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ㅣ교회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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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15-16: 샤르팡티에의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와 포르루아얄 데샹 방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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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15) 샤르팡티에의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와 포르루아얄 데샹 방문기 (상) 소박하고 절제된 선율로 은총 중심의 영성 표현
17세기 프랑스 작곡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의 음악에는 두 가지 결이 존재한다. 하나는 루이 14세 시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장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내밀하고도 영적인 교회음악을 향한 감각이다. 그 가운데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Messe pour le Port-Royal)〉는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미사는 1687년 7월 20일, 파리 포르루아얄 공동체를 위해서 작곡되었다고 추정된다. 병에서 회복된 프랑수아 드 알레 대주교를 위한 감사의 의미와, 대주교의 여동생이자 수녀원장이었던 마르가리타 드 알레의 영명 축일이 겹친 자리였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미사 구조에 있다. 입당송, 화답송, 봉헌송, 영성체송에 해당하는 부분이 두 세트로 제시되어, 상황에 따라 성 프란치스코 혹은 성 마르가리타를 축일별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오빠 프랑수아, 곧 프란치스코와 누이 마르가리타의 이름이 구조 속에 중첩된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미사가 복수의 의미와 용도를 수용하도록 짜여 있는 셈이다.
음악적 구성 역시 독특하다. 세 명의 소프라노와 여성 합창 그리고 통주저음으로 이루어진 편성은 극도로 절제되면서도 투명한 음향을 만들어낸다. 과시하지 않는 소박한 선율이 중심을 이루고, 오르간 역시 절제되어 사용된다.
https://youtu.be/YL_Sfi0yazE?si=rW7q9P7WsnMyulWJ
이 곡의 배경으로 우선 ‘얀세니즘(Jansenism)’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벨기에 지역인 이프르의 주교이자 루뱅대학교 교수였던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저작에서 출발한 신학적 흐름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을 강조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보다 하느님 은총의 절대성을 부각했다. 얀세니즘은 교회와 왕권에 의해 반복적으로 단죄·탄압되고 18세기 해체되었지만, 그 엄격한 은총 중심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잔존했다.
작품이 연결되는 지점은 흔히 떠올리는 얀세니즘의 본거지 포르루아얄 데샹(Port Royal des Champs)이 아니라, 파리 포르루아얄이다. 두 공동체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1668년 이후 다른 길을 걷는다. 즉 우리가 기억하는 ‘얀세니즘’ 이미지는 포르루아얄 데샹에 더 강하게 남아 있지만, 미사가 울려 퍼졌던 파리 포르루아얄은 왕권과 교권의 질서 속에서 일정 부분 재편된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음악에서 느껴지는 얀세니즘의 잔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 수도회와 공동체를 염두에 둔 소프라노 중심의 편성, 과장되지 않은 음색은 당시 얀세니즘이 품고 있던 방향성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제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장소로 시선을 옮긴다. 얀세니즘의 중심지 포르루아얄 데샹을 찾았던 것은 늦가을이었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도시 경계가 끊기는 지점부터 풍경은 달라진다. 길은 조용해지고, 사람의 흔적은 희미해진다. 안내 표지조차 드물고, 주변은 지나치게 고요하다. 그렇게 홀로 걷다가, 확신이 사라질 무렵 포르루아얄 데샹 국립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신문, 2026년 4월 12일,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16) 샤르팡티에의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와 포르루아얄 데샹 방문기 (하) 지금은 자취만 남은 과거 얀세니즘의 본거지
얀세니즘의 본거지, 포르루아얄 데샹 국립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프랑스의 전형적인 샤토(château), 즉 아담한 성이나 대저택 정도 크기다. 하지만 소박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성 아우구스티노에 관한 문헌과 도판들이 빼곡하다. 「신국론」, 「삼위일체론」 등 성인의 방대한 저작 중에도 유독 얀세니스트들이 집중한 저서는 「고백록」이었다. 다채롭게 진열된 「고백록」 판본들은 공동체에서 성인이 가졌던 절대적 위상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다면, 얀세니즘의 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는 오늘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 얀세니즘뿐만 아니라 현대의 변형된 ‘신(新) 얀세니즘’까지 경계하셨다. 교황께서는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에서 얀세니스트들이 인간적, 정서적, 육체적인 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지적하며, 이를 그릇된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한다.(86항) 또한 현대화된 얀세니즘이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론과 영지주의의 재연으로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음을 강조했다.(87항)
실제로 오늘날 얀세니즘은 다양한 얼굴로 분화될 수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회의, 육체를 멸시하는 영육 이원론, 선행이나 능동적 실천조차 무용하다고 여기는 냉소주의, 타자에게 배타적인 근본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현대인의 신앙 및 영성에 균열을 유발하는 독소이기도 하다.
https://youtu.be/06gh_6S87tU?si=Pb6vWy6HH0d95ks9
둘째,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와도 맞닿아 있다. 얀세니즘 특유의 엄격주의(Rigorism)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EP)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천주교회에도 간접적으로 투영되었다. 선교 사제들의 숭고하고도 투철한 의지와 청빈한 영성은 박해 시기 신앙을 지탱하는 동인이 되었으나, 초기 한국교회의 영적 기저에 다소 엄격하고도 금욕적인 정서를 남기기도 했다.
전시된 교본 등을 통해 얀세니스트들이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의 흔적도 보인다. 비록 체계적인 교육 지침서를 통해 인문·자연과학·천문학까지 아우르는 당대 예수회식 첨단 교육의 위세를 당해낼 순 없었으나, 그들은 독자적인 학업 시스템을 구축하며 인재 육성을 이어갔다. 얀세니스트들과 대립했던 예수회를 풍자하고 희화화한 그림들 앞에서는 당시 첨예했던 갈등 상황도 읽을 수 있다.
대표적 얀세니스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코너는 박물관의 백미다. 그의 초상과 저서 사이에서 「팡세」의 단장들을 떠올린다. 파스칼은 몇몇 부분에 A.P.R. 표식을 남겼는데, 이는 ‘포르루아얄에서(À Port-Royal)’의 약어로 추정된다. A.P.R.이 붙은, 그러니까 그가 포르루아얄에서 쓴 문장을 인용해 본다.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인간은 비참하기에 비참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진정 위대하다.”(라퓌마 판본 122)
1709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쇄되고 파괴된 포르루아얄 데샹. 박물관을 나와 옛 수도원 터를 둘러보니 덩그러니 남은 채마밭만이 과거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오후 1시 반에 입장해 폐관 시간까지 방문자는 나 혼자였다.
방문일이 월요일임을 고려하더라도 이토록 적막할 수 있을까. 하기야 요즘 얀세니즘에 누가 깊은 관심을 두겠는가. 하지만 샤르팡티에가 남긴 미사곡 선율처럼, 그 열렬한 영성의 뿌리는 포르루아얄 폐허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톨릭신문, 2026년 4월 19일,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0 9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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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화가 필리프 드 샹파뉴가 그린 〈1662년 봉헌화(Ex-Voto de 1662)〉. 왼쪽에는 포르루아얄 데샹의 원장 아녜스 아르노, 오른쪽은 화가의 딸이자 수녀였던 카트린을 그렸다. 샹파뉴는 대표적인 얀세니스트 화가이며 은총을 통한 기적적인 치유 사건을 수녀원장을 비추는 ‘빛줄기’를 통해 묘사했다. 위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