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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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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26 ㅣ No.1497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1)

 

 

1. 이야기의 배경

 

가톨릭이 보유한 보물은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가 사제(司祭)1)인데, 사제는 통상 수도회나 신학교를 통하여 배출된다. 사제는 교회의 의식과 전례를 주관하므로 교회를 유지하는 중심일 뿐만 아니라 교회 존재의 상징이다. 따라서 사제를 양성하는 일은 교회의 동력 발전소를 세우는 일이며, 그 발전소는 보편(普遍) 교회2)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심장 역할을 한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신학교(Seminarium)3)는 교회의 동력 발전소와 심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힘든 여정을 걸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가톨릭의 보물인 사제를 양성해 내는 신학교는 가톨릭의 또 다른 보물로서, 한국천주교회 생명의 유지(維持, sustentation)와 재생(再生, regeneration)의 둥지라고 말할 수 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guière, 蘇, 바르톨로메오, 1792~1835) 주교를 임명한다. 그러나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중국 내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4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선종하였다. 대신 서만자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베드로, 1803~1839) 신부가 1836년 1월 15일 서양인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한양에 도착하여 대목구장 직무대행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교우촌 방문, 성사 집행 등 통상적인 사목뿐만 아니라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입국 첫해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기초 교육을 시키고, 그해 연말에는 세 사람을 사제로 만들고자 마카오(Macao, 澳門)의 극동 대표부 내 임시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조선 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입국한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1796~1839) 주교는 마카오 유학생을 먼 훗날의 희망으로 여기고, 한 명이라도 속히 현지인 사제가 탄생하기를 염원하며 신학생 양성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838년 무렵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최형(崔炯, 베드로) 등 중년의 대상자를 발굴하여 3년 후 사제품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속성으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야고보, 1803~1839)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국내 도제식 속성 교육은 종료되고 만다.

 

다행히 모방 신부의 첫 방인 사제 양성 시도는 1845년 김대건, 1849년 최양업 두 사제의 신품성사4)로 ‘외국 선교회에 의한 해외 유학 조선인 사제 탄생’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거두었다. 김대건 신부는 서품 후 1년 남짓 사제 활동을 하다가 병오박해로 1846년 9월 16일 만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11년 반 동안 벽지와 오지를 밤낮으로 사목 방문하다가 과로로 1861년 6월 15일, 경북 문경의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생존 시에 현지인 성직자 양성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선발하여 예비 신학생 교육을 해왔던 이만돌(바울리노),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등 소년 세 명을 유학보냈다. 1854년 3월에 출항한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Hong Kong, 香港) 경리부에서 1년여 동안 체류하다가 1855년 6월 12일 말레이반도 중부지역 서쪽 해안에 있는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사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중 이만돌 바울리노는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861년 귀국하였다. 김 사도 요한과 임 빈첸시오는 1863년에 귀국하여, 배론의 성요셉신학교에 편입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김 사도 요한은 1864년에 환속한 뒤 병인박해 때 도피 생활을 하다가 1868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만돌과 임 빈첸시오는 1865년 각각 삭발례와 소품을 받았으나, 1866년 조선 전역에 휘몰아친 병인박해의 광기 때문에 해산하여 아무도 신품성사의 영광을 받지 못하였고, 11년간 존속되었던 성 요셉 신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이로써 파리 외방전교회가 30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두 차례의 현지인 사제 양성 계획에서 성공한 사례는 김대건 · 최양업 두 사람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사도로부터 이어온 성교회는 조선 천주교회에서 사멸되지 않고 끈끈한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많게는 8,000여 명의 대학살과 모진 박해의 공포를 이겨내고 교회의 잔맥(殘脈)이 침묵 속에서 이어져 오다가, 조선 천주교회 두 번째 신학교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개교로 발현되었다.

