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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8세기 말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과 세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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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5 ㅣ No.814

18세기 말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과 세례명

 

 

1. 머리말

 

1784년에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초창기부터 급속도로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설립된 지 5년 만인 1789년 말에는 1,000명으로, 1794년 말에는 4,000명으로 증가했다가, 신유박해 직전인 1800년 말에는 10,000명으로까지 늘어났다. 당시 이러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가성직제도, 진산사건의 영향, 주문모 신부의 활동 등이 배경으로 작용했으며,1) 그런 가운데 조선 천주교회는 점차 조직화  · 체계화되어 갔다.

 

그렇다면 가성직제도, 진산사건, 주문모 신부의 활동에서, 어떠한 부분이 구체적으로 교세 확대와 교회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을까? 즉 평신도 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베푼 것이 어떻게 교세 확대로 이어졌으며, 진산사건 이후 급격하게 신자수가 증가한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 발전을 위한 주문모 신부의 활동은 또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회장제와 명도회를 주목한 연구가 있지만,2)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한 글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초창기 천주교회의 성장과 정착 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 의식하에 필자가 주목한 부분이 신자 교육이다. 즉 교리를 비롯하여 천주교와 관련된 여러 내용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입교가 이루어지고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나아가 이들에 의해 전교가 이루어지면서 교세가 확대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인(聖人)에 대한 교육”은 ‘모델을 통한 직접적인 신앙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교육 효과가 매우 컸을 것이며,3) 그 대상이 자신의 본명 성인인 경우에는 더욱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당시 신자들이 세례명을 갖는 것은, 본명 성인에 대한 교육을 통해 본명 성인처럼 신앙을 굳게 지키는 한편, 교회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여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가성직제도, 진산사건, 주문모 신부의 활동기에 행해진 “세례명을 통한 성인 교육”은 신앙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교회의 발전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신자들이 어떠한 세례명을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갖게 되었으며, 그들이 보유한 세례명의 의미와 특징이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는 것은 초창기 천주교회의 발전 과정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2. 교회의 설립과 수호(受號)4) 실태

 

주지하듯이, 조선 교회는 1784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라몽(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다른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설립되었다. 조선 교회에 있어 최초의 세례식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5) 1784년 겨울 수표교(水標橋, 서울 중구 수표동)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이벽(세례자 요한)과 정약용(丁若鏞, 사도 요한),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얼마 뒤에는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최창현(崔昌顯, 사도 요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홍낙민(洪樂敏, 루카 혹 바오로) 등도 세례를 받았다. 이후 신자수가 늘고, 또 1795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이후에는 더 많은 세례식이 거행되어 많은 신자들이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1784년부터 1801년까지 세례명을 보유한 신자들을 조사해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 1801년 이전에 세례명을 보유한 신자(남자)

 

 

 

 

 

 

<표 2> 1801년 이전에 세례명을 보유한 신자(여자)

 

 

<표 3> 1801년 이전 신자들의 세례명

 

 

<표 1>과 <표 2>에 의하면, 이 시기 세례명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총 146명(남자 116, 여자 30)이며, 세례명의 종류는 68가지(남자 47, 여자 21)였다.15)

 

그렇다면 146명의 신자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세례명을 받았을까? 이들의 수호 과정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유형화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지도급 신자들에게 받은 경우, 둘째는 중국에 가서 중국 선교사들에게 직접 받은 경우, 셋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보례를 받은 경우, 넷째는 주문모 신부에게 처음으로 세례명을 받은 경우이다.

 

네 가지 중에 지도급 신자들에게 영세하고 세례명을 받은 경우는 시기적으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이 될 것이다. 이 유형으로는 먼저 <① 최초의 세례식에 참여한 이벽 · 정약용 · 권일신 등이 이승훈에게 받은 것>을 들 수 있고, 이어 <김범우 · 김현우 · 김이우 형제와 윤지충 · 정약종 · 홍익만 · 최창현 · 윤유일 등이 이승훈에게>, <② 이존창 · 정광수가 권일신에게>, <③ 최인길이 이벽에게>, <④ 유군명이 이존창에게>, <⑤ 김계완이 최창현에게>, <⑥ 손경윤이 최필공에게>, <⑦ 정복혜가 이합규에게> 받은 기록이 보인다.16)

 

