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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6) 북한 동포에 특별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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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2-04 ㅣ No.1980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6) 북한 동포에 특별메시지


반목 이데올로기 떨쳐 버리고, 민족 화해 위한 손길 내밀다

 

 

- 주교회의 북한선교후원회가 1991년 9월 29일 도라전망대에서 ‘평화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북한 형제들과 손잡고 미사 할 수 있길 -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겸 북한선교부 담당 김남수(안젤로) 주교는 6·25를 맞아 북한 동포들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 ‘북한의 형제들에게 하루속히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도록, 또한 우리 모두 서로 손잡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한 우리의 한 양 떼가 되어 함께 감사의 미사를 드리게 될 때까지,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라도 여러분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천명했다.”(가톨릭신문 1983년 6월 26일자 1면)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1984)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부터입니다. 주교단은 지난 200년 동안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200주년 이후 교회가 나아갈 가장 중요한 여정으로 제시하고 북한 선교 사업을 공식화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영향도 컸습니다. 공산권 국가인 폴란드 출신이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민족적 비극인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민들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가졌고, 북한 지역의 교회 상황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한국교회는 북한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교단은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새삼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교회의는 1982년 12월 12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안에 ‘북한선교부’를 공식 설치하고 김남수 주교를 담당 주교로 선출했습니다. 이듬해인 1983년 6월 10일에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6월 25일에는 담당 주교가 북한 동포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 ‘주께서 함께 계시다’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남북한의 모든 형제가 함께 감사의 미사를 드리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북한 동포와 함께 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야

 

6월 26일자 가톨릭신문은 이 역사적인 메시지 전문을 4면에 게재하고, 1면에서는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분단의 아픔을 토로하며 다시금 한 형제로 일치하고자 하는 각오를 전했습니다.

 

“북한선교부가 6·25를 앞두고 침묵의 북한교회 형제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기도회에 즈음하여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발표한 김남수 주교는, ‘같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같은 말을 하고 사는 한 형제자매인 우리가 조국 분단의 비극으로 잔혹한 비인간적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으며 특히 북한 동포들은 최고의 권리 박탈인 종교의 자유마저 잃고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동고동락하려는 마음의 자세와 어떤 희생이라도 바치려는 결의로 북한의 형제들과 모든 운명을 함께하려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김 주교는 1984년 개최 예정인 200주년 행사가 “결코 북한 동포 여러분을 소외시킨 가운데 진행될 수 없다”며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200주년을 기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1984년 11월 26일 ‘북한선교부’는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해체에 따라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되었고, 1985년 2월 16일 담당 주교에 이동호(플라치도) 아빠스가 임명됐습니다. 그해 6월 23일에는 북한선교후원회가 창립되고, 10월 13일자로 명칭이 ‘북한선교위원회’로 바뀝니다. 이후 북한선교위원회는 기도 운동을 중심으로 북한 선교 문제에 매진하게 됩니다.

 

- 가톨릭신문 1983년 6월 26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

 

이처럼 한국교회가 1980년대에 접어들며 창립 200주년에 즈음해 북한 동포와의 형제애를 강조하고 관심을 표명했지만, 사실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공산주의와 유물론은 악마의 세력이었기에 북한은 동포이기 이전에 전쟁을 통해 말살해야 할 대상이라는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에 교회는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는 수십 년간 가톨릭신문의 지면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6·25전쟁은 “양을 가장한 이리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천주교회보, 1951년 1월 14일자)으로 간주됐고, 따라서 “동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때는 이미 지났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아픔에도 아랑곳없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살을 위해서 전쟁은 계속돼야 한다며 “우리의 싸움은... 공산주의 지배 세력이 지구상에서 말살되는 날까지 계속돼야 한다”고 ‘장기전을 결의’하기까지 했습니다.(천주교회보, 1952년 6월 25일자) 분단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교회는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참조)는 평화의 의지보다는, 여전히 반공과 무력 통일 의지의 강화를 결론으로 얻은 듯했습니다.

 

전후 한국교회는 북한 지역 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불렀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침묵에 빠진 북한 지역 신앙인들의 해방과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때의 통일관은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는 ‘흡수 통일’에 가까웠습니다.

 

 

통일과 민족화해에 대한 인식의 전환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와 교회를 지배하던 모습에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뜨겁게 펼쳐진 민주화 운동, 그리고 현대 교회에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맞물리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1984년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와 그에 즈음해 성사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그리고 5년 뒤인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등입니다. 특히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 아래 열린 세계성체대회는 북한 선교와 민족 통일을 교회의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부상시켰습니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만으로는 복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자성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1995년 3월 1일 한국교회 최초로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발족하고, 북한 선교와 인도적 지원을 위한 대북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 역시 1999년 ‘민족화해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후 순차적으로 대부분의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됩니다.

 

이는 북한을 용서와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인식을 벗어나, 북한을 한 형제이자 이웃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기도와 미사, 인도적 대북 지원, 북향민의 포용 및 정착 지원 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2월 1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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