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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5: 김대건은 한양에서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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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25 ㅣ No.2055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35) 김대건은 한양에서 무엇을 했나


‘조선전도’ 만들고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작성

 

 

김대건 부제는 1845년 한양에 도착해 소공동 돌우물골에 머물면서 다섯 가지 일을 처리했다. 지도는 김대건 부제가 제작한 ‘조선전도’ 원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00여 일 동안 한 일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4월 30일까지 머물렀다. 그럼 김 부제는 106일 동안 한양 소공동 돌우물골에 머물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머물면서 페레올 주교가 지시한 다섯 가지 일을 처리했다. 먼저,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데려올 배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울 조선 지도를 제작해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는 일이었다. 네 번째, 조선인 소년 중 신학생 후보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행적을 정리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김대건 부제는 이 일을 모두 무난히 처리했다. 그럼 김대건 부제의 한양에서의 106일간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박해 소강 시기, 의금부·병조 내 신자 늘어

 

선교사의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지난 호(가톨릭평화신문 제1646호 2022년 1월 16일 자)에 자세히 들여다보았기에 여기서는 건너뛰겠다. 대신 당시 한양에 거주하던 신자들의 삶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짧게나마 소개하겠다. 「기해일기」와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추안급국안」 「포도청등록」 등을 기반으로 당시 신자들의 삶을 연구한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박사에 따르면 19세기 중반 조선 천주교회 신자 수는 대략 1만 명이었고, 그중 약 20%, 곧 2000여 명이 한양에 거주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이가 상업에 종사했다. 말이 상업이지 주로 실, 과일, 사기, 분, 소금, 짚신, 국밥을 파는 열악한 소상인들이었다. 그다음으로 막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박해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후 남의집살이를 하고, 막벌이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다음이 ‘관속’이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전보다 의금부와 병조에 근무하는 신자들이 확연히 늘어나는 특이한 현상을 보인다. 이에 대해 방상근 박사는 “박해가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상황에서 교세가 성장해 갔고, 이에 따라 신자들의 자신감이 커지는 가운데 관속들에 대한 전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외 갖바치, 목수, 활이나 배를 만드는 수공업 종사자들이었다. 또 박해로 경제 기반을 상실한 양반 신자들은 훈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집과 배 사들여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서 집 한 채와 배 한 척을 샀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에는 “그 값이 은 146냥이었습니다”라고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116쪽) 여기에 함정이 있다.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원문에는 “centum quadraginta sex patacis”라고 적혀 있다. 화폐 단위가 조선의 ‘냥’이 아니고 마카오의 ‘pataca’이다. 화폐 단위에 따라 돈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개인 의견으로는 ‘은 146냥’을 원문 그대로 ‘은 146파타카’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김대건 부제가 조선 물정을 모르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할 때 그가 잘 아는 마카오 화폐 단위로 보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진술이 있다. 뱃사람 임성룡(베드로)이 훗날 김대건 신부 지시로 강경에서 객주 구순오에게 중국 은괴를 환전해 조선 돈 400냥(함께 체포된 엄수는 417냥이라고 진술함)을 주고 배 한 척을 사게 된다. 이 배가 바로 김대건 신부가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됐을 때 탔던 배이다. 이 배는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서 중국 강남으로 가기 위해 사들인 배보다 훨씬 작았을 것이다. 먼바다를 항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대건 부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고 한양에서 배를 샀을 것이다. 이 배가 바로 ‘라파엘호’이다.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서 배를 구하는 데에는 이의창(베난시오)의 역할이 컸다. 그는 마포에서 조기 무역을 하던 뱃사람 임치백과 교분이 있었다. 임치백은 신자는 아니었으나 천주교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훗날 옥중에 있는 김대건 신부를 찾아가 세례(세례명 요셉)를 받았다. 이의창은 임치백의 아들 임성룡을 소공동 돌우물골 집으로 데려가 김대건 부제를 소개했다. 임성룡은 김대건 부제 일행과 중국 강남 여행길을 동행하기로 하고 배 한 척을 구했다. 임성룡은 중국 항해 중에 김대건 부제에게 세례(세례명 베드로)를 받는다.

 

 

서양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 지도 「조선전도」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머물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활용할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김 부제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입국할 선교사를 위해 서해와 남해의 섬 위치를 비교적 상세히 지도에 그려놓았다. 또 김 부제는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 그밖에 주의할 것들을 설명한 글을 적어 「조선전도」와 함께 1845년 4월 7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김대건 부제는 어떻게 ‘조선전도’를 그릴 수 있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어줄 해답은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있다. 달레 신부는 “1845년에는 공경하올 순교자 조선인 신부 김 안드레아가 한성부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공식 지도를 보고 지도 한 장을 손수 그렸다”(상권 26쪽)고 밝히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석학인 고 최석우 몬시뇰은 김대건 ‘조선전도’의 바탕이 된 가장 유력한 공식 지도로 ‘동국대지도’를 지목했다. ‘동국대지도’는 조선 후기 학자인 여일 정상기가 1척 100리, 1촌 10리를 기준으로 1755년부터 1767년까지 제작한 지도이다. 현재 원본은 없고, 사본이 보물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대건의 ‘조선전도’ 원본은 교회 밀사를 통해 1846년 12월 중국 변문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메스트르 신부에게 전달돼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전해졌다. 리브와 신부는 이 지도가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여러 복사본을 만들었다. ‘조선전도’ 원본은 프랑스 르망 고문서 지도부에 보관돼 있다. 또 3점의 사본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과 르망 고문서 지도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고문서고에 소장돼 있다. 최석우 몬시뇰은 김대건의 ‘조선전도’에 대해 “서양 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의 지도로 서구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김대건 신부가 울릉도 동편에 우산을 기록함으로써 오늘날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였다”고 평가했다.

 

 

조선 교회 설립과 순교 관련 자료 정리

 

김대건 부제는 또 한양에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정리했다. 이 보고서는 ‘1839년까지의 조선 천주교회사’와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전기’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 천주교회사에는 조선 교회 설립에 관한 개요와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기해박해 순교자 전기에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1839년 서울에서 순교한 주요 순교자 34위의 행적을 정리했다. 김 부제는 현석문(가롤로)와 이재의(토마스)가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 자료를 바탕으로 이 보고서를 작성해 1845년 7월 23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첨부했다.

 

차기진 박사는 “보고서 가운데 조선 교회 설립 개요는. 훗날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나 그 후에 완성된 「기해일기」 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김대건 신부 자신의 순수한 저작으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또 그는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과 순교자 전기 역시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최초의 정리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김대건 부제는 아울러 14세 된 소년 2명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해 한양에 거주하는 동안 그들을 가르쳤고, 다른 두 소년을 지명해 두었다.

 

김대건 부제는 이 모든 것을 마무리한 뒤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구매한 배를 타고 페레올 주교가 있는 중국 강남으로 출항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월 2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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