여기서 신자들에게 세례명을 지어 준 사람들을 정리해 보면, <이승훈, 권일신, 이벽, 이존창, 최창현, 최필공, 이합규〉 등이며, 이들은 대체로 초기 교회의 지도급 신자였다. 즉 이승훈과 이벽은 조선 교회의 창설 주역이었고, 권일신 · 이존창 · 최창현은 가성직자단의 신부였으며, 최필공과 이합규는 중인 중에 가장 교회 활동이 두드러졌던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사제가 없던 상황에서 조선의 신자들은 지도급 신자들에게 수세수호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주문모 신부의 공초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최약망(崔若望)의 자는 관천(冠泉), 최의납작(崔依納爵)의 자는 인철(仁喆), 최다묵(崔多默)의 자는 필공(必恭)이고, 윤보록(尹保祿)과 김로가(金路加)는 죽었고, 정달두(鄭達?)의 자는 인혁(仁赫), 김방제각(金方濟各)의 자는 모르겠고, 권파서략(權巴西略)의 자도 분명치는 않지만 상문(象文)이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별호를 지어 준 것에 관해서는 제가 오기 전에 벌써 가지고 있어서, 저로서는 누가 지어 준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감히 아뢸 수 없으니, 본인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17)

 

위의 자료에 의하면, 최창현 · 최인철 · 최필공 · 정인혁 · 권상문 등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세례명을 받았는데, 이것은 교회가 창설될 당시 이승훈 등 지도급 신자들이 행한 수세수호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당시 지도급 신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신자들에게 세례명을 지어 주었을까? 이들은 신자들에게 세례명을 지어 줄 정도로 가톨릭 성인에 대한 지식이 충분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승훈이 북경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서적이 주목된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귀국할 때 많은 서적들을 가져와 이벽에게 주었는데,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으로는 ① 종교의 진리의 더 많은 증거 ②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 ③ 7성사의 해설 ④ 교리문답 ⑤ 복음성서의 주해(註解) ⑥ 그날그날의 성인행적 ⑦ 기도서 등이 있었다고 한다.18)

 

여기서 ⑥ 그날그날의 성인행적은 1738년 마이야(Mailla, 馮秉正, 1669~1748) 신부가 저술한 《성년광익》(聖年廣益)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벽 등 당시의 지도급 신자들은 이 책을 통해 천주교의 성인에 대해 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특히 이가환이 이벽에게 빌려 본 책 중에 《성년광익》이 있었다는 것20)은, 이승훈이 가져온 ‘그날그날의 성인행적’이 《성년광익》일 가능성을 높여 주며, 따라서 이벽과 이승훈은 몇 개월 동안 이 책을 통해 가톨릭 성인에 대한 지식을 쌓은 후 세례식을 거행했고, 세례명을 지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 (정약종)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자 그는 곧 그것을 배웠다. 그러나 즉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이벽이 참된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자주 뇌었고, 4~5년 뒤에야 비로소 은총의 권유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주저한 것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영세할 때에 이 성인을 주보로 삼기를 원하였다. …21)

 

위의 내용은 정약종의 입교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약종은 형제들보다 몇 년 늦게 입교한22) 자신의 처지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망설임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영세할 때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주보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정약종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의 이러한 지식은 《성년광익》을 통해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경윤(제르바시오) · 손경욱(프로타시오) 형제도, 이들이 ‘형제 치명자’를 본명으로 갖게 된 것은 형제라는 공통점이 크게 작용한 듯한데,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서 본명으로 삼으려면 성인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지도급 신자들은 《성년광익》을 비롯한 성인전을 통해 성인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이를 토대로 세례명을 짓게 되었다고 하겠다.

 

신자들이 세례와 세례명을 받은 두 번째 유형으로는, <이승훈 · 윤유일 · 배 마티아 · 오 요한 세자 · 박 요한 · 옥천희 · 황심> 등이 북경에서 영세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중 이승훈과 오 요한 세자, 박 요한은 처음으로 선교사들에게 영세하고 본명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윤유일처럼 보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이 유형에서도 윤유일 등 몇 사람은 지도급 신자에게 수세수호한 첫 번째 유형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세 번째 유형으로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홍낙민이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를 받은 것처럼,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를 받은 경우이다. 즉 1794년에 배교했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박경화, 1790년 최인길에게 교회 서적을 빌려보았던 이국승이 주문모 신부에게 수세수호한 경우, 권씨를 통해 천주교를 접한 홍교만이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한 경우, 1784년 김범우에게 배운 김종교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명을 받은 경우, 1789년 윤지충에게 학습한 윤지헌이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한 경우, 1791년 이전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에게 수세수호한 경우, 주문모 신부 입국 이전에 수학했다가 1797년에 수세수호한 윤점혜 등은, 비록 수세수호라는 표현은 썼지만 보례를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3)

