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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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17-18: 이콘성화의 타당성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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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07 ㅣ No.1067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7) 이콘성화의 타당성 논란


육신 취하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신 보이는 하느님 그린다

 

 

(작품1)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 (759-826) 성인, 수도원장, 신학자, 콘스탄티노플 출생.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수도원을 개혁했다.

 

 

1. 이콘성화와 우상은 어떻게 다른가?

 

8, 9세기에 걸쳐 비잔티움 세계에서 일어난 이콘 파괴 논쟁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표현으로 하느님의 신성을 표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갈등이었습니다. 또 동로마 황제는 그 외에 대외적인 모든 갈등의 원인이 이콘 숭배가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물질로 만든 우상에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콘은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이슬람교의 화합에 큰 장애물이라 여겼습니다. 이콘 탄압과 형벌은 729년 동로마 황제 레온 3세에 의해 시작됐고, 이콘을 제작하는 수도원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교도적인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 논리는 그리스도론에 관계된 정체성(正體性)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759~826)는 이콘은 존재하는 것의 형상이지만, 우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의 형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작품 1)

 

우상은 어느 물체들, 예를 들면 해·달·별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각각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신으로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을 황금소의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교도들의 신 바알 형상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대체해 놓고 그 앞에서 주술이나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조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는 물질과 영, 즉 세상과 하느님 사이가 이콘을 통해 상징적으로 매개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콘의 이미지와 원형 사이에는 엄연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원형이 아니고 원형의 반영(反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개념에 실재(實在)하더라도 시각화할 수 없는 것은 이콘화(化)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이콘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콘에서 표현하는 것은 실재적이고 역사에 존재했던 분을 기본으로 합니다.

 

성화상 반대론자의 입장 : 성화상이 하느님을 상기하거나 연상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콘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그들은 신성은 표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상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나 네스토리우스의 사상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았습니다.

 

옹호론자의 입장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시어, 이제는 하느님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성화상의 공경은 물질 숭배가 아니며, 이것을 통해 물질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콘은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육신에 바탕을 두지만,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 중 하나만을 그린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분은 분리할 수 없는 인성과 신성을 그분 안에 모두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451년 칼케돈 공의회 결의)

 

이콘 반대론자들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변화시킨다(神化)’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형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형상은 그 원형과 성질과 본질도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체성사는 물질이 함께하는 성사이니만큼 이콘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를 ‘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는 형상이 아니라 원형으로,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콘은 원형과 같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같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실재 인물과 이콘에 그려진 인물은 별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실제 모습과 무엇이 닮았는지 찾을 필요가 생깁니다. 다음의 예를 들어봅니다.

 

(작품 2) 다마스쿠스의 성 요하네스(675-749), 프레스코. 그의 저서는 이콘을 수호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반대파에 의해 오른손을 절단당했는데, 성모님께 기도하고 손이 다시 붙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세 손의 성모 이콘이 등장한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엇을 그리는가?

 

유치원에서는 아동들에게 그림 그리는 시간을 많이 주어 새로운 시각과 개념을 알려주고, 서로의 유대관계를 형성시키는 교육을 합니다.

 

어느 날 하늘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오늘은 모두 자기 아빠를 그리세요!” 하자 신이 나서 열심히 아빠를 그렸습니다. 늦둥이 하늘이의 아빠는 정수리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있는 대머리에 갈색 테의 안경을 쓴 회사원이었습니다. 갈색 양복을 입고 노란 넥타이를 매고 까만 구두를 신었습니다. 하늘이는 대머리에 안경을 쓴 아빠를 어떻게 그릴까요?

 

하늘이는 도화지에 넓적한 얼굴을 그리고 그 위에 두 눈과 귀, 코와 웃는 입을 그렸습니다. 그 다음 머리카락 세 개와 갈색 안경을 그리고, 허수아비같이 양팔을 활짝 벌린 뒤 갈색 양복에 노란 넥타이와 긴 바지에 검정 구두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위쪽 종이 여백에 ‘하늘이 아빠’라 썼습니다.

