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4일 (수)
(자) 12월 24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 티모테오 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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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2-03 ㅣ No.993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 티모테오 주교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티모테오 주교님,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에 하느님 나라로 가셨지요. 명동 지하 성당에 누워있는 주교님의 얼굴은 차마 못 보았어요. 대신 두 손에 꼭 쥔 묵주가 눈에 들어왔지요. 주교님은 성모님을 무척 사랑했지요. 소신학교 입학 전인 중학교 3학년 때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며 개인적으로 커다란 신앙의 체험을 했고 사제의 길을 꿈꾸었다 하셨지요. 

 

고통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셨으니 좋은 추억만을 기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주교님의 마지막 시간을 같은 사제관에서 지내게 되었죠. 투병하시는 끝자락엔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안쓰러웠어요.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하셨죠. “내가 이렇게 아프니까 예전에 허 신부님이 독일에서 많이 아프셨던 것이 생각났어요. 그때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나는 독일에서 잦은 편두통과 낯선 음식으로 자주 체하고 기운이 없어 한참을 누워있는 때가 많았지요. 그 당시 내가 아파하는 것을 주교님이 곁에서 많이 보셨어요.

 

주교님은 어느 날 마지막을 의식한 듯 “그동안 모든 게 감사해요. 하느님, 은인들, 선배 동료 사제들, 혹시 나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너무 미안하고요.”라고 하셨지요. 난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죠.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남아요. 무어라도 말을 해야 했었는데. 그때는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을 꿈에도 몰랐어요. 요즘도 사제관 성당에 들어가면 주교님이 힘겹게 들어오셔서 앉는 모습, 식사 때도 힘겹게 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숙소에 돌아올 때면 주차장 한구석에 남아있는 주인 잃은 주교님의 차가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지요.

 

주교님은 신학생 때부터 저의 동생 신부와 같은 반이라 자연히 친동생처럼 친해졌고, 힘든 일들이 있으면 속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우리 둘이 있으면 말도 많아지고 애교도 많아 영락없는 막내티(?)가 팍팍 났어요. 동생과 같은 반에 유명 탤런트의 동생이 있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바로 유 주교님이었지요. 형제들은 모두 끼(?)가 많았던 것 같아요. 유 주교님도 자주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학교 축제 때 연극의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던 것도 기억나요. 그런데 무대에서 내려오면 주교님은 늘 수줍음이 많고 말도 무척 아낀다고 생각했어요.

 

 

주교님과 독일에서 함께 있으면서 많은 추억 만들어

 

우리가 독일에 있을 때 같이 차를 타거나 산책할 때 나에게 늘 묵주기도를 같이 바치자고 했었죠. 사실 난 가끔은 피곤해서 ‘이번엔 좀 생략하지’라고 생각한 적도 많아요. 주교님은 특히 묵주기도를 같이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독일의 뷔르츠부크에서 몇 달 같이 사는 동안 독일 음식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밥을 해주느라 고생이 많았지요. 독일 북쪽에 사시는 누나도 자주 김치를 소포로 보내주셨지요. 한번은 우체국에서 소포가 터져 김치 냄새로 난리가 났었지요. 내가 독일의 다른 도시를 간 적이 별로 없다고 하니까 어느 날 50만 원 정도의 폐차 직전 차를 사서 뚝딱뚝딱 고치더니 한 번도 고장 없이 같이 잘 타고 다녔지요. 날씨 좋은 어느 봄날, 수업도 빠지고 몇 시간을 달려 하이델베르크에 같이 갔던 때가 기억나요. 하이델베르크 성의 제일 높은 곳에서 인적이 없자 주교님은 이때다 싶게 성가를 부르는데 세상을 향한 커다란 외침 같았어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이자 노랫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둘이 한참을 웃었지요. 언젠가 고속도로에서 매서운 바람과 폭우를 만나 차가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였는데 같이 로사리오를 하고는 비가 그쳤지요. 우리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모님이 도와주셨네.” 했어요. 

 

누나 집에 휴가도 같이 갔었죠. 바다낚시를 하겠다고 우리 둘과 주교님 매형이 같이 배를 탔는데 궂은 날씨와 파도로 낚시는커녕 인생 최악의 뱃멀미가 시작됐죠. 나는 바닥에 누워 탈진했고 매형이 독일 선장에게 “헬기라도 불러달라”고 했지만 노련한 선장은 “40년 넘게 배를 탔지만 멀미로 죽은 사람은 없으니 안심하라” 했다죠. 주교님도 멀미가 오니까 참으려고 한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버티다가 결국 뱃멀미하는 사람들 있는 쪽으로 합류했죠.

 

한번은 주일날 인근 도시 유적지를 둘러보고 성당에서 미사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사제 증명서를 안 가지고 간 바람에 모두 거절당했지요. 그래서 빨리 차를 타고 신학교로 돌아가 주일 미사를 하려고 했는데 거리가 멀어 자정이 가까이 오자 주교님이 “신부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자정 이후에 도착할 것 같아요. 휴게소에서라도 미사를 하시지요.”라고 했어요.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냥 대송으로 하지’라고 생각했는데 주교님이 주일 미사 궐하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걱정해서 결국 휴게소에 차를 세웠지요. 다행히 간소한 미사 도구가 자동차 뒷자리에 있어 아무도 없는 깜깜한 휴게소 벤치에서 미사를 드린 것은 다시는 할 수 없는 추억의 미사가 되었네요.

 

 

늘 유머가 가득 담긴 주교님의 편지

 

주교님 장례식 후에 옛 편지함을 뒤져 보니 주교님과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분명히 우편엽서에 짧게 썼을 텐데 주교님은 정갈한 글씨로 항상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편지지를 꽉 채워 보내셨어요. 편지에서도 주교님의 성실함과 꼼꼼함이 잘 드러나요. 

 

“영엽 兄님에게, 부제품을 통해 제가 고통스럽고 어려울 때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업고 계셨음에 놀랐습니다. (중략)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부러 이성적으로 마음을 꾹꾹 억눌렀습니다. 독일로 돌아오니 비로소 아버지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보고 한참을 슬픔에 잠겨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 그리고 기도 중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작년 그 시기에 허 신부님이 뷔르츠부르크에 함께 계셨던 것은 성모님이 마치 사자(使者)로 신부님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같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큰 위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학위 준비를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했어요. 공항 옆에 사니 ‘늘 준비된’ 가이드 겸 기사가 아니겠어요? 언제든 휴가를 오세요. 올여름 휴가는 꼭 산으로 가세요. 지겨운 뱃멀미 없는 물이 없는 곳으로!” 

 

주교님의 편지는 늘 유머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어요. 

 

살면서 이별을 많이 겪어 이젠 익숙할 때도 되었는데 막상 이별이 오면 언제나 슬프고 마음이 아립니다. 그리운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 하느님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주님, 주교 유경촌 티모테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1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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