927년 평양 지목구를 설정하였다. 1935년에는 일본 교토(京都) 지목구 선교를 맡았다.

 

12) 천주교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천주교 평양교구사』, 1981, 60~63쪽.

 

13) 한국에 처음 파견된 메리놀회 수녀는 어거스틴 쿠퍼(Mary Augustine Kuper, 1887~1977) 수녀, 실베스텔 콜린스(Mary Sylvester Collins, 1896~1942) 수녀, 유제니아 고르만(Eugenia Gorman, 1902~1997) 수녀, 앤드류 스미스(Mary Andrew Smith, 1885~1960) 수녀, 율리아나 베딜(Juliana Bedier, 1896~1982) 수녀이다.

 

14) 김교임 수녀는 장정온 수녀의 오빠인 장면(요한)의 처조카로, 1922년 장정혜, 장정온 자매와 함께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장정혜는 수련 도중 수도생활을 포기, 귀국하였고, 김교임과 장정온은 1925년 첫 서원 후 한국에 파견되었다.

 

15) 천주교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84~86쪽.

 

16) 방상근,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48~250쪽.

 

17) 1893년 7월 7일, 미시간(Michigan)주 디트로이트 교외의 앵커빌(Anchorville)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25년에 사제품을 받고 그해 8월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1942년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해방 후 1946년 남한으로 돌아와 사목 중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거제, 부산, 광주, 논산의 포로수용소에서 활동하였다.

 

18) 백동 본당 신자로, 장면(요한) 박사의 동생 장발(루도비코)의 배우자이다.

 

19)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해방 후 사회복지 활동은 김가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과 북한 사도직」, 『교회와 역사』 2023년 11월호(582호)를 참고 바람.

 

20) 방상근, 앞의 책, 263쪽.

 

21) 1938년 10월 제3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7월 11일 평양 대목구로 승격함에 따라 그해 10월 29일 주교로 착좌하였으나, 태평양전쟁 발발로 1942년 6월 1일 다른 메리놀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22) 천주교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06쪽.

 

23)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한국, 일본, 만주 지역 등에서 활동하던 메리놀 선교사, 수녀들은 일제로부터 미국의 스파이 혐의를 받아 감금생활 끝에 이듬해 6월 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5년 10월호, 이민석 대건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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