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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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동상으로 만나는 성 김대건 신부: 성 김대건 신부상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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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25 ㅣ No.831

[송년 특집] 동상으로 만나는 성 김대건 신부


성 김대건 신부상에 관한 소고

 

 

1. 성화상과 성상 조각의 의미

 

성화상(聖畵像)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주는 훌륭한 표지이며, 하느님은 이 성화상들을 통해 신자들이 당신의 모습을 보게 하고, 만나게 하기도 한다. 성화상이 곧 표현하고 있는 실재(實在)는 아니지만 그 실재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여 주는 표징이고, 우리는 그 표징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실재를 어느 정도 느껴 알 수 있는 것이다.

 

초대 교부들은 진리를 얻는 도구를 보는 도구와 듣는 도구로 구분하였는데, ‘설교’를 듣는 도구로, ‘성화상’은 보는 도구로 강조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순교자들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나 성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교회 내부를 장식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는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서 성인들의 훌륭한 덕행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자극을 주기 위한 교육적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 안에서 장식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와 중세 초기에는 그리스도교적 인물에 관한 회화 작품은 교육적이든 공경의 목적이든 간에 수없이 많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서 있는 입체 작품 즉 조각의 등장은 10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고딕 성당 입구에 조각 작품이라기보다는 마치 건축의 일부처럼 보이도록 원기둥[圓柱]에 바짝 붙인 성인의 형상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가톨릭에서는 성화상(聖畵像)을 흠숭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단죄한다. 다만 거룩한 이의 그림이나 초상이나 조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흠숭하고 성인들을 공경하도록 명할 뿐이다.

 

 

2. 한국 성화상의 초기 역사

 

우리나라 최초로 성상을 들여온 사람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연행되었던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이다.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샬 폰 벨(J.A.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과 접촉하였던 그는 귀국 시 천주상 한 폭을 갖고 왔으며, 본격적인 성화 제작에 힘썼던 화공(畫工) 이희영(李喜英, 1756~1801) 루카는 그가 그린 예수상을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에게 보낸 사실이 밝혀져 1801년 7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의 선교를 담당하면서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때 다량의 상본과 성상들이 유입되었다. 박해 시기에 순교한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발굴된 성모상, 십자가와 십자고상, 묵주 등은 대부분 서양에서 보내준 것으로 보인다.

 

종현(현 명동) 성당, 약현(현 중림동 약현) 성당, 대구 계산 성당 등 초기 성당 내의 성상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들여왔다. 그러나 1900년대부터는 주로 홍콩이나 상해 라자로회의 성물 카탈로그 등을 보고 주문하기도 했다.

 

한국 작가에 의한 성인상은 회화의 경우 장발(張勃, 루도비코, 1901~2001)의 「김대건 안드레아」(1928) 등이 있으나 성상 조각의 경우는 194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백문기의 안토니오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를 소조로 제작한 「K신부상」(1944, 석고), 최찬정의 명동 성당 무염시태 성모상(1948, 인조석), 김세중의 「김콜롬바와 아네스」(1954, 석고, 등록문화재), 강홍도의 12성인 순교자상(1956, 시멘트 모르타르) 등이 있다.

 

 

3. 한국 성상 조각의 선구자 강홍도

 

한국 성당은 물론이고 신자 가정에 흔한, 크고 작은 김대건 신부상은 대개 두 가지 유형이 있지만, 그 원형은 확인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3년 서울 성북동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피정의 집(옛 본원, 등록문화재 제655호) 외벽 2층과 3층에 설치되어 있는 김대건 신부상을 포함한 12점의 부조가 최종태를 비롯한 김영중 · 백문기 · 최의순 등 원로 조각가의 확인으로 서울미대 조소과 2회 출신인 강홍도(姜鴻道, 요한, 1922~1992)의 작품인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의 아들인 화가 강성원(아우구스티노) 씨 역시 선친의 작풍(作風)이 틀림없다며 “12개의 순교자 성상을 보는 순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아 너무도 눈에 익은 친숙한 형상이었고, 성상 밑에 새겨진 글씨를 대했을 때 선친의 필체임을 확신했다.”고 증언하였다.