 

마지막으로,정산필 · 황일광 · 이현 · 김건순 · 정순매 · 문영인 · 강경복 · 한신애 · 김연이 등과 같이 주문모 신부에게 수세수호한 경우가 되겠다. 이들은 대체로 1795년 이후에 입교한 자들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교회가 체계화되고 전교가 활발해지는 상황 속에서 수세수호한 사람들이다.24)

 

 

3. 세례명의 유형과 특징

 

1) 남성 신자

 

1784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 수세수호의 결과 많은 신자들이 세례명을 갖게 되었는데, 1801년 이전 신자들이 받았던 세례명 중에 오늘날 알 수 있는 것은 68가지(남자 47, 여자 21) 정도이다. 이 중 미상(8개)을 제외한 60가지(남자 45개, 여자 15)의 세례명을, 선택한 사람의 수와 성인의 성격을 고려하여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남자 신자의 경우, 사도(司徒)라고 알려진 성인들을 본명으로 정한 경우가 있다. 즉 45종류의 세례명 중 베드로(12) · 토마스(10) · 요한(9) · 바오로(9) · 시몬(4) · 안드레아(4) · 마티아(3) · 야고보(3) · 마태오(3) · 바르나바(2) · 필립보(2) · 타대오(2) 등은 《성년광익》에 종도(宗徒)라고 표기된 인물들이다. 이 12명의 사도를 자신의 본명 성인으로 선택한 신자는 63명이며, 이 숫자는 세례명을 알 수 있는 신자의 54.3%에 해당한다.

 

이처럼 당시 50% 이상의 신자들이 사도를 본명으로 갖게 된 것은,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식하거나 또는 인식시킨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도들처럼 복음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뜻을 지니거나, 그러한 역할을 의식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사도들 중에서도 베드로(12) · 토마스(10) · 요한(9) · 바오로(9)를 선택한 신자들이 가장 많았는데, 이것은 4명의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여겨졌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이 유형에는 권일신의 본명 성인이자 일본에 천주교를 전파시킨 ‘프란치스코 사베리오(2)’ 성인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 · 토마스 · 요한 · 바오로 사도 다음으로 많은 신자들이 선택한 본명이 프란치스코 오상 성인이다. 당시 이 본명을 선택한 사람은 8명(6.9%)으로 전체 본명 중에 다섯 번째로 많은 선택이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극기(克己) · 인내(忍耐)’의 덕목을 본받고자 하는 신자가 많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의 오상(五傷)을 받았다는 점에서, 성인의 몸이 구세주의 성신(聖身)과 비슷하다는 의미 부여가 다수의 신자들로 하여금 이 본명을 선택하도록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치명 성인을 선택한 것도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표 1>과 <표 2>에서 치명 성인은 13명으로 이를 본명으로 선택한 신자는 15명(12.9%)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의식적으로 치명 사실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니면 다른 덕목을 마음에 두고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치명자 중에는 ‘세자 요한’이 있는데, 이 본명을 지닌 신자는 이벽과 북경에서 영세한 오씨로, 이들이 세자 요한을 본명으로 하게 된 계기는 ‘치명’보다는 예수의 선구자(마지막 예언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사람)로서 세자 요한이 한 역할에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신자들이 선택한 본명 중에는 교황 · 주교 등 고위 성직자로 분류할 수 있는 유형도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11명으로, 이들을 본명으로 선택한 신자는 15명(12.9%)이었다. 이들이 교황 · 주교를 본명으로 선택한 이유가 고위 성직자를 선호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 내에서 교황 · 주교가 갖는 의미와 역할을 의식하고 그를 본받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와 함께 암브로시오(주교) · 아우구스티노(주교) 성인은 교회학자로 유명하며, 성인전에도 성사(聖師)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본명을 선택한 신자 중 권철신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며, 정약종과 유항검도 교리 지식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특히 정약종은 명도회의 회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교요지》를 저술한 인물로, 주교이자 성사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측면이 많다. 따라서 이들의 본명 선택에는 교황 · 주교적인 요소와 함께, 학자적인 이미지도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가롤로와 플로로 주교는 바오로와 베드로 성인과 관련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사도 유형’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요한 세자(2)나 중국의 주보인 요셉 성인(2)과 같이 특별한 의미의 본명을 갖는 경우도 있다. 요한 세자는 이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 창설의 주역이라는 의미를, 요셉 성인은 성모의 정배(淨配)이자 중국 교회와 조선 교회를 보호하는 주보의 의미에서 신자들이 세례명으로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외 루카(3)와 욥(1)은 성경의 저자[聖史]라는 의미가 강하게 작용한 듯하며, 알렉시오(1)는 부귀(富貴)를 버리고 주를 따랐던 행적이, 총망 받던 황사영이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세상을 구할 양약(良藥)”을 선택했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세례명 외에 ① 루도비코 곤자가(이존창), ② 안토니오(이현, 홍익만), ③ 요사팟(김건순), ④ 예로니모(조섭), ⑤ 이냐시오(최인철) 등도 당시 신자들의 세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중 루도비코 곤자가(이존창)와 이냐시오(최인철) 성인은 이들이 예수회 회원이라는 사실이 본명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즉 세례명으로 알려진 45명의 성인 중에 예수회원은 이 두 명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권일신)뿐인데,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사람도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였고, 신자들이 마테오 리치(M. Ricci)를 비롯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구만 리를 왔다’고 알고 있는 신부들도 대부분 예수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접한 교회 서적의 저자들 역시 예수회 신부들이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당시 교회의 지도급 신자였던 권일신, 이존창, 최인철 등이 자신의 본명 성인을 예수회 회원 중에서 선택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김건순의 경우는 1799년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했는데, 주문모 신부가 요사팟이란 세례명을 지어 준 것은 김건순의 신분과 관련된 듯하다. 즉 ‘요사팟 성인이 국왕(國王) 신분으로 왕위를 버리면서까지 예수의 고난을 따른 인물’이라는 점은, 당시 집권 세력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던 노론의 후손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김건순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25)

