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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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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4-16 ㅣ No.1673

[마산교구에 이바지한 인물]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프롤로그

 

이분들을 밀쳐둘 수가 없었다. 다케, 무세, 베르몽 신부와 같은 인물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들추었던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읽을수록 선교사란 존재에 온통 사로잡혔다. 어떻게 그들은 고국과 가족을 등지고 청춘과 목숨을 다 바쳐 여기 이러고 있어야 했는가? 본래 쓰기로 계획했던 인물을 잠시 접고, 북받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분들을 기리고자 한다.

 

 

 

 

한국천주교에 이바지한 파리외방전교회

 

1658년 교황청 직속으로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1660년부터 아시아에 선교사를 4,500명, 그중 360명이 한국 파견이었다. 한국천주교에는 그들이 일군 선교의 피땀이 깃들어 있다.

 

조선의 교우들이 1811년, 1827년 두 차례에 걸쳐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다. 신해박해와 신유박해 등 모진 탄압에도 신앙을 지킨 교우들은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간절한 바람을 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는 모두가 기피하는 조선의 선교사로 자원했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부임하던 중 중국 네이멍구 지역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분의 죽음과 조선 조정의 참혹한 박해 소식에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행이 이어져, 3년이라는 긴 항해 끝에 조선 땅에 하나둘 도착했다. 프랑스 사제들은 1942년 노기남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110년간 9대에 걸쳐 교구장 직을 수행하며 한국천주교의 기초를 다졌다.

 

 

사제 양성과 문화를 이끈 선교사들

 

1837년에 2대 조선대목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분들은 소년 세 명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하고, 1845년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 1849년 두 번째로 최양업 신부를 배출했다. 1855년 베르뇌 주교는 배론에 성요셉신학당을 세워 조선 내에서 사제양성 교육을 시작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서울에 목판 인쇄소를 세워 <천주성교공과> <성교요리문답> 등 각종 교리서를 간행했다. 1874년 달레 신부는 파리에서, 다블뤼 주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펴내 조선교회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1882년 블랑 주교는 종현본당(현 명동본당)을 설립했다. 1885년 강원도 원주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아울러 1914년 대구교구에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설립하면서 방인 성직자를 배출하여 한국천주교의 근간을 이루게 했다. 신학교와 더불어 일반 교육에도 참여하였고, 선교사들은 조선의 의료·교육·문화의 큰 축을 담당하면서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명동대성당과 약현성당도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지은 고딕식 벽돌 건축이다.

 

제8대 조선대목교구장 뮈텔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을 조사함으로써 1925년 7월 79위 치명자들이 복자품에 올랐다. <뮈텔 주교 일기>는 뮈텔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1933년 1월 23일 선종하기 직전까지 약 42년 5개월 동안 자신의 개인사와 교회 활동 및 선교사들의 업무보고 내용, 당시 조선의 정치·외교·사회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록하였다. 다만 뮈텔 주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는 태도 때문에 오늘날 친일로 비판을 받고 있다.

 

- 파리 팔각정

 

 

우리 지역 몇 분이라도 거론해 본다면

 

다블뤼 신부는 1859년부터 5년간 경상도 선교를 맡았고, 리델 신부는 교우촌 지도를 들고 1861년 조선에 와서 서부경남 남해, 사천, 고성, 통영, 거제, 문산, 칠원, 의령 등으로 선교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지역과 경남지역을 종횡무진 드나들며 선교하였다. 그는 1887년 경상도에 콜레라가 만연할 때 의술로 환자들을 지성으로 간호하고 죽은 자를 위한 장례를 경건하게 치렀다. 문산본당의 초대 주임 줄리앙 신부를 비롯하여 우도 신부나 조조 신부 또한 부산본당에서 경남지역의 사목을 맡아 동분서주했던 선교사들이다.

 

조선말의 박해는 프랑스 신부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조선의 자국 선교사 처형에 항의해 군함을 보내 강화도에 상륙하여 도성을 약탈했고,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어느 정도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신자 수가 날로 늘어나 제주도와 간도까지 뻗어나가자,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드망즈 주교는 초대 교구장이 되었다.

 

 

에필로그

 

이 땅에 파견되어 사는 것 자체가 순교였던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지 못한 경우도 다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처럼 입국조차 하지 못한 이, 도착하자마자 병사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입국하기 위해 여러 해를 헤매었으며, 박해로 인해 강제 귀국도 했다. 사목 중에 피붙이가 찾아와도 마음이 흔들릴까 봐 피했다는 가슴 아린 일들이 전해진다. 오직 주님!

 

한국이 발전하고 한국천주교도 급성장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역할은 크게 줄었다. 현재 한국에서 9명의 신부가 외국인 노동자나 수감자, 병원 등 특수사목 분야에서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파리 시내에 있는 외방전교회 정원에는 한국순교성인현양비가 있고, 바로 옆의 팔각정에는 한국과 중국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을 기리는 현판도 있다.

 

▶ 참고 : <천주교마산교구40년사> <완월동성당120년사> <뮈텔 주교 일기> 천주교대구대교구 자료, 천주교서울대교구 자료, 파리외방전교회 자료

 

[2024년 4월 14일(나해) 부활 제3주일 가톨릭마산 4-5면, 황광지 가타리나 / 가톨릭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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