 

다른 유치원생들의 아빠와 구별되는 각자만의 고유성 때문에 이 그림은 분명히 하늘이 아빠를 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늘이 아빠는 “나와 똑같네! 우리 아들, 참 잘 그렸네!”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하늘이는 정말 잘 그렸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이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서 ‘원형과 공유한 관계성(유사함)’이란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리는 이콘은 하느님의 눈에는 유치원생이 그린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가 말하기를 자연적인 면만 판단한다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이콘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닮은 모습만을 중요시한다면 애초부터 원형과 다르기에 서로 닮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현에서 ‘공유된 관계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은 그분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원형과 어떠한 관계(유사함)가 있느냐를 중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하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작품 2) ‘과거에는 육신이 없던 하느님을 결코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신 보이는 하느님을 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갖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닌, 우리 구원을 위해 피와 살을 취하신 볼 수 있는 하느님을 그리는 것입니다.’ 또 이콘에 쓰이는 해당 실존 인물의 이름을 통해 그림을 보는 신앙인들에게 더욱 구체성이 제공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성 표현의 한계성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관계성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서 관계성으로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그리스도와 관련된 상징을 연결해 만든 그리스도의 상’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상징인 후광에 ‘있는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약자, 후광에 어울리는 수(數)의 비례에 따른 둥근 형태의 두상,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물결치는 머릿결, 평행으로 휘어지는 적당한 간격의 옷 주름 등으로 그리스도를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거룩한 분을 의미하는 색깔의 옷, 말씀을 의미하는 성경,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얼굴(즉 큰 눈, 좁은 코, 작은 입)도 같은 이유입니다.

 

가구·발판·성경이 역원근법(逆遠近法)으로 구성되어 실제 형태와 다르게 표현됩니다. 그 외에 그림자를 생략하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상단에 붉은색으로 씀으로써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만든 그리스도의 상(像)입니다.

 

* 큰 눈 : 하느님의 눈을 대신함.

* 좁은 코 : 하느님의 영이 들어온 곳. 따라서 하느님의 향기만을 취함.

* 작은 입 : 물욕이 없다는 뜻.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5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8) 이콘성화의 타당성 논란


이콘은 창작예술인가 묻는다면... 명확히 답할 수 없다

 

 

(작품 1) ‘침묵의 성 요한’. 17세기 초반의 이콘 복사작품, 템페라, 40 x 30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나는 말하지 않았다’라는 상징으로 성 요한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을 통해 천사가 일러준 대로 기록하였을 뿐, 본인의 생각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의미다.

 

 

3. 이콘은 창작예술 작품인가?

 