 

이 글은 배론의 성요셉신학교에 이은 조선 천주교회 두 번째 신학교로서 1885년 10월 28일에 개교하여 1887년 3월까지 1년 5개월간 존속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설립 당시의 시대 상황, 신학교 개교 과정 및 운영을 개관하고 부엉골 본당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부엉골 교회사적지 개발의 의의를 찾아보는 데 목적이 있다.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배론 성요셉신학교의 부활이며 계승이다. 또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포란(抱卵, incubation)이며, 믿음으로 무장된 이방인 선교사들의 끈질긴 복음 선포 결과물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아름다운 신앙 각성제라 할 수 있다.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2.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와 관련된 글

 

한국천주교회의 신학교 역사는 교회가 설립한 첫 번째 공식 신학교로 배론의 성요셉신학교(또는 신학당)를 인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공식 신학교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용산 함벽정(涵碧亭)에 세워진 예수성심신학교의 전신으로 잠깐 언급된다. 그래서인지 배론 신학교와 용산 신학교와 관련된 글은 수가 넘쳐서 골라 쓰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882~1896년 사이 신부들의 보고서나 교세 통계표가 교회 측 공식 문서 자료인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885년도 보고서에 소신학교 설립에 관한 계획이 나타난다.

 

가을에는, 즉 한두 달 후에 소신학교(petit seminaire)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우리가 당면해 있는 불인한 상태와 부족한 인원 때문에 현재까지 망설여 왔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페낭 신학교(College de Pinang)에 가 있던 우리 신학생들은 되돌려 보내면서 그동안 우리의 부족했던 믿음을 책망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좀 더 자유가 허락된다면 이 소신학교도 서울에 있는 한한(韓漢)학교(notre college chinois)처럼 쉽사리 확장될 것입니다(명동 천주교회, 『서울교구 연보』 1, 1984, 44쪽 : Compte Rendu 1883-1887, 1885, p.24).

 

블랑(J.G. Blanc. 白圭三) 주교의 계획대로 1885년 10월 28일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이다. 1886년도 보고서에서 어려운 신학교 운영 현황이 짧게 언급되고 있다.

 

마라발(Maraval, 徐) 신부에게 위임한 소신학교(Notre Petit-Seminaire)는 조건이 좋지 못해서 별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총 학생수는 아직 10명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소신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한문 선생과 학생 1명이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명동 천주교회, 『서울교구 연보』 1, 1984, 51~52쪽).

 

1934년에 평양교구에서 창간한 월간지 『가톨릭연구』의 「조선의 신학교 유래」라는 글에서는 이 신학교를 당시의 소재지 지명을 붙여 ‘원주 부흥골 학당’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 제2 신학교 : 원주 부흥골 학당(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유학생이 빈낭(檳)5) 학당에서 돌아오게 된 것을 기회로 하여 1885년에 원주 부흥골에다 초가 몇 칸을 매수하여 임시 신학교를 설치하고 서 요셉(J. Maraval, 徐若瑟) 신부가 교수하게 되어 빈낭에서 돌아온 학생 4명과 조선에서 입학한 3명의 학생, 합 7명이었었다. 거기서 3년 동안 수학하다가 현 용산 신학교로 옮겼더라(『가톨릭연구』 1935년 9·10월 합병호, 110쪽).

 

1896년 민응식(閔應植)6)의 한옥을 매입하여 감곡 성당을 지은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가밀로, 1869~1947) 신부는 1936년 그의 회고록(Quarante ans de Combats sur le meme Champ d’action)7)에서 성당, 숙소, 식당, 그리고 신학교로도 사용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를 건축하던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바오로, 1853~1922) 신부의 모습을 문학적 필체로 적었다.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준한 산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하였다. 몇몇 교우들이 그를 도와주러 왔고, 그들은 함께 근처 숲에서 통나무를 베어 밀짚들로 엮어 초가를 짓고, 벽은 7~8cm 두께의 진흙 벽돌들로 쌓았다. 호랑이가 보호해 주는 포효성, 그리고 외교인들에게는 불길한 징조의 새인 부엉이들의 음산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오두막집을 지었다. 신학생들의 미래 궁전이 완공되었다(한국교사연구소 감수, 『감곡 본당 90년사 - 옛 장호원 본당』, 천주교 감곡교회, 1986, 136쪽).

 

이원순(李元淳, 에우세비오)은 『한국천주교회사 - 주고받는 이야기로 된』(탐구당, 1970, 206~207쪽)에서 블랑 주교의 업적을 나열하며 부흥골에 성직자 양성기관을 설립하였다고 지적했다.

