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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5)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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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1-28 ㅣ No.1977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5)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


민주화 열망 감싸안은 교회, 독재에 맞서는 사회정의 보루 되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 최 신부 등 5명 구속 - 치안본부는 지난 4월 8일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과 관련, 원주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39), 방화교사범 김현장(32), 교육원 관리인 문길환(37), 치악산 서점 주인 김영애(25), 가톨릭농민회 조사부원 오상근(29) 씨 등 5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최 신부에게는 범인 은닉, 다른 4명에게는 국가보안법·범인 은닉 및 교사 혐의 등이 적용됐으며... 최 신부의 혐의 내용은 80년 5월 김현장을 22개월간 교육원에 은신시켰고, 지난 3월 19일 김현장으로부터 방화 교사 사실을 고백받고 도피 자금 50만 원을 주었으며, 3월 28일부터 4일간 문부식과 김은숙을 숨겨준 것 등이다.”(가톨릭신문 1982년 4월 18일 1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치르며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오던 한국교회는, 1982년 4월 다시 한번 전 국민적 관심의 초점이 되는 사건을 맞게 됩니다. 이는 원주교구 최기식(베네딕토) 신부가 5·18 광주와 관련돼 수배 중이던 김현장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범 문부식, 김은숙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 1982년 4월 26일 서울 주교좌명동성당에서 정의평화위원회 주관으로 최기식 신부와 구속자들을 위한 특별미사가 봉헌됐다. 미사에는 전국 180여 명의 사제들이 참석해 그들의 아픔에 동참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제5공화국과 미국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위원장 전두환)를 설치했습니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공직자 숙청, 언론 통폐합을 단행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켰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제5공화국 헌법 개정안 통과, 국회 해산, 기성 정치인 활동 금지, 관제 정당 급조 등 사전 작업을 거쳐, 1981년 2월 25일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미국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묵인함으로써 어두운 속내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나아가 5·18 이후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며 학살의 주범인 신군부를 지지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의 취임식 이전인 1981년 2월 말 그를 워싱턴으로 초청해 지지를 표했고, 1982년 4월에는 부시 부통령이,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재차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분노와 배신감, ’반미주의‘의 확산

 

무죄한 시민들의 학살을 묵인하고 그 주범인 전두환을 비호한 미국의 실체는 한국 국민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한국인을 비하하고 독재를 정당화했던 미국 고위 인사들의 망언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특히 존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의 ’들쥐 발언‘은 가장 치욕적이었습니다. 그는 1980년 8월, 미국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들쥐(lemmings)와 같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가 누구든 줄을 서서 그를 따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한국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으며,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보다 독재자를 통한 통제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폭력과 독재를 지원한 미국의 이중적인 모습은, 1980년대 내내 학생운동권이 반미 노선으로 기울게 만드는 원인이 됐습니다. 그 최초의 반미 투쟁이 광주 미 문화원 방화 사건입니다.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원들은 1980년 12월 9일 밤, 광주 미 문화원 지붕에 불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반미 감정의 확산을 우려해 방화 사실 자체를 숨기고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라고 거짓 발표를 했습니다.

 

 

성역의 침탈

 

최기식 신부의 구속을 불러온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은 광주 미 문화원 방화가 불씨가 된 것이었습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 문화원에 문부식, 김은숙 등이 불을 질렀습니다. 이들은 광주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을 묻고 반미 투쟁을 호소했습니다. 사건 후 수배 중이었던 김은숙과 문부식은 원주교구 교육원으로 최기식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이곳에는 수배 중이던 김현장이 2년 가까이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모두 교회의 주선으로 자수의 뜻을 밝혔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최 신부가 이들을 숨겨준 것을 두고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를 비호했다”며 범인 은닉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했습니다. 그리고 여론을 총동원해 방화범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으며, 천주교회와 원주교구, 가톨릭농민회 등을 국가 안보를 해치는 범죄의 온상으로 몰았습니다. 이에 교회는 최 신부의 행위가 사제의 양심에 따른 정당한 직무 수행이라고 맞섰습니다.

 

- 가톨릭신문 1982년 4월 11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는 1982년 4월 2일, 가톨릭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사제의 직분”이라며 “최 신부는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최 신부의 동료 사제들은 4월 12일 성명서를 통해 “당국의 발표와 언론 보도가 사건의 실체에 대한 진상 조사와 발표보다는 천주교 신부의 범인 은닉 문제를 확대 선전함으로써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나아가 의도적으로 천주교회를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4월 16일, 주교단은 “가톨릭교회를 불온집단의 온상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언론보도에 유감을 표시하고, “교회가 보호하던 이들의 자수를 주선해 준 최 신부의 행위는 최선의 길”임을 확신하며, “쫓기고 있던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사제들의 양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최기식 신부는 부산지법(1심)과 대구고법(2심)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성직자의 직무라 하더라도 실정법(국가보안법 등)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판시하며 종교적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83년 대법원 확정판결에서도 형법상 범인은닉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불고지죄 등)의 죄목으로 같은 형량이 확정돼 실형을 살게 됐습니다. 이후 198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고, 사면 복권됐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비록 성역과 양심의 영역이 침탈됐지만, 역사적 승리는 오히려 교회와 민주화 세력의 것이었습니다. 이제 천주교회는 사회정의와 민주화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으로 나서게 됩니다. 정치적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은 공권력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성역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1월 25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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