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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45: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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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45)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명동성당에 울려 퍼진 진실의 함성,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박종철 군 사건 진상은 조작 - 정의구현사제단은 5월 18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전(前)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문화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가 아니라, 학원문화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경장 이정오’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광주사태 7주기 추모미사’ 후 이같이 밝힌 사제단은 ▲ 조한경 경위는 반장으로서 박종철 군에 대한 신문(訊問)을 담당한 3명(황정웅, 방근곤, 이정오)에게 ‘말 안 하면 혼내주라’는 말만 하고 고문실을 나왔으며, 한 시간쯤 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박종철 군은 이미 늘어져 있었다. ▲ 강진규 경사는 1반 반원이 아니며, 강 경사가 소속된 반에서 찾고 있는 학생에 대해 박종철 군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 방에 갔을 뿐이라며 두 사람은 직접적인 고문살인의 주범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또 사제단은 ‘경찰은 당초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조 경위에게만 지휘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려 했으나, 여론의 빗발치는 진상 조사 요구에 의해 고문치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인만은 계속 조작, 조 경위와 강 경사에게 덮어씌우고 있다’며 ‘범인 조작은 1월 17일 이후 두 경찰관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최초로 이뤄지고 같은 상황하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5월 24일 1면)
다시 불붙는 민주화 운동
광주의 비극으로 시작된 1980년대,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과 교황 방한으로 주춤했으나, 1980년대 후반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과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사제단은 1985년 6월 6일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 학원 문제, 언론 자유 침해 등 시국 전반에 걸친 독재 정권의 비민주성을 질타했습니다.
국가 폭력과 공안 정국
1985년 8월, 정부는 학생운동권과 민주화 세력을 영장 없이 ‘순화 교육’ 시킬 수 있는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을 시도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를 ‘위험한 발상’이라며 명백한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8일자 1면 기사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최근 정부와 여당이 서두르는 ‘학원안정법’은 나라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하고 “학원안정법의 제정을 즉각적으로 철회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85년 하반기부터 1986년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폭증하는 등 본격적인 공안 정국이 조성됐습니다. 이 시기 국가 공권력의 타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1986년 6월 발생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었습니다. 위장 취업했다가 연행된 대학생 권인숙에게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고문을 가한 만행이었습니다.
공안 당국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가해자를 비호하며 도리어 피해자를 구속기소 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교회는 여성계, 재야 단체 등과 연대해 ‘천주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폭력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 열망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1986년 3월 9일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 시국 미사 강론을 통해 “법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간선제 헌법의 반민주성을 비판했습니다. 이어 “불의를 저지른 이들은 그 불의를 인정해야 한다”며 정권의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임기 내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간구하는 9일 기도’를 전국 각 교구에서 바치기 시작했고, 개헌 서명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탁’ 치니 ‘억’,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촉즉발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 속, 1987년 벽두, 전국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물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황당한 변명으로 박 군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박 군의 억울한 죽음에 교회는 전 국민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가톨릭신문 1987년 1월 25일자 보도에 의하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1월 19일 성명을 발표해 이 땅에서의 고문 종식을 지향으로 1월 25일 미사 봉헌과 기도회를 전국 각 본당에서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성명서는 “말단 수사관의 우연한 실책으로 이 고문이 자행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박 군의 죽음을 계기로 고문 행위의 근본적, 필연적인 원인이 밝혀져야 하고 고문 종식을 위한 민족적 결단이 이뤄지길 촉구”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주일 정오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정부 당국은 이번만은 참으로 정부와 나라 전체의 공정을 위해 사건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호도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밝힐 것”을 촉구했습니다.
진실의 폭로, 6월 항쟁의 도화선
경찰은 조한경, 강진규 두 명의 수사관만을 구속하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으나, 진실은 감옥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습니다. 구속된 두 수사관이 남부구치소 안유 보안계장 등에게 추가 범인 3명이 더 있으며 치안본부 수뇌부가 이를 은폐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안유 계장은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민련(전국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부영은 비밀 쪽지에 내용을 기록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반출시켰습니다. 재야인사 김정남을 거친 이 쪽지는 최종적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마티아) 신부와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전달됐습니다. 감옥 안의 의로운 교도관들과 민주 인사들의 목숨을 건 릴레이가 진실을 성당의 제단 위로 밀어 올린 것입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미사 직후, 김승훈 신부는 제단 위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경찰의 조작극 전모는 물론, 은폐되었던 진범 3명의 이름까지 정확히 실명으로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는 독재정권을 엄청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고, 숨어있던 진범 3인과 조작을 지휘한 박처원 치안감 등 수뇌부가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거대한 국가 폭력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시킨 이 폭로는 다가오는 6월 민주항쟁을 향한 완벽한 기폭제가 됐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4월 12일, 박영호 기자] 0 14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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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고 박종철 군 추도미사 후 참석자들이 성당 밖에서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1987년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고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대회를 마친 뒤 신자들과 시민들이 명동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신문 1987년 2월 15일 7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