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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교회 사람들: 상습적 배교자 김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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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2-08 ㅣ No.1982

[초대교회 사람들] 상습적 배교자 김복성

 

 

다산 정약용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의 여파로 금정 찰방으로 쫓겨납니다. 정조는 다산에게 천주교 소굴로 알려진 이곳에 가서, 그곳 천주교도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배교케 함으로써 천주교에 관한 누명에서 벗어날 것을 명합니다. 7월 29일에 금정에 도착한 다산은 18일 뒤인 8월 17일에 그곳의 천주교 지도자 김복성을 체포해서 배교하겠다는 다짐장을 받습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속전속결의 기세였습니다.

 

김복성이란 이름이 낯익어 검색해 보니, 그보다 네 해 전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홍주 지역 천주교도 검거 보고서 속에 그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이때도 “관청에서 적발하였다가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라는 보고 내용이 보입니다.

 

내친 김에 《사학징의》를 검색하자 아니나 다를까 1801년 1월 25일 충청 감영에서 올린 비밀 공문에 “보령 역졸 김복성은 상놈 중 사학의 괴수이다. 중간에 달아나 상경하였는데, 작년 겨울에 금정역에서 추쇄하여 붙잡아 돌아오다가 다시 놓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뭐 이쯤 되면 그에게 배교는 아무 의미 없이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풀려나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1791년, 1795년에 두 번이나 다짐장을 쓰고 석방되었지만 1801년에도 그는 여전히 이곳 사학의 괴수(?)로 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상경하여 서대문 밖 야동(冶洞)으로 달아났습니다. 검거 기록이 없으니 그는 요행히 서울에서 도피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사학징의》에는 김복성에게 사학을 배워 유배형에 처해진 사람으로 최끝재, 이취번, 김만기 등이 나옵니다.

 

김복성의 배교는 나약함의 징표가 아니라 다분히 전략적인 것이었다는 느낌입니다. 배교를 거부하다 죽임을 당해 어렵게 쌓아올린 교회 조직이 순식간에 와해되느니,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원하는 방식으로 해주되 내 마음 속의 신앙만 굳건하다면 그들의 알량한 자비를 거꾸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같은 전략적 배교는 유독 충청도 지역에서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역 교회 지도자였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연속적 배교와도 무관치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죽음을 택하느니 잠깐의 거짓 배교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판단이 분명히 있었을 겝니다.

 

사실 그들의 이같은 판단을 무작정 비난만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테니까요. 부임한 지 보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다산 앞에 제 발로 자수한 김복성과 다산 사이에는 모종의 담합이 있었을 수 있겠다는 심증이 갑니다. 다산은 천주교도 검거의 공을 세우고, 김복성은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뒤돌아서서 신앙을 이어가 서로에게 윈윈이 되었을 테니까요. ‘나는 천주를 믿는다. 하지만 말로는 얼마든지 배교해 주마. 입의 배교가 마음의 믿음을 흔들지는 못할 테니까.’ 그들이 이렇게 신앙을 지켜갔던 그 마을에서 최양업 신부님이 태어났고, 이 일대는 초대교회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배교와 순교는 흑백의 이분법만으로는 셈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셈입니다. 더 찾아보니 김복성은 홍주 다락골 성지가 자리한 월내동에 살고 있었고, 홍낙민의 산지기 노릇도 했던 인물입니다.

 

[2026년 2월 8일(가해) 연중 제5주일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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