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강론자료

2024-03-17.....사순 제5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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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4-03-16 ㅣ No.2437

                                    사순 제5주일 (나해)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 5,7-9     요한 12,20-33

2024. 3. 17.

주제 :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가 많은 것을 바르게 판단하고 실천한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가 말하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꿈은 저만치 앞서서 가고, 현실은 뒤따라가다가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엎어지는 경험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삶에서 좋게 생각하고, 여러 차례 다짐한다고 해도 그 생각대로 온전하게 사는 일은 어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 왜 그렇게 됐는지 그 사정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에서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이기에 불완전하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사람이 자만심을 드러내서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기에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벌을 불러들였으며, 그 결과로 히브리 민족이 세운 나라는 분열됐고 북쪽 왕국이 멸망했으며, 유배라는 상황에 빠졌다는 것이 사람들이 만든 삶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히브리 민족이 맞이한 현실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민족의 미래에 실현될 좋은 모습을 다시 예고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의 선언과 약속은 히브리 민족의 후손들과 다시 맺으실 계약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계약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표현입니다. ,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가 실천한 만큼 하느님에게서 선물을 얻을 수 있고, 그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싫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멀리하고 도망친 그만큼 삶에는 힘겨운 일이 생긴다는 것이 계약의 의미입니다. 애석한 일은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들은 복음에는 그리스 사람들 몇 명이 필립보와 안드레아 사도를 통하여,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한 일에,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진정으로 다가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시는 이야기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이 세상의 삶에서 실천할 일을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하신 선언에 하늘도 호응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천둥이 울렸다는 소리로 듣습니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가 내가 드러내는 참된 가치를 알아준다면, 행복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기쁨이라도 있어야, 다른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힘든 일을 기꺼이 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고, 내가 세상에서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드러내는 모습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놀라운 소리를 들으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감동하시거나 사람들의 환호를 기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일과는 그 일의 너머에 있는 참된 모습을 보신다는 뜻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들의 바람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한 몫을 얻으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삶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다른 사람의 앞에서 뻐기고 싶고 자기를 높일 방법이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한다고 할 것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도 않으셨다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적용할 원칙과 기준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원칙과 기준이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 내 모습을 정확하게 보는 일입니다.

 

국가든지 교회이든지 한 공동체가 모양을 갖추고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한 가지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좋은 것을 드러내고 그에 관한 설명한다고 잘한다고 해서 모두 한 마음과 생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에서 들은 것처럼, 하느님이 애절하게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긴장할까요?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실 때, 사람이 바뀔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찾아온 민족의 유배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음에 새길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돌판에 새긴 십계명의 법을 극복한다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마음과 생각을 열고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충실하게 이해하려는지는 해결하려는 일은 커다란 숙제입니다.

 

하느님, 마음과 생각을 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실천하려는 신앙인을 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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