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0일 (금)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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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다시 마주하는 성교요리문답1: 첫 공식 교리서 성교요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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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26 ㅣ No.1496

다시 마주하는 『성교요리문답』 (1) 첫 공식 교리서 『성교요리문답』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공식 교리서이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정리 · 번역되어 1864년 서울의 목판 인쇄소에서 초판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성사’에 관한 네 가지 근본 교리를 담고 있다. 이는 모진 박해와 순교로 가득한 은총의 시기부터 믿음으로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은 후, 일제의 탄압이 야기되는 70년 동안(1864~1934년)1) 복음의 씨앗으로 사용되었다. 한국교회가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신자들의 신심을 고취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목했던 선교사들의 서한과 여러 문서를 통해 『성교요리문답』과 다시 마주하고자 한다.

 

 

성사,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표지

 

필자는 작년 12월에 결혼해 1월의 칼바람을 제치고 따뜻하게 보내고 있는 신혼이다. 우리 부부는 혼인성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순종과 사랑으로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하느님의 은총이 가시적인 표지로 드러나는 ‘성사’로써 약속한 것이다. 이렇듯 성사는 인간의 탄생, 성장, 결혼, 죽음과 같은 삶의 중요한 순간에 세례, 성체,

견진, 혼인, 병사성사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실현의 행동으로 이끈다.

 

구세사(救世史)의 정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기에(히브 1,1-2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사다. 그리고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성사성을 전해 받아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받은 것을 계속 전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천주교회는 특별하고도 독특한 계시(啓示)를 받았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의 세례로써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공동체”2)가 되었다. 이에 한국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의 가시적 표지인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 다시 말해 이승훈의 세례는 서학서의 학문적 가르침을 뛰어넘어 신앙으로의 전환을 이루며 한국천주교회에 성령이 강림하신 첫 시작이었다.

 

복음 선포 후 신자들의 수가 증가한 이유 중 하나는 체계적인 성사 예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사적 예식의 거행을 통해 세례를 받은 모든 이는 신앙생활을 통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실현되었던 가성직제도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올바른 제도가 아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초기 지도자급 신자들은 성사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합당한 집전자가 교회 예식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장 북경교구장 구베아(A.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에게 우리의 상황을 고하며 사제를 요청한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를 통해 그리스도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타나신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 땅에서 복음이 선포된 후 직접 사제를 모시게 되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구원을 제시하시고, 신앙의 선조들은 이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훈의 세례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라는 눈으로 드러나는 표지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앙과 성사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연대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된 이후 우리 신앙 선조들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순교’로서 고귀하게 보답하였고, 많은 이들은 이를 본보기 삼아 신앙을 굳건히 지켜갔다. 신자들은 일찍이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교리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된 박해로 견딜 수 없었던 신자들은 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신앙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들은 필사(筆寫)로 보급되는 교회 서적을 통해 성경을 읽고 성사를 공부했지만, 사실 이마저도 늘 부족했다. 특히 비신자들과 거주하는 신자들은 신앙생활에 더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이렇듯 신자들의 기본 교리 교육은 한계 속에서 어렵게 이어져 왔다.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는 교우촌의 형성으로 신자 수가 늘고,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 점차 넓어짐에 따라 교리 교육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선교사들과 함께 교리서를 정리하고 번역했다. 교리 교육에 대한 베르뇌 주교의 고뇌는 그가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조선 선교지는 시초부터 끊임없이 박해에 시달렸고, … 이제는 주님의 축복 덕택에 우리는 더욱 평안하고, 교우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잘 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후에는 어려움이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우리처럼 선교사 수가 부족한 처지에서는 책을 통해 가르칠 수밖에 없는데 조선에는 책이 부족합니다. - 1857년 11월 11일, 베르뇌 주교가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3)

 

베르뇌 주교의 고뇌는 세 가지 주요한 업적들로 이어진다.

 

첫째, 신자들에게 신속한 교리 교육을 위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새로이 집필했다는 점이다.

 

둘째, 한글 교리 서적을 편찬하는 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신부가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최양업 신부는 한글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한글이 선교와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주목했다.4)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기도서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와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의 번역 및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한 교리서를 자국어로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셋째, 베르뇌 주교는 한글로 된 서적을 보급하기 위해 1861년 서울에 목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였다.5) 인쇄소 책임은 최형(崔炯, 베드로, 1814~1866)이 맡아 베르뇌 주교를 도왔다. 인쇄소 설립 후 신자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천주교 서적을 처음으로 인쇄 간행6)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성교요리문답』이다. 『성교요리문답』은 네 가지 근본 교리인 세례, 고해, 성체, 견진성사를 질문과 응답 형식으로 설명해 준다.

 

 

최초의 공식 교리서 『성교요리문답』

 

