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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46: 6월 항쟁, 그 위대한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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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46) 6월 항쟁, 그 위대한 승리 고비마다 등불 됐던 한국교회, 시대 아픔 보듬고 민주화 결실 맺다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온 명동성당 농성 시위 사태가 6월 15일, 농성 중인 학생, 시민들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사태 발생 6일 만에 극적으로 일단락됐다. 이번 농성 시위에서 극적인 해산 결정이 나오기까지 사제단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11일 경찰이 명동성당 구내에 최루탄을 다량 발사한 데 항의, 명동본당 주임 김병도 신부가 사제들을 소집함으로써 이날 오후 처음 자리를 같이한 서울대교구 사제들은 12일,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하고 오후 8시 농성학생, 시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으며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기도회를 갖는 등 ‘함께한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자 11면)
임계치에 도달한 분노
1987년 5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제단의 폭로 이전에 전두환 정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패착을 둔 상태였습니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그것입니다.
이는 일체의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고 ‘체육관 선거’로 불린 간선제 헌법 체제를 유지해 군부독재를 영구화하겠다는 선전포고였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 12명은 4월 21일 오후 7시부터 가톨릭센터 6층 소성당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4·13 특별담화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말살시켰다’고 말하고...”(가톨릭신문 1987년 4월 26일자 11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참상을 담은 ‘5·18 사진전’을 광주와 부산 등지에서 개최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참혹한 증거들이 시민들에게 공개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태생적 불법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폭로됐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다
사제단의 고문 조작 폭로와 단식, 5·18 사진전 등으로 촉발된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는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범국민적 연대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공식 발족했습니다. 이어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 5일 끝내 숨을 거둔 이한열의 피격 장면은 외신과 국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박종철의 죽음과 겹치며 분노는 마침내 폭발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권은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의 후계자를 내세우는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같은 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됐습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6월 민주항쟁’이 막을 올렸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발생한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이어집니다.
명동성당, 6일간의 해방구
명동성당 농성의 발단은 학생운동 단체의 기획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6.10 국민대회에 참가하려던 대학생 500여 명이 경찰에 쫓겨 성당 구내로 들어옴으로써 시위가 시작됐고, 성당 구내에 있던 상계동 철거민과 시민 100여 명이 가세, 600여 명이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11일 오전 시위대가 중앙극장 쪽 골목, 로얄호텔 쪽 골목, 판넬골목 등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 3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으며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등 강력히 저항했다.”(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 자 11면)
당시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이었던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22년 6월 22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처음 학생들로부터 ‘해방구’란 말을 들었다”며 “성당은 본디 해방구이니 절묘한 은유법이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나를 밟고 가라”
정부는 비상계엄 선포나 경찰력 투입을 검토했습니다.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성당 측은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재가를 얻어 11일 밤 사제 50명을 소집해 철야 농성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 농성의 과정에서 비폭력의 도덕적, 영적 권위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사제와 수녀들이 위태로운 순간마다 농성대와 경찰 사이 최전방 대치선으로 나아갔습니다.
13일 새벽, 무력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전날인 12일 저녁, 공권력 투입을 통보하던 정부 고위 당국자를 향해 김 추기경은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당신을 보낸 사람에게 가서 내 말을 한 자도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해주시오. 공권력이 투입되면 내가 맨 앞에 누울 테니 나를 밟고 넘어가시오. 그다음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오. 그들을 모두 밟고 넘어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독재정권의 폭력적 공권력을 완전히 압도하는 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쟁취한 민주주의
성당 내부의 결사 항전은 담장 너머 시민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고립과는 달리, 1987년의 명동은 수많은 목격자와 지지자를 양산했고 도심 한복판이 거대한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해방의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6월 15일,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의 끈질긴 설득 그리고 극단적인 유혈사태를 피하려는 정부의 부분적인 양보로 명동성당 농성대는 자진 해산했습니다. 농성은 끝났지만, 투쟁의 무대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항쟁의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고, 정권은 1980년 광주에서처럼 폭력 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범국민적인 저항의 불씨가 전국을 휘감았고, 국제사회의 압박, 특히 전두환 정권의 군 투입 불가와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의 뜻이 전달됐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있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의원은 이른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즉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그 골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전면 수용을 비롯한 8개 항의 민주화 조치였습니다. 7월 1일 전두환이 이 수습안을 공식 수용함으로써 국민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주권을 되찾게 됐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된 진실의 씨앗이 6개월간의 혹독한 겨울과 투쟁의 봄을 거쳐, 마침내 6·29라는 민주주의의 결실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여정의 한가운데, 한국 천주교회가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4월 19일, 박영호 기자] 0 8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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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10~15일 명동성당에서 이어진 농성 시위는 일회성 시위를 넘어 6.29선언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시위대가 명동성당 구내에서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신문 1987년 6월 21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1987년 6월 10~15일 명동성당에서 이어진 농성 시위는 일회성 시위를 넘어 6.29선언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사제와 수녀들은 일촉즉발의 위기 순간마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최전방 대치 전선으로 나아갔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