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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37: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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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2-09 ㅣ No.1983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7)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


공의회 정신 새롭게 다지고,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 청사진 제시

 

 

“복음화 3세기의 좌표 설정- 복음화 3세기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사목지침이 마련됐다.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 사목회의 위원회는 11월 30일과 12월 1일 서울 가톨릭의대 강당 마리아홀에서 사목회의 총회를 속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의안 등 모두 12개 사목회의 의안을 확정, 통과시키고 4년 여에 걸쳐 추진되어 온 사목회의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물론 교회 밖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목회의 의안들은 각 의제마다 과거 및 현재를 엄격히 분석, 반성하는 것으로 출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를 개선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3백년대를 향한 사목지침서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가톨릭신문 1984년 12월 9일자 1면 중에서)

 

- 1984년 12월 1일 서울 가톨릭 의대 강당 마리아홀에서 거행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폐막미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 사상 첫 전국 사목회의 개최

 

1984년은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 신학적이고 사목적으로 거대한 전환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전국 사목회의’는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인 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103위 순교자 시성식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전 세계에 알린 축제의 장이었다면, 사목회의는 내실을 다지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한국적 토양 위에 육화시키려 했던 자기 쇄신의 노력이었습니다.

 

 

시대적 징표와 교회의 과제

 

전국 사목회의는 교회의 내적 성숙을 향한 열망과 외적 사회 상황에 대한 예언자적 응답이라는 두 가지 축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둘은 ‘세상 속의 교회’라는 공의회의 가르침 안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했습니다.

 

첫째, 사목회의는 ‘한국판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선언하고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후 복구와 교세 확장에 주력하느라 공의회 정신을 연구하고 체화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1984년 선교 200주년은 공의회 정신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구현하는 기회였습니다.

 

둘째, 사목회의는 ‘민족과 사회에 열린 자세’를 핵심 기조로 설정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했습니다. 10·26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신군부의 집권은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심어주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 격차, 노동 문제, 인권 유린은 교회가 성당 울타리 안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공의회가 천명한,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해 응답해야 했습니다.

 

셋째, 양적 팽창에 대한 반성과 질적 성숙의 요구에 주목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고속 성장으로 인한 기복 신앙의 만연, 중산층화, 대형 본당의 익명성, 성직자 중심주의에 대해 성찰하고 쇄신의 요구에 부응해야 했습니다.

 

 

진행 과정과 12개 의안

 

사목회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1980년부터 4년에 걸친 준비 자체가 한국교회 전체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학교였습니다. ‘가정 성화의 해’부터 ‘교구 공동체의 해’까지 이어진 연도별 사목 지표는 쇄신을 가정과 본당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의안 작성 과정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문가 등 7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전국 교구와 단체에서 접수된 313개의 제안을 바탕으로 총 12개 영역의 의안이 마련됐습니다. 각 의안은 철저한 사회과학적 조사와 신학적 성찰을 거쳤으며, 본문 외에 구체적인 제안 사항을 첨부하여 실천력을 담보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평신도와 여성의 참여 확대, 기혼자 종신 부제직 도입, 평신도 연구기관 및 사회교리연구소 설치, 전례의 과감한 토착화 등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구체적인 미래 사목의 대안들이었습니다.

 

- 톨릭신문 1984년 12월 9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역사적 성과

 

200주년 사목회의는 제삼천년기 미래 교회의 지향점을 모색한 것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1980년대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2000년대 교회를 내다본 예언자적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미래 사목의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여성의 참여 확대, 사회교리의 중요성 강조, 소공동체 운동, 청소년사목의 전문화, 사제들의 재교육 등은 이후 30년 넘게 한국교회가 추구해 온 사목 정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둘째, 주체적 신학을 수립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서구 신학의 소비자가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신학을 생산하는 주체로 서게 됩니다. ‘민중 속의 교회’, ‘겨레와 함께하는 교회’, ‘전례의 토착화’ 등의 의제는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려는 주체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셋째, ‘시노달리타스’의 원형적 체험의 장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끌고 레오 14세 교황이 이어받은 시노드 교회의 여정이, 이미 1984년 한국교회에서 놀랍게도 선구적으로 실현됐습니다

 

 

미완의 여정과 남겨진 과제

 

그러나 이러한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실행 과정과 후대 평가는 ‘미완의 과제’ 혹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공존합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12개 의안이 정식 법규나 지침서로 공포되지 못하고, 단순한 참고 자료로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주교회의는 의안의 급진성과 이상적인 내용을 우려하여 “실천 가능한 것부터 선별적으로 수렴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의안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개혁적 활력이 훼손되었고, 평신도 종신 부제직이나 주교 선출 시 평신도 참여와 같은 획기적인 제안들은 사장되거나 장기 과제로 유보되었습니다. 공식적인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가 10년이 지난 1995년에야 발간되면서 사목회의의 열기는 식어버렸고, 사회교리연구소 설치 등 구체적인 제도의 안착도 지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목회의의 영향력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활성화된 우리말 미사 경본 개정, 가톨릭 성가 개편, 상장 예식의 정착 등은 전례 의안의 결실이며, 2000년대 각 교구 시노드의 활성화 역시 1984년의 경험을 토대로 합니다. 

 

비록 1984년의 제안들이 온전히 제도화되지는 못했지만, 성직자 독점을 넘어선 평신도의 실질적 참여,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적 연대 그리고 형식주의를 탈피한 토착화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완수해야 할 시노달리타스의 과제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2월 8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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