 

오기선(吳基先, 요셉)은 「순교 성지순례 5」(『경향잡지』 1972년 5월호, 64~67쪽)에서 블랑 주교가 부흥골에 신학교를 재건한 후 한불통상조약 이후 용산 ‘함벽정’으로 신학교를 옮겼음을 짧게 언급하였다.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는 「장호원 본당을 창설한 임 가밀로 신부」(『경향잡지』 1978년 6월호, 75~77쪽)에서 1885년에 두메산골 부엉골에 소신학교가 자리를 잡았다고 소개하였다.

 

장동하(張東河, 베네딕토)는 3차에 걸친 현장 답사 결과물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의 위치 문제」(『교회와 역사』 156회[1988년 5월호], 8~12쪽)에서 “현재 사제관 및 신학교 터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최석우는 「부엉골의 역사적 의의」(『교회와 역사』 176호[1990년 1월호], 8~9쪽)에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부엉골을 개발하고 잘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김신아는 「여주 부엉골 신학교 터」 1 · 2(『교회와 역사』 178호[1990년 3월호], 10~11쪽 ; 179호[1990년 4월호], 8~9쪽)에서 신학교 터 발굴과 함께 당시 현지에서 콜레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 안드레아와 한문 교사의 묘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 부엉골 신학교의 위치.

 

 

유 토마스는 「부엉골 신학교 터를 돌아보고」(『교회와 역사』 193호[1991년 6월호], 14~15쪽)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방인 성직자 양성 노력을 회고한 뒤, 증언이나 기록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적 고증을 한다면 확실한 신학교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최석우는 「한국 교회와 한국인 성직자 양성」(『한국 교회사의 탐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76쪽)에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의 개설 당시의 신학생 명단을 언급하였다. 그들은 1884년에 페낭에서 귀국한 전 안드레아,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한기근(韓基根) 바오로와 1885년 페낭에서 귀국한 최태종 루카 등 4명, 그리고 국내 학생으로 1885년에 입학한 우 안토니오 등 3명을 포함한 총 7명이었다.

 

노용필(盧鏞弼)은 「예수성심신학교의 사제 양성 교육」(『인간연구』 5호,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3, 155~181쪽)에서 부엉골 신학교를 대신학교로, 서울에 별도로 세워진 신학교를 소신학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인현(仁峴)학원 – 종현(鐘峴)학원 - 계성(啓星) 국민학교로 이어지는 계성학교의 역사를 보면 종현(현 명동) 본당 부속으로 세워진 초등 교육기관인 인현학원(일명 한한학교[韓漢學校])을 소신학교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이원순은 『소신학교사(小神學校史)』(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39~43쪽)에서 원주의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교우촌과 신학교를 언급하며 예수성심신학교 터라는 사실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상의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관련 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학교 터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② 신학생의 정확한 인적사항과 교수(敎授)-학습 내용이 파악되지 않았다.

③ 신학교-본당의 관계, 교수와 사목자의 복무 기록에 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

 

1) 참고로 『새 우리말 큰사전』(삼성출판사, 1986)에 나오는 ‘사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① 주교와 신부를 통틀어 일컬음. ② 천주교의 성직(聖職). 로마 가톨릭교에서는 주교의 아래로, 교회의 의식과 전례를 맡아봄.

 

2)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설립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말한다.

 

3) 못자리, 묘포, 온상, 기원, 발상지, 양성소로도 표현된다.

 

4) 부제 · 사제 · 주교의 직무를 수여하는 성사를 통틀어서 ‘성품성사(聖品聖事)’라 하나, 부제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신권과 은총을 주교로부터 받아 신부가 되는 성사를 특별히 ‘신품성사(神品聖事)’로 구분해 쓸 수 있다.

 

5)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을 말한다.

 

6) 개항기 이조판서 · 예조판서 · 강화부 유수 등을 역임한 인물로, 임오군란 때 이 집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

 

7) 역자 주) 『감곡 본당 90년사』에는 끝부분이 ‘Champ d’altion’으로 표기되었으나 내용을 감안하여 “Champ d’action”으로 고쳤다.

 

[교회와 역사, 2022년 1월호, 천강우 프란치스코(가톨릭신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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