사실 『성교요리문답』 서지사항은 『교회와 역사』 177호(1990년 2월호)에 소개된 「한국 교회사 연구 입문(153) : 《성교요리문답》」과 279호(1998년 8월호)에 소개된 「믿음이 배인 이 한 권의 책 -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꽤 지났기에 위의 두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성교요리문답』이 저술된 시기는 1774년 무렵으로 보이며, 저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회원 도이예르(J.F. Marie-Dieudonne d'Ollieres, 方守義, 1722~1780) 신부이다.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이 조선에 전래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정황상 두 가지 시기로 추측한다. 하나는 1801년 신유박해의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 『고해 요리』(1권), 『셩톄 문답』(1권), 『요리 문답』(1권 혹은 3권) 등의 이름이 나타난 것으로, 1801년 이전에 문헌이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달레 역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한문본 『聖敎要理問答』뿐 아니라 한글 역본 『성교요리문답』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앵베르(L. 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본다. 전래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성교요리문답』이 공식 교리서로 채택된 것은 베르뇌 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에 충분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1861년 『성교요리문답』이 간행된 후 목판 또는 활판으로 순한글 그리고 국한문 혼용으로 수없이 판을 거듭했다. 이때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을 번역하면서 앞부분에 있는 요리 육단(要理六端)과 상등회경(上等悔經)은 제외되었다. 그 내용은 천주교의 근본 교리인 ‘영세’, ‘고해’, ‘성체’, ‘견진’성사를 질문과 응답 형식으로 교리를 전하고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 ‘성교 요리 문답’에 각 조목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영세 문답’은 총 70항목으로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교회의 근본 교리를 제시하면서 천주 존재, 강생 구속, 원죄와 본죄, 수난과 부활, 영혼 불멸, 상선 발악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고해 문답’에서는 37조목에 걸쳐 올바른 삶의 길을 통해 하느님과 통교(通交)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아울러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신앙에 대해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이어 ‘성체 문답’ 32조목과 ‘견진 문답’ 23조목에서는 신자들이 추구해 나가야 할 새로운 가치관과 올바른 삶의 형태에 대해 설명하였다.7)

 

그렇다면 왜 『성교요리문답』이 최초의 공식 교리서로 채택되었을까? 먼저 베르뇌 주교는 트리엔트 공의회8)의 영향으로 성사란 “거룩한 것의 표정이며,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형태로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베르뇌 주교는 페레올 주교의 지목으로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후, 조선교회의 교계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주교 서품식 다음 날 조선교회 최초의 시노드를 개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3일(3월 26~28일) 동안 지속한 이 시노드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지침이 들어 있는데, 이는 1857년 8월 2일에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란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그 내용은 신자들이 평소 힘써야 할 행동과 도리, 성사 등이었다. 따라서 베르뇌 주교는 성사가 거행되는 ‘예식’의 중요성도 있지만, 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교요리문답』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성교요리문답』은 베르뇌 주교의 신학적 배경 아래 감수되었으며,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편집자의 해석을 넣어 신자들의 교리적 지식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성교요리문답』은 많은 가정에 보급하기 위해 간행한 최초의 공식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연재를 시작하며, 앞으로의 방향성

 

시기적으로 보면 『성교요리문답』이 조선 천주교회에 반포된 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 회기 시점과 비슷하다. 그리고 『성교요리문답』이 재발행될 때 어느 시점에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회기와 겹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한 내용이 선교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면서, 『성교요리문답』이 재발행될 때마다 풀이 및 용어 설명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이 여러 차례 간행되는 동안 신자들은 박해와 신앙 선교의 자유와 일제 강점이라는 큰 사건들을 겪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신자들은 『성교요리문답』의 가르침에 따라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드러내고 실천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성사는 오늘날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성사가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성사에 대해 큰 괴리감을 느낀다. 이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키고자 세례를 받고 고해를 드렸으며, 성체를 모시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미사에 참여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 선조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인식하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되새기며, 한국의 첫 공식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을 통해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성사’를 선조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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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성교요리문답』의 간행 시기에 대해 조금 다른 분석이 있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안홍균은 1985년 ‘한국 교회사 연구자료 제15집’ 『성교요리문답(영인본)』 「해제」에서 이 책의 사용 시기를 1864~1934년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이석원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는 1859년에 인쇄소를 마련 중이었는데, 다블뤼 주교에 따르면 1861년 1월 24일 서한 작성 당시에 7권의 교리서 중 5권이 ‘막’ 신자들에게 배포되었고 기도서도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하였다. 베르뇌 주교 역시 1861년 8월 22일에 만주 대목구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1861년에 교리서가 인쇄되어 배포되었는데, 여기에 『성교요리문답』이 포함되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성교요리문답』은 인쇄소가 설립되었던 해인 1861년에 처음 간행되었다고 전한다(이석원, 「19세기 서울지역 천주교회 목판인쇄소 운영과 서적 유통」, 『조선 후기 서울 상업공간과 참여층』, 서울역사편찬원, 2021, 236-237쪽 참조).

 

2) 손희송, 『성사, 하느님 현존의 표지』,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5, 41쪽.

 

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베르뇌 주교 서한집』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429쪽.

 

4)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를 가르칠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 신자 중에는 기본 교리나 기도문 등을 열심히 익힌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지하였고, 익히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해 최양업 신부는 사본문답(四本問答) 전체를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이 사실에 대해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이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암송할 방법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171쪽).

 

5) “한문 서적이 한글로 번역되자 계층과 지역을 뛰어넘는 전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이래 조선 선교지를 관할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도 한글 번역과 목판 인쇄의 효용성에 주목하여 신자들의 협력 아래 천주교 서적의 번역과 간행 사업에 주력한 것이다”(이석원, 앞의 책, 224쪽).

 

6) 이때 간행된 책이 『성교일과』, 『성찰기략』, 『성교요리문답』, 『천주성교공과』, 『신명초행』, 『회죄직지』, 『영세대의』, 『주교요지』, 『천당직로』 등이다.

 

7) 차기진, 「《성교 요리 문답》」, 『한국가톨릭대사전』 7,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4528쪽.

 

8)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공의회 교부들의 결정에 따라서 1566년 『로마 교리문답』이 간행되었다. 그 밖에도 카놋사와 볼로냐의 『교리문답』이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의 교리 저작들은 그 절대다수가 이러한 유럽 교리문답의 영향을 받았다. 모두 그 교리문답을 가지고 감본(監本)으로 삼았다”(조현범,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의 한문 저본 연구」, 『교회사학』 19, 2021, 162쪽).

 

[교회와 역사, 2022년 1월호, 정정희 아네스(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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