 

2) 여성 신자

 

여성 신자의 경우는 미상(6)을 제외하면 15가지의 세례명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동정녀와 치명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본명 선택은 실제 여성 신자들의 삶과도 연결되는데, 치명자를 본명으로 선택한 18명(75.0% 미상 제외) 중 14명(77.8%)이 순교자였다는 사실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26) 아울러 동정녀를 선택한 사람 중에 한신애와 윤운혜를 제외하면 대부분 동정녀 · 동정 부부 · 과부 · 궁녀 출신이었던 점도, 이들의 삶이 자신의 본명 성인과 비슷한 모습을 띄었음을 말해 준다.

 

순교와 관련해서 여성 신자들이 보여 주는 이러한 경향은 남성 신자와는 매우 다르다. 즉 남성 신자의 경우는 알려진 본명 45개 중 치명 성인이 14명(31.1%)이었고, 이를 선택한 신자는 16명(13.8%)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16명 중에서도 1801년 이전에 순교한 사람은 6명(37.5%) 정도였다. 따라서 이러한 통계는 여성 신자들이 남성 신자들보다 좀 더 강한 순교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주며, 이것은 자신의 본명 성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남녀 신자들이 선택했던 세례명의 유형과 특징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남녀 신자들이 지녔던 신앙의 성격을 일단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즉 여성 신자들은 동정 · 치명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개인적인 신앙에 초점을 맞춘 측면이 강한 반면, 남성 신자는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라는 교회의 조직적인 측면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기록상 여성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에 대부분 등장하며,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와 세례명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 신자들의 신앙적인 특징은 주문모 신부의 영향이 컸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주문모 신부가 여성 신자들에게 동정과 순교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이들의 신앙을 이끌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강완숙과 같은 여성 신자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당시 교회의 주요 활동들이 대부분 남성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현상은 세례명 분석을 통해서도 일정 부분 살펴볼 수 있겠다.

