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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878~1879년 천주교 박해 체험자 이 마르타의 회고를 다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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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2-30 ㅣ No.1967

[자료 소개 및 정리] 1878~1879년 천주교 박해 체험자 이 마르타의 회고를 다시 읽다

 

 

필자는 2024년 9월 30일 간행된 『교회사학』 25호에 「1860~70년대 선교사제 재입국 과정에서 조선인 신자들의 활동과 순교최지혁과 이병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 4장 2절에서 1878년 리델 주교의 체포와 석방[중국 추방], 1879년 드게트 신부의 체포와 석방[중국 추방] 사건과 관련하여 최지혁·이병교 등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치명(致命, 순교)했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1878~1879년 당시 순교자들에 대해서 관변측 자료[포도청등록]와 선교사제의 서한, 후대의 증언 기록 등을 전거로 삼았는데, 이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회고(구술) 자료도 활용했다. 1935년 당시 79세[1857년생]였던 ‘이 말다’[마르타]의 구술[아들 김중묵이 필기]을 수록한 「迫害의 前半生을 回顧함」[『가톨릭청년』 28호(1935년 9월), 82~94쪽]이 그것이다.

 

이 마르타 가족은 1878년 당시 리델 주교 체포의 여파로 포졸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의 부친과 남자 형제 2명이 끌려가 옥중에서 순교했다. 그 자신은 1879년 드게트 신부와 같이 체포되었고, 서울로 끌려간 신부·남성 신자들과 달리 다른 여성 신자들과 함께 공주 감영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80년 풀려났다. 이후 생활고와 격변기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닐 수 밖에 없었고, 1935년 당시 원산부(元山府) 명석동(銘石洞, 현재 이북에 속한 강원도 원산시 명석동)에서 아들 김중묵(金重黙, 당시 50세, 1886년생)과 함께 살다가 가톨릭청년사 주간 윤형중 신부의 부탁으로 ‘박해시기’를 겪어온 자신의 전반생을 회고했던 것이다.

 

필자는 위의 논문 4장 2절에서 1878~1879년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에 대해 이 마르타의 회고와 다른 자료를 활용하여 서술했는데, 이 마르타 회고의 중요한 내용[다른 자료와 비교·대조]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했다. 따라서 『상교우서』 115~117호(2024년 12월호~2025년 2월호)의 지면을 통해 1878~1879년 천주교 박해와 연관된 이 마르타 회고 내용을 정리·소개하였다.

 

이번 『교회사학』 27호에는 『상교우서』 소식지 3회 걸쳐 연재되었던 ‘이 마르타 회고’ 소개 내용을 종합·정리하면서 수정·보완했으며, 『가톨릭청년』에 실렸던 ‘이 마르타 회고’ 원고 전체를 현대 표기로 바꾸고 주석을 덧붙여 부록으로 소개했다.

 

[학술지 교회사학 제27호, 2025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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