독일 유학 시절 종종 ‘야인(jain)’이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ja)는 ‘그렇다’, 우리말로 ‘예’에 해당합니다. ‘아니요’는 ‘나인(nein)’으로 대답합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불확실할 때엔 이 두 단어를 합하여 표준어는 아니지만, ‘야인’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 성당에서 만난 아이 친구 부모에게 “당신의 자녀는 말을 잘 들어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하며 “야인” 또는 “나야(글쎄)”라고 답합니다. 생일 때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독일 아이들에게 “너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듣는다며?” 라고 물으면 웃으면서 “말 듣지 않는 것이 아니고요, 나와 생각이 달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콘이 창작 예술품이냐?”라고 묻는다면 “야인”으로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콘은 신앙생활에서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신앙의 내적 구심점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훌륭한 창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콘은 예술품이 아니고 복제품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점 하나까지 똑같이 복사하는 것이 무슨 예술이냐’라는 논리는 부분적이나마 수긍할 만합니다. 이콘을 예술의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진 못할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가 이콘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미술 분야를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술을 이콘으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에 접어들기 전, 유럽 성당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창문이 좁고 벽면이 넓은 까닭에 비잔틴 이콘을 응용한 프레스코화가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 후 이콘 화법을 응용한 르네상스 이전의 조토·치마부에·두치오·마사초 등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종교화와 조각품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르네상스가 지난 후 서방에서는 이콘이 전례에 관한 것보다는 고대 예술품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샤갈·말레비치·칸딘스키 등의 예술인은 이콘을 새로운 예술에 접목하기 위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콘을 급진적이거나 비전통적인 방법, 규범이나 현상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예술 세계로 이끌려 했습니다. 그것이 이콘의 예술성을 올리려는 시도일지 몰라도, 결국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교회 의식에 필요한 전례 도구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콘을 통해 왜곡·역원근법·이미지의 중첩과 병렬 등의 구성기법과 색채의 상징성·탈 물질적 방법으로 새로운 예술의 발견이라 했지만, 여기서 나온 작품은 이콘의 본래의 목적에 벗어난 유실물(遺失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콘 작가는 이콘이 창작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시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글로 되어있는 성경 내용을 그림 형태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콘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는, 전례 또는 기도를 위한 용도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이콘 작가는 본인이 그린 인물에 대해 존경과 기도와 묵상을 합니다. 또 흠숭하여야 할 ‘무한히 거룩한 분’의 숨결이라도 나의 손을 빌려 이콘 안에 내재해 계시기를 바랍니다. 전례용 작품은 전례를 위한 내용이 충실해야 하고, 품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콘을 새로운 개념으로 창작할 때 이콘 작가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성경 말씀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이콘을 구성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작된 이콘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그에 맞는 상징적인 표현을 살려 전체적으로 충분히 미적 감각으로 구성하였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창작된 이콘이 전례와 기도를 올릴 수 있는 품위있는 작품인지는 영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이콘 중에 ‘침묵의 성 요한’ 작품이 있습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다른 사도와는 달리 순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분으로, 그는 주님의 유언에 따라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신 분입니다. 훗날 그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가 요한 복음을 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침묵의 성 요한은 본인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를 표현하는 이콘입니다. 달리 해석하면 ‘내 생각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본인이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성령께서 천사를 통해 내 귀에 들려준 대로 기록하였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기록하지만, 하느님의 말씀 의도를 정확히 기록해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형상화한 언어(그림)로 표현한다면, 그 역시 말씀의 의도를 잘 파악해 상징적인 구성과 규정에 따른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창작 이콘은 주로 수도원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고,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과 견해를 논의하고 그 결과를 이콘에 맞게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이콘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말씀을 ‘썼다’고 했습니다. 잘못 써진 이콘은 말씀을 오해의 소지로 이끌 수 있습니다. 또 수백 년 동안 이콘을 그려 온 수도원에서도 성경 내용에 근거한 성사실(聖史實) 이콘이 독창적으로 한 번에 창작된 적이 없습니다. 이콘은 기존 이콘에서 차츰 말씀의 의도를 좀더 분석해 표현하고, 거기에 그 시대의 심미적 관점에 따라 조금씩 색상과 약간의 구성 변화를 줌으로써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인물의 표현에 미세하나마 창작성이 가미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콘은 그 시대에 한 번으로 끝나는 성화가 아니고, 영성적 내용이 첨가되는 ‘진행 과정’에 있는 전례용·기도용 성화라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은 이콘이 정교회 그림이라는 인식에 반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면서 초기 교회, 카타콤바 벽면을 시작으로 그려져 왔으며, 그 후 동·서방 교회에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벽면을 장식하였습니다. 그 후 1054년을 기준으로 동·서방 교회가 갈라진 후 동방 교회에서 이콘이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성화상이라는 인식보다 그리스도교 미술이라는 긍지를 갖고 신자들이 묵상과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추상적인 성화를 보면서 묵상할 수도 있지만, 이콘처럼 예수님 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을 통해 하느님과 눈을 마주하며 기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이콘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현시대의 미적 감각을 살린 창작으로서 이콘이 가능하리라는 관점에서입니다. 이는 시대적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콘에서 예술의 시각만 강조한다면 그 실현은 요원할 것입니다. 이콘이 요구하는 규정과 미학을 연구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을 연결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콘을 복사해 새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콘은 이콘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제작 과정이 어려워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작가 자신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도자기 장인이 불가마에 도자기를 굽는 과정처럼 여겨집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5월 12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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