 

 

4. 세례명의 의미

 

그렇다면 당시 신자들이 지녔던 세례명이 18세기 말 조선 교회와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최석우 묜시뇰은 세례명과 신심의 관계에 대해, “신자들은 그들이 영세 때 주보성인으로 택한 성인을 더욱 공경하고 사숙하기 마련이다. 주보성인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자연 일어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27)라고 언급하였다. 즉 신자들이 자신의 주보성인을 특별히 공경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한신애의 딸로 1801년에 체포된 조혜의(趙惠義, 빠을이)의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사호(邪號)란, 일찍이 사학(邪學)을 하다가 죽은 자는 모두 호(號)가 있는데, 사학을 하는 자가 그를 사모하고 본받고자 하여, 자기에게 유사한 자의 호를 취한 것이다. …28)

 

위의 자료에 따르면, 신자들은 사호(邪號), 즉 세례명을 갖는 데 성인 중에 행적이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자신이 닮고 싶은 사람을 택하여 그 이름을 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세례명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광주에 살았던 동정녀 심 바르바라가 ‘성인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에 감동하여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했으며,29) 문영인 비비안나로 하여금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을 따라 순교하려는 원을 드러내도록 하였다.’30) 그리고 윤점혜 아가타가 ‘어떻게 하면 본명 성녀와 같이 치명할 수 있을까’ 하고 묻거나, 항상 옆 사람들에게 ‘자기의 본명으로 주보를 삼으라’고 권하도록 하였다.31) 특히 정약종이 ‘신앙을 받아들일 때 주저했던 것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하다고 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자신의 주보로 삼았다’는 일화는, 세례명이 신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세례명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세례명은 신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그 사람의 역할과도 연결될 수 있다. 즉 본명 성인을 본받는다는 의미는 바로 본명 성인과 같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 이 무렵 북경에서 영세한 이승훈 베드로가 이 성사를 이벽과 권일신에게 주었다. 본명 선택은 되는 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벽은 조선의 개종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본명을 요한 세자로 하였고, 권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을 주보로 하여 그를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 32)

 

위의 기록은 이승훈이 처음으로 수세수호한 사실과 특히 수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신자들의 세례명이 되는대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벽의 경우는 ‘요한 세자’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같이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역할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이들을 주보성인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벽은 교회의 설립 이전에 ‘요한 세자’와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며, 권일신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입교시킴으로써 충청도와 전라도의 복음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33)

 

세례명이 갖는 이러한 의미는, 북경에서 세례 받은 신자들의 사례에서도 살필 수 있다. 즉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과 같은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이 주어졌고,34) 1790년 9월경 윤유일과 함께 북경에 갔던 예비교우 오는 ‘요한 세자’란 본명으로 영세했는데, 구베아 주교는 ‘그에게 성작과 미사경본, 성석, 그리고 그 밖에 선교사가 갖고 갈 수도 없고, 조선에서 준비할 수도 없는 미사성제에 필요한 제의를 주었고, 또 선교사가 도착하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도록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35) 결국 ‘오’씨의 임무는 구베아 주교가 지어준 ‘요한 세자’와 같은 역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시 신자들이 가졌던 세례명은, 교회 내에서 그 사람의 역할을 짐작케 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즉 3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다양한 유형의 세례명 속에는 ‘사도로서의 역할’ 등 교회 내에서 신자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전후하여 세례명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도, 이 시기 세례명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신자들의 수호 시기를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세례명을 받은 사람(A그룹), A그룹으로 추정되는 사람(A-1그룹), 주문모 신부 입국 이후에 세례명을 받은 사람(B그룹), B그룹으로 추정되는 사람(B-1그룹), 불명인 경우(C그룹)로 구분해 보면, 수호 시기가 A인 사람은 38명(26.0%), A-1은 53명(36.3%), B는 16명(11.0%), B-1은 12명(8.2%), C는 27명(18.5%)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세례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A+A-1)은 91명으로 전체의 62.3%가 되며, 주문모 신부 입국 이후에 세례명을 받은 사람(B+B-1)은 28명으로 19.2%가 된다. 물론 미상인 27명의 수호 시기가 문제이지만, 이들 모두가 주문모 신부 이후에 입교했다고 하더라도 B그룹은 37.7% 정도로 A그룹에 훨씬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남녀별 수호 시기를 살펴보면, 남성 신자는 116명 중 A(A-1)그룹에 속한 신자가 82명(70.7%), B(B-1)그룹에 속한 신자가 12명(10.3%), 미상인 C가 22명(19.0%)이며, 여성 신자는 30명 중 A(A-1)그룹에 속한 신자가 9명(30.0%), B(B-1)그룹에 속한 신자가 16명(53.3%), 미상인 C가 5명(16.7%)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계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세례명을 받은 사람이 이후보다 많았다는 사실에서, 조선 교회는 주 신부가 오기 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남녀별 통계를 통해 주문모 신부 이전에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남성 신자들이며, 여성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에 신앙생활과 활동이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남성 신자 중에 사도를 세례명으로 한 사람은 63명인데, 이 중 A(A-1)그룹에 속한 사람이 44명(69.8%), B(B-1)그룹에 속한 사람이 5명(7.9%), 미상인 경우(C)는 14명(22.2%)이었다. 즉 사도를 세례명으로 택한 사람의 경우 주문모 신부 입국 이전에 수호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것은 평신도들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신자들의 역할에 대한 인지(認知)가 세례명에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내용들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조선 교회는 이미 신자들의 노력에 의해 정착과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결과 18세기말의 교세 급증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겠다.

