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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50: 사학 매파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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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10 ㅣ No.137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0) 사학 매파 3인방


사학 매파, 이집 저집 다니며 교리 가르치고 교회 허리 역할

 

 

- 옥에 갇힌 사학 매파 정복혜 간지대. 탁희성 화백 그림.

 

 

교회의 허리

 

「사학징의」의 공초 기록 속에서 사학(邪學) 매파(媒婆)로 일컬어진 사람이 셋 있다. 복자 정복혜 간지대(칸디다)와 복자 김연이 율리아나, 비녀 윤복점 레지나가 그들이다. 정복혜는 4월 2일에 처형되었고, 김연이는 5월 22일에 처형되었으며, 여종 윤복점은 배교로 목숨을 건져 5월 18일에 영해(寧海)로 유배 갔다.

 

「사학징의」 중 비녀 윤복점의 형추문목(刑推問目)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너는 본시 사학의 매파(媒婆)로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들락거리며 속여서 꾄 것이 이미 여러 해이고, 다닌 곳이 몇 군데나 되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사학 노파로 여러 곳을 두루 다닌 자로 간지대(干之臺)와 김연이(金連伊) 같은 이가 또한 많다.”

 

이로 보아 사학 매파는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여러 집을 들락거리며 포교하는 역할이었다. 윤복점뿐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사학 매파로 정복혜와 김연이가 소문이 났고, 그 밖에도 적잖은 사학 매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파(婆)는 일반적으로 40, 50대 중년 부인의 호칭이고, 60대를 넘어가면 노파라 했다. 매파란 사학을 매개하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그녀들은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포교 활동과 교리서 및 성물 보급, 그리고 연락책의 역할을 맡았다.

 

거점 역할을 한 강완숙이나 정광수의 부인 윤운혜를 두고는 매파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신유박해 당시 41세였던 강완숙은 강파(姜婆)라고만 했지, 매파의 호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윤운혜는 자신의 공초에서 “간지대는 사학을 하는 매파”라고 했는데, 매파란 호칭은 지체가 낮은 여인에 한정되는 느낌이 있다. 또 같은 심부름을 해도 강완숙의 여종 소명이나 남판서댁 여종 구월(九月) 등 다른 여인들에게는 매파의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매파는 교리교육이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파는 지도자급과 개별 신자를 연결하는 중간 역할이었다. 그녀들은 교회의 허리를 든든히 받쳐주는 존재여서 교회 내의 비중이 결코 낮지 않았고, 교회 내부의 핵심 정보를 두루 꿰고 있었다.

 

세 사람 중 비녀 윤복점의 경우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김연이와 정복혜는 형집행자 명단에만 한 차례씩 나오고, 누구인지 모른다고 썼다. 이들은 모두 주문모 신부에게 배워 세례를 받았고, 교회 일에 심부름꾼 노릇을 했으며, 추적받는 교우들을 피신시키고, 상본과 책을 비롯해 천주교 관련 물품을 숨겨둔 죄였다고만 적었다. 달레가 집필 당시 「사학징의」를 보지 못해 생긴 일이다.

 

세 사람의 신분은 정복혜와 김연이는 양인이었고, 윤복점은 사노비였다. 나이는 정복혜와 김연이가 대략 50, 60대였다면, 윤복점은 60대 후반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학징의」 중 윤복점 공초 기록의 제사(題辭)에 “나이가 이미 늙어 해독을 끼칠 날이 얼마 없다”는 언급이 남아 있어 그리 짐작해둔다. 윤복점은 사학 매파 중에 몰지각하고 안면이 가장 넓다는 평을 받았지만, 첫 공초부터 배교하겠다고 하면서 요긴한 정보를 술술 불었으므로, 사형을 면하고 귀양에 그쳤다.

 

궁녀들과 묵주신공을 바치고 있는 김연이 율리아나. 탁희성 화백 그림.

 

 

겹치는 동선과 폐궁 전담 김연이

 

세 사람의 동선을 보면 정복혜는 강완숙, 이합규, 한신애, 정광수, 이기양의 집과 접촉이 잦았다. 김연이는 강완숙, 한신애, 이기양의 집과 폐궁에 자주 출입했다고 했으니, 정복혜의 동선과 거의 일치한다. 여종 윤복점은 이윤하, 이가환, 박생원, 이기양, 한신애, 정재록, 남판서의 집안과 왕래가 잦았다고 진술했다. 정복혜는 산림동(山林洞)에 살았고, 김연이는 계동(桂洞) 용호영 안, 윤복점은 남대문 밖에 살았다.

 

세 사람 모두 강완숙, 한신애, 이기양의 집안을 공통적으로 출입했고, 그밖에 왕래한 집안의 면면으로 보아, 이들은 당시 교회 수뇌부나 명망가의 내실을 드나들면서 그 집안 부녀자들에게 교사로서 교리를 교육하고, 교회 소식 및 교리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정복혜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김연이와 비녀 윤복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공초에 따르면 김연이는 한신애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다. 형추문목에서 “너는 사학 중의 매파로 상하할 것 없이 종적이 두루 미쳐, 심지어 폐궁 나인과도 어지러이 수작하였다”고 했다. 그녀는 강완숙과 한신애, 그리고 이기양의 집을 빈번하게 출입했고, 정광수, 홍필주, 최필제, 이합규, 윤현, 김백심 등 당시 교회의 핵심 그룹들과 자주 왕래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 복인(福仁)과 함께 계동의 용호영 안쪽에 살았으므로 흔히 용호영 노파로 불렸다. 지금 계동 현대빌딩 인근이다.