 

강홍도는 1950년대 초 서울대 약학과에 입학했다가 조소과로 전과하여 조각의 길을 걸었으며, 당시 서울 충무로 2가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교회 미술 조각에만 몰두하였다. 순수예술에 대한 꿈을 일찌감치 접고 성상에 대한 사명감으로 일생을 봉사한 그는, 외국 사제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벨기에, 브라질, 필리핀 등에서 성상 주문을 받기도 하였다.

 

1956년에 건립된 ‘복자 사랑 피정의 집’에는 정면 2층과 3층 외벽에 9점, 오른쪽 3층 외벽에 3점 등 시멘트를 재료로 한 성상 12점이 설치되어 있다. 이 성상들은 조신철(가롤로) · 유진길(아우구스티노) · 정하상(바오로) · 김대건 신부 · 샤스탕 신부 · 유대철(베드로) · 앵베르 주교 · 현석문(가롤로) · 박희순(루치아) · 모방 신부 · 김효임(골룸바) · 김효주(아녜스) 등 성인 12위로 밝혀졌다.

 

이들 작품은 특히 몸동작이나 손동작, 겹겹의 옷 주름 매무새, 덩어리를 둥글둥글하게 처리한 솜씨,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표현 등으로 미루어 장발 전 서울대 미대학장을 대부로 세례를 받은 강 씨가 대부의 작품인 서울대교구 명동 주교좌 성당 14사도상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 골배마실의 김대건 신부상

 

오늘날 친숙한 김대건 신부상의 원형은 강홍도가 제작한 용인 양지(陽智, 옛 남곡리) 성당의 성 김대건 상(1962)과 미리내 성지의 시멘트조 김대건 신부상(1976)이다. 양지 성당 입구의 정원에 안치되어 있는 성 김대건 신부상은 원래 ‘골배마실’에 있었는데, 양지 파인리조트가 개발되자 구내에 있던 것을 1997년에 양지 성당으로 이축 · 보존되어 왔다.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교우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다. 하지만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제5대 주임이던 정원진(鄭元鎭, 루카)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대리석으로 된 성 김대건 신부상을 제작 · 설치하였다.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鄭溵, 바오로)의 후손인 정원진 신부는 1967년 은퇴 후에도 교회 유적과 성지 답사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청동으로 새로 제작된 2m짜리 성상을 모신 뒤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축복하였다. 그리고 처음 골배마실에 모셔졌던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 성당 정원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지 성당에서도 몇 차례 장소를 옮겼다가 현재는 성당 입구 작은 소나무 정원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동향으로 배치된 김대건 신부상은 성당 진입 시 잘 보이는 장소로 택한 것이긴 하지만 역광으로 인해 디테일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옥외에 노출된 데다가 솔방울의 피해로 표면 질감이 많이 망가진 상태이다.

 

수차 보존 대책을 건의하였으나 최근에야 솔방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간이 유리 보호각을 씌웠지만, 오히려 훼손 우려를 배가하고 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로 등록하면 국가 지원(보호각 건립, 보존 처리 등)을 받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본당 신부나 수원교구에서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아 점차 훼손되어 가는 실정이 안타깝다.

 

더구나 미리내 성지에 있는 시멘트조의 김대건 신부상은 좌대 뒤편에 작가명과 제작 날짜를 밝혀 놓은 유일한 신부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가서 보니 좌대 하부에 석판을 대어 뒷면에는 김대건 신부 약력판으로, 앞면에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 ‘교우들 보아라’를 읽기도 불편한 글씨로 음각되어 있었다.

 

“신자들이 공경하도록 성당이나 경당 안에 전시된 귀중한 성화상들 즉 옛것이거나 또는 예술성이나 공경심에서 탁월한 화상들은 보수가 필요한 때에는 직권자의 서면 허가가 없이는 결코 수리하지 못하며, 직권자는 허가를 주기 전에 전문가들에게 자문하여야 한다”(교회법 1189조)라고 새 교회법전에서도 규정하고 있다.

 

[교회와 역사, 2021년 12월호, 글 · 사진 김정신 스테파노(단국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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