 

 

5. 맺음말

 

이상에서 1801년 이전에 천주교 신자들이 지녔던 세례명과 수호 과정, 세례명의 유형과 특징 및 의미 등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 말 조선 교회의 신자들은 대체로 ① 지도급 신자 ② 중국에 있는 선교사 ③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 ④ 주문모 신부에게 처음으로 세례명을 받은 경우 등 네 가지 경로를 통해 세례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미상을 제외하고 남성 신자들이 보유한 세례명은 45가지인데, 이 중 12명의 사도를 세례명으로 선택한 신자가 63명(54.3%)으로 과반수를 넘었고, 개별적으로는 베드로 · 토마스 · 요한 · 바오로 사도를 선택한 신자들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치명 성인과 교황 · 주교를 선택한 신자가 각각 15명(12.9%)씩이었으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세자 요한’이나 예수회원들도 세례명으로 선택되었다. 이러한 세례명의 보유 경향은, 교회 설립기에 신자들이 지녔던 의식의 일단, 즉 교회의 유지와 정착을 위해 본명 성인과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여성 신자들이 보유한 세례명은 대체로 동정과 치명을 특징으로 하며, 이들의 삶 자체도 본명 성인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세례명을 보유한 신자는 62.3%에 달했고, 또 “사도나 순교 성인”을 세례명으로 택한 남성 신자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압도적으로 많이 존재했다. 이것은 목자가 없던 시기에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던 신자들의 노력과 역할 및 각오를 보여 주며, 이러한 신자들의 노력이 18세기 말 조선 천주교회가 정착 ·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하겠다.

 

결국 세례명 속에 드러난 신자들의 의식은 18세기 말 조선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던 신자들이 교육을 통해 새로운 신자 집단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이 시기 교세의 증가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즉 교육을 통한 본명 성인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본명 성인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철저했던 결과가, 18세기 말 조선 교회의 발전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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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세와 각 사건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방상근, <신유박해기에 대한 통계적 고찰>, 《사목》 27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9, 37~39쪽 참조.

 

2) 방상근, <初期 敎會에 있어서 明道會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3) 성인의 전기가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 참조. 이재순, <주년첨례광익의 분석 - 성인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사 논문집》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 김윤성, <초기 한국 가톨릭의 성인 전기>, 《교회사연구》 15,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4) 세례와 세례명을 받는 것을 한자로 ‘受洗受號’라고 하는데, 본문에서도 의미 전달상 필요한 부분에서는 수세수호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5) 1789년 말 이승훈이 북경에 보낸 서한에는, “북경에서 받은 영세 예절로 영세를 주었다”라고 하였다(《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2쪽).

 

6) 수호 시기에 있어, A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세례명을 받은 사람, A-1은 A그룹으로 추정되는 사람, B는 주문모 신부 입국 이후에 세례명을 받은 사람, B-1은 B그룹으로 추정되는 사람, C는 불명인 경우를 나타낸다.

 

7) A-1(B)의 경우는 행적상 A그룹에 속하지만, 수세수호는 주문모 신부에게 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수세수호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B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성직자단의 홍낙민이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補禮)를 받았다는 황사영 <백서>의 기록은, A-1(B)에 해당하는 신자들도 1795년 이전에 이미 수세수호를 했다가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한다.

 

8) 1790년 11월 11일자 판지 수사 서한(《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9쪽).

