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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28: 가자! 조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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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29 ㅣ No.2040

[성 김대건 · 최양업 전] (28) 가자! 조선으로


부모와 선교 사제들 순교 소식에 눈물 훔치며 결연히 길을 나서다

 

 

- 신학생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께 압록강변 봉황산성 책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박해 소식을 듣는다. 왼쪽은 봉황산성 옛 모습(출처 바이두)이고, 오른쪽은 오늘날 새롭게 단장한 봉황산성.

 

 

브뤼니에르 신부, 지역민에게 피살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1842년 10월 23일 중국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에 도착한 후 수레를 타고 이틀을 간 후 25일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당도했다. 백가점은 바다에서 약 28㎞ 떨어진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200여 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 외지인 눈에 띄지 않지만, 왕래와 정보 수집, 피신하기 쉬운 지리적으로 전형적인 교우촌이었다. 이곳에서 조선 국경까지는 걸어서 3~4일 길이었다. 백가점은 오늘날 중국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차쿠(溝)이다. 마을 동편에는 백(白)씨가, 서편에는 두()씨가 모여 살았다. 하지만 백씨의 수가 훨씬 많아 ‘백가점’이라 불렸다. 최양업은 사제