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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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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10 ㅣ No.1876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 (1)

 

 

영역 지키기

 

유럽의 한 동물원에 천산갑이라는 동물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을 수입해 왔으니 극진히 보살핀 것은 당연했지요. 먹이와 물을 충분히 주고 우리도 청결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천산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체로 발견되고 맙니다. 부검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심한 탈수로 죽었다는 겁니다. 물을 안 준 것도 아닌데 왜 탈수 현상을 일으켰을까요? 답은 천산갑의 영역 표시 본능이 대단히 강한 것에 있었습니다. 천산갑은 오줌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데, 동물원 측에서는 귀한 동물이 오줌을 눌 때마다 바로바로 청소를 해 버렸던 거죠. 온몸의 수분을 짜내서 필사적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려던 천산갑은 결국 탈수로 죽었습니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입니다.

 

인간도 생물인지라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비어 있는 다른 자리를 두고 하필이면 내 옆에 낯선 사람이 앉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영역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영역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내 영역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 것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굳은 마음은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면을 가려 버리고, 남을 막으려고 세운 장벽에 도리어 자기를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회칙 「모든 형제들」 4장에서 말씀하시는 난민 문제, 더 넓게는 이주민 문제가 그런 예입니다.

 

 

난민 문제에 대한 대응

 

통계청이 제공하는 통계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은 2,635만 명에 이릅니다. 원래 난민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현상이어서 우리나라와는 크게 관계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반도 역시 단일 민족 국가라는 통념과 달리 다양한 민족이 섞이고 흥망성쇠를 겪었던 공간입니다만, 최근까지 대다수 사람들은 단일 민족, 단일 문화라는 정체성을 받아 들이고 있었지요. 외국인을 볼 일도 그만큼 적었습니다.

 

그런데 세계화와 기후 변화 때문에 살 길을 찾아 고국을 떠나 새 거주지를 찾는 발길이 대폭 늘어나면서 난민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또 한국이 문제 해결에 기여할 능력과 위상을 가지면서 난민 문제를 더이상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난민을 받아들이던 국가들이 빗장을 잠그고 있는 추세라서 대신 우리나라를 향하는 이들도 늘어납니다. 미국은 감염병 사태 속에 연방 공중 보건법(Title 42)을 통해 난민을 막고 있고, 유럽도 역내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던 솅겐 조약을 수정하고 아프리카 인접국에 지원금을 주면서 난민 유입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에 맞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일정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압력도 높아집니다.

 

 

우리나라의 난민 대응

 

지금껏 우리나라는 난민 수용을 몹시 억제해 왔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매년 1조원 가량을 공여하는 나라로 돌아섰고,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우리나라 난민법 2조 1항은 ‘난민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이하 “상주국”이라 한다.)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난민법이 근본적으로 난민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는 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법의 보호를 받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통계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21년 11월까지 누적 난민 인정 신청 건수는 73,185건이며, 누적 난민 인정 건수 1,141건, 인도적 체류자 인정 건수 2,409건으로 전체 난민 인정 비율 평균은 2.8%에 불과합니다. 2021년 경우에는 난민 인정 비율이 0.7%로 더 떨어지지요. 유럽이 난민 수용을 꺼리면서도 41%에 육박하는 1차 난민 인정 비율을 보이는 것에 비하면 매우 박한 처사입니다. 지난 2018년 예멘 난민 사건을 계기로 난민 수용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대구 북구의 이슬람 사원 신축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자기 영역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거나 인권의식이 빈약하다고 폄훼할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에 대한 문제면서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빛 안에서 진지하게 성찰해보고 사려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삶의 무상성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선 난민이나 이주민들에 대해서 공리주의적인 태도로만 판단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 지적하십니다. 외부인들이 우리 지역에 들어오게 될 때 어떤 득과 실이 있는지만 따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 입니다. 그보다는 삶의 무상성에 대해서 깊이 성찰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무상성은 개인적 이득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다만 그 자체로 좋은 것이기에 어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상성은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방인을 환대 하도록 합니다.”(「모든 형제들」, 139항)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 해 가면서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될 때 공청하다 혹은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공정함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이면서 함께 추구 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인간적인 공정함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또 다른 측면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거저 받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성취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명 자체를 발생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 생명이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또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우리 모두에게는 결코 셈할 수 없고 대가를 정확하게 치를 수 없는 은총이 개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마태 5,45) 내 생명, 내 삶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신 선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관계를 상거래 하듯 따지고 드는 좁은 시야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넘어 보편적인 형제애로 고양될 수 있는 것도 이 무상성을 깊이 깨닫고 행동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한번을 안 지려는’ 타산적인 태도가 횡행하고, 양보와 희생을 경원시하는 삭막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과 내가 셈을 치를 수도 없는 수많은 호의와 도움은 생각지도 않고 매사에 득실을 따지는 까탈스러움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삶의 무상성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먼저 짚어봐야 할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토대로 다음 호에서는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월간빛, 2022년 8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 (2)

 

 

다른 나라에는 왜 어른이 없을까?