 

9) 이국승의 세례명은 기록상 바오로와 베드로 두 가지로 나온다. 이 중 베드로는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의 기록에 나오는 것이고, 바오로는 《사학징의》에 나오는 세례명이다. 두 가지 세례명 중 필자는 본인의 진술 기록인 바오로를 이국승의 세례명으로 본다.

 

10) 황일광의 세례명은 기록상 시몬과 알렉시오 두 가지로 나온다. 이 중 알렉시오는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의 기록에 나오는 것이고, 시몬은 《사학징의》에 나오는 세례명이다. 두 가지 세례명 중 필자는 본인의 진술 기록인 시몬을 황일광의 세례명으로 본다.

 

11) 홍낙민의 세례명은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루카로, 황사영의 <백서>에는 바오로(保祿)로 나온다.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홍낙민의 진짜 세례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루카를 홍낙민의 세례명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12) 윤운혜의 세례명은 《사학징의》에는 루치아(樓哉)로, 1811년 신미년 서한에는 마르타(瑪?大)로 나온다. 이 중 필자는 본인의 진술이라는 점에서 루치아를 윤운혜의 본명으로 간주한다.

 

13) 이사벨로 추정된다.

 

14) 마르타는 1811년 신미년 서한에 윤운혜의 세례명으로 나온다. 그러나 윤운혜는 자신의 세례명을 루치아라고 진술하였다. 따라서 비록 마르타를 본명으로 사용한 신자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마르타라는 세례명도 당시에 알려져 있었다는 점에서, 세례명의 종류로는 남겨둔다.

 

15) 최석우 몬시뇰도 《사학징의》에 나타나는 본명을 간추려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언급된 세례명 수는 41가지였다(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 천주교회>, 《교회사연구》 2, 1979, 한국교회사연구소, 26~27쪽).

 

16) 이들 외에 전주의 사도인 유항검도 이승훈에게 세례와 세례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1793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된 지황 역시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17) <罪人李基讓等推案>(3월 15일자 주문모 공초),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서종태 · 한건 엮음, 국학자료원, 2004, 266쪽.

 

18)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307쪽.

 

19) 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61쪽.

 

20) “甲乙之際, … 李蘗據理答之, 家煥辭屈, 遂求書細覽, 李蘗與初函書數種, 時有聖年廣益一部”(황사영, <帛書>, 47행).

 

21) 《한국천주교회사》 상, 441쪽.

 

22) 정약종은 1786년에 형 정약전으로부터 교리를 듣고 입교했으며, 권일신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23) 이러한 사실은 주문모 신부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敎中有祭獻耶蘇之事 又爲授領洗於人 而其前雖有得過名號受妄行聖洗者 皆爲之補行其禮節”(<罪人李基讓等推案>, 3월 15일자 주문모 공초,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267쪽).

 

24)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무렵 4,000명이었던 신자수는 1801년에 10,00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러한 사실에서도 당시 교회의 전교 활동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5) 당시 남인에 한정된 양반들의 신자 구성은 당쟁의 과정에서 늘상 천주교의 박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정치적 힘이 있는 노론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했는데, 그 결과 김건순의 입교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방상근, <황사영 백서의 분석적 이해>, 《교회사연구》 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159~162쪽).

 

26) 나머지 4명 중 홍순희만 영광으로 유배 간 기록이 있을 뿐, 3명은 순교했는지 배교했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순교자의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27) 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 천주교회>, 26쪽.

 

28) “邪號者 曾爲邪學而死者 皆有其號 爲邪學者 慕其事之 類於己者 而取其號”(《사학징의》, 344쪽).

 

29) 《한국천주교회사》 상, 471~472쪽.

 

30) 《한국천주교회사》 상, 504쪽.

 

31) 윤민구, <신미년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연구>, 《수원가톨릭대학교 논문집》 2, 수원가톨릭대학교, 1990, 61쪽.

 

32) 《한국천주교회사》 상, 312쪽.

 

33) “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고, 자기 스승(권일신)으로부터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도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 조선 남쪽에 있는 전라도의 천주교회를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운 영광도 권일신 사베리오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것은 유항검을 입교시킴으로써 이룩되었다. 유항검은 아우구스티노 본명으로 영세하였다”(《한국천주교회사》 상, 313쪽).

 

34) 《한국천주교회사》 상, 305쪽.

 

35) <1797년 8월 15일자 구베아 주교의 서한>, 《교회사연구》 8, 191쪽.

 

[교회사 연구 제34집, 2010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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