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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어떤, 교회: 관계, 시노달리타스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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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3-22 ㅣ No.805

 

[어떤, 교회] 어떤, 교회

 

 

관계, 시노달리타스의 정신

 

한국에서는 미지근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세계교회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라는 주제가 뜨겁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교회론뿐만 아니라 성사론, 종교 간 대화, 사회교리, 교회법 등 여러 분야와 연결될 수 있는 주제가 시노달리타스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을 ‘공동합의성’이라고 번역을 했었는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쓰기로 결정합니다. 공동합의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을 주교님들만 공동으로 모여 합의를 보았고, 평신도(신학자) 및 수도자, 일반 사제들은 그 결정에서 큰 영향을 줄 수 없었죠. 주교님들은 아래의 이유로 시노달리타스를 글자 그대로 쓰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공동합의성’으로 번역해 온 ‘Synodalitas’의 우리말 번역에 대해 논의하였다. ‘Synodalitas’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을 위해 모든 하느님 백성이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경청하며 논의하는 여정의 구조와 정신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공동합의성’, ‘공동 식별 여정’, ‘함께 가기’, ‘동반 여정’ 등 한 단어로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 여정이라는 ‘Synodalitas’의 핵심적인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하였다. 이에 라틴어 발음대로 ‘시노달리타스’로 사용하도록 하였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회보, 2021년 12월호)

 

하느님 백성의 공동 여정이라는 핵심적인 의미가 중요한데, 다른 어떤 말도 그 핵심을 담을 수 없기에 발음 그대로 사용하자는 게 주교님들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결정을 내린 후 만 3년을 향해 가는 시점에 한국 교회는 이것을 풀이하고 이 핵심에 교우들이 다가갈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백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교회법적으로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로 구분하죠. 우리는 이것이 신분의 높고 낮음,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겠죠. 하느님 백성은 구원을 향해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다. 성직자가 평신도를 구원시켜 주고, 수도자가 홀로 도를 닦아 구원에 이르고,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하며 사업체처럼 본당을 운영해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가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그때의 나는 다소 희망에 찬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그 단어를 떠올렸던 이유는 실은 지원과 내가 서로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는 증거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들이었던 게 아니라 마침 구원이 필요했던 두 사람이었을 뿐이라고.”(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하느님의 백성은 어떠한 식으로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교회 안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 모임에는 시노달리타스라는 정신이 중심입니다. 라틴 계열의 언어와는 동떨어진 말을 사용하고,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 말의 의미가 깊이 와닿지 않지만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관계의 체계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로 구성되어 있고, 관계를 지탱하는 요소는 감정과 기억, 진심과 태도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교회 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고 겪으며 무언가를 배우고 맞춰 나가는데, 관계는 기본적으로 오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해 보지만 각자 자기만의 방식과 개성으로 오해를 하면서 관계는 진전되어 나가지요. 특히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기대하는 것들이 있기에 더 자주 오해가 생기겠죠. 상대방이 내가 기대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오해로 엮이기도 합니다. 지금 교회는 서로 간의 여러 오해로 갈등을 겪고 있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시노드라는 대화의 장을 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는 조직 구조의 체계와 결정 방식의 변화만으로 풀리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감정과 태도와 인식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기대와 권위도 잠시 내려놓고 서로의 관계 안에서 무엇을 바라보며 맞춰 나가야 하는지 섬세하게 고민할 수 있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 여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월간빛, 2024년 2월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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