 

말 습관이 잘못 든 것 같습니다. 한 두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점잖은 분, 다른 문화에 익숙한 분들도 그렇게 합니다. 외국인을 지칭할 때 미국 ‘애’들은 어떻고, 유럽 ‘애’들은 어떻고, 일본 ‘애’들은 어떻다고 합니다. 외국인이 죄다 미성년자는 아닐 텐데 무턱대고 애들입니다. 외국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모조리 ‘놈’으로 부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미국놈, 중국놈, 양놈, 여기에 더한 멸칭을 붙이는 경우도 왕왕 있지요. 한국 사람이면 적어도 ‘씨’나 ‘님’ 같은 호칭을 붙여서 부를 텐데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무시하고 외국인이라면 그냥 이름만 부릅니다. 물론 대다수는 말을 그렇게 할 뿐이지,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우리 사회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것은 소중한데…

 

몇 년 전부터 ‘국뽕’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심심찮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자아도취적인 ‘우리’ 찬양을 일컫는 말입니다. 세계가 한국을 우러러 본다며 집단적 자부심을 한껏 차오르게 하는 ‘국뽕’ 유튜버들은 대체로 비슷한 어휘를 남발합니다. 밥상 위에 반찬 개수부터 시작해서 온갖 신뢰 하기 힘든 자료까지 내세우며 충격, 공포, 화들짝, 경악, 난리, 믿을 수 없다 같은 수식어들을 붙입니다. 한국이 무엇을 생산하면 전 세계가 충격과 공표 속에 벌벌 떨거나 화들짝 놀라거나 경악하며 난리가 난답니다. 일본이 당황하고 중국이 피눈물을 흘린다는 언급은 양념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민족이고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강변하는 이런 현상은 타국이나 타민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심리와 결합될 때 독일의 나치즘 같은 전체 주의,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다분합니다.

 

 

보편적 지평

 

“자기 민족과 문화에 대한 건강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지역적’ 나르시시즘”을 경고하면서 “그 이면에는 다른 이들에 대한 어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기 보호를 위한 방어벽 쌓기를 선호하는 폐쇄적인 정신이 숨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보편적인 것에 진정으로 열려져 있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다른 문화의 풍요로움에 열려 있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겪는 비극에 대한 연대 의식이 없으면, 건강한 방식으로 ‘지역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역적 나르시시즘’은 제한된 사고와 관습과 안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46항)

 

겁먹은 개가 크게 짖고 빈 깡통이 요란하듯 건강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데 실패하고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일수록 허세를 부리거나 이유 없는 우월감이나 열패감에 휩싸이기 마련이지요. 유달리 사치품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표출되는 우리나라지만 공정무역 같은 큰 흐름에서는 비껴나 있습니다. 공정무역은 ‘대화와 투명성, 존중에 기초해 국제무역에서 좀 더 공평한 관계를 추구하는 거래 기반의 파트너십’이라고 정의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가격이 4~5천 원쯤 하면 그 커피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3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윤 추구 외에 어떠한 윤리적 고려도 하지 않는 가격 결정 과정 때문인데, 공정무역은 여기에 개입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고 유통과정을 투명화해서 신뢰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세계적인 운동을 말합니다. 세계무역기구에 따르면 한국은 무역 규모면에서 세계 8위에 해당하는 무역대국이지만 공정무역 시장은 전체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도 작은 수준입니다.

 

또 다른 예를 볼까요. 과도한 소비주의와 폐쇄주의에 갇힌 시선은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 다른 문화와 맺는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산한 물건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한다는 뉴스는 우리나라가 2019년 기준 세계 8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이며 탄소 다배출 제조업 국가(맥킨지글로벌연구소)라는 사실을 가려 버립니다.

 

오직 재물에만 혈안이 되고 재물을 얻는 과정이나 분배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주위의 빈축을 사듯 돈푼깨나 있다고 없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국가나 민족이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이 돈이라도 있어야 대접받을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처럼, 민족과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협력과 우애 대신에 돈으로 판단하고 돈에 의지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널리 번져 있습니다.

 

 

인종 편견과 인종 차별행위

 

돈 때문에 사람 보기를 우습게 아는 현상, 달리 말해 돈에 눈이 먼 세태는 한국 사회가 외국인들을 맞아들이는데 있어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사회든지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이 없을 수는 없지만 한국은 교육 수준이나 소득 수준을 고려했을 때 특이하게도 인종 편견이 매우 심한 국가입니다.(2013년 워싱턴포스트 세계 가치관 조사 참조)

 

2019년 대구교육대학교 배상식 교수의 논문은 생물학적-유전학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 사회적-역사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 종교적-문화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과 함께 이른바 ‘GNP 인종주의’를 언급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국가출신의 사람들에 대해 인종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황인종, 비슷한 유전적 특성을 가지는 동남아, 몽골, 중국 출신에 대해서 인종 차별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소득이 낮기 때문입니다. 또 백인이지만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처럼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낮은 국가출신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같은 민족인 조선족이나 고려인 후손, 북한 이탈주민에 대해서 심한 편견과 차별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사를 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심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의 가치

 

“세계를 향한 타당하고 참된 개방은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한 가족 안에서 자신의 이웃을 향하여 열려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이웃 민족들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에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를 촉진하는 교육 과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모든 형제들」, 151항)

 

우리가 외국인,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돈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은 평소 한국 사회 안에서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형제들」 151항이 말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참된 개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살고 있는 외국인의 숫자가 250만을 헤아립니다. 대구 인구에 필적하는 이 이웃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이웃, 그들은 우리를 차별과 고립의 울타리로부터 풀어주는 고마운 이들입니다. [월간빛, 2022년 9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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