 

김연이는 주로 강완숙의 지시를 받아 그때그때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일을 처리했다. 김연이는 특별히 은언군 이인(李)의 부인 송 마리아와 은언군의 아들 이담(李湛)의 처 신 마리아가 살고 있던 양제궁(良宮)과 관련된 일을 전담했던 듯하다. 일종의 VIP 담당이었다. 공초 기록 중에 “폐궁과 교통하였고, 강완숙에게 소개하여 그로 하여금 주문모가 강론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라거나, “폐궁과 교통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염되게 하였습니다”라고 한 진술로 보아, 은언군 부인과 며느리를 주문모 신부에게로 이끈 것은 김연이였다.

 

김연이는 수시로 폐궁을 들락거리면서 그곳 나인들이 만든 수놓은 베개를 찾아온다는 핑계로 연락을 취했고, 폐궁 나인 강경복, 서경의와 함께 강완숙의 집에서 사서를 강학한 일도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집전한 미사 첨례에도 그녀는 늘 참여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김연이의 딸 복인은 1800년 12월에 잠깐이지만 폐궁의 나인이 되어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 등 교회 지도부에 의해 차세대 지도자로 낙점되어 주목받고 있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강완숙의 주선으로 용호영 안 김연이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강완숙의 지시에 따라 이합규와 김계완(김백심)이 잇따라 그 집으로 찾아왔다. 초기 며칠 간 교계 핵심 인물들에게 그녀가 은신처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녀는 1801년 5월 22일에 강완숙, 한신애, 최인철, 김현우, 강경복, 문영인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비녀 윤복점

 

윤복점(尹福占)은 성을 뗀 채 이름으로만 불렀고, 복금(卜今)으로도 불렸다. 그녀는 주동(鑄洞: 중구 주자동) 권생원 댁의 외거 노비였다. 권생원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세례명 윤아(閏阿)가 성녀 레지나를 가리킴은 앞선 글에서 말했다. 그는 남대문 밖 이통진(李通津) 댁 사랑채에 기거했다. 이후 남편을 잃은 그녀는 이동(履洞: 중구 을지로 3가 일대) 심진사 댁 행랑채로 거처를 옮겼다가, 1799년 남대문 내창(內倉) 앞에 사는 손만호(孫萬戶)의 첩에게서 서학을 처음 배웠다고 했다. 이는 죄를 가볍게 하려는 거짓말로 그녀의 입교는 그보다 훨씬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윤복점은 이후 강완숙의 집을 자주 왕래했고, 생계의 방편은 베갯모에 수를 놓아 그것을 팔아 마련했다. 그녀의 진술대로라면 남대문 밖 이통진의 집 사랑채에 살 때,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홍문갑의 집을 왕래하면서 수침(繡枕), 즉 수놓은 베개를 내다 팔아 먹거리가 여유롭게 되었다”고 했다. 베개를 팔기 위해 홍문갑의 집을 들락거릴 때, 강완숙이 서학을 믿으면 “죽은 뒤에 마땅히 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므로 그 말에 혹해 천주경을 익히게 되었다고 했다.

 

막상 그녀의 강론 장소는 서울 전역에 걸친 전방위적 규모였다. 한남동 이윤하의 집과 정동 이가환의 집, 이가환의 동서인 피난동 박생원 집, 확교 이기양의 집, 수구문 안 조시종의 집, 도저동 정재록의 집, 그리고 냉정동 남판서 집 외에도 대사동 홍문갑의 집, 사창동의 여염집, 아현의 황사영 집, 산림동 윤춘선 어미가 사는 집, 벽동 정광수의 집, 전동 홍익만의 집에 이르기까지 사학 매파 중 보폭이 가장 넓었다. 그것이 공초 기록에서 “안면이 넓고 종적이 비밀스럽기로는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된 이유다. 윤복점은 아녀자들에게 교리를 전달하는 능력이 대단히 특출했던 듯하다. 여기에 유모의 일로 이기양과 이가환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진술이 남은 것으로 보아, 윤복점은 이들 집안에 유모를 소개하거나 집안의 대소사와 관련된 일까지 챙기면서 이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던 듯하다.

 

정복혜, 김연이, 윤복점은 맡았던 역할이 조금씩 달랐다. 정복혜는 교리서 보급 쪽에 비중이 있었고, 김연이는 폐궁 쪽 전담, 그리고 윤복점은 전 구역을 망라해 교리 교육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도 「사학징의」에는 사학 노파로 보이는 여성들의 존재가 여럿 더 포착된다. 냉정동 남판서 댁 여종 구월(九月)이나 동의(童義) 어미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구체적 기록이 남지 않아 아쉽다. 특별히 냉정동 남판서 댁은 「사학징의」에 여러 번 거명되었지만, 이제껏 그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겠다. 그 집안이 천주교 신자 집안이었는지, 아니면 여종 구월만 신앙을 가졌던 것인지조차 자료가 없어 더 살필 수가 없다. 정복혜와 김연이는 모녀가 함께 활동했다.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이 가족 단위로 움직였다. 그간 교회사 연구에서 기층에서 활동하다 이름 없이 스러진 하층민들의 신앙과 역할에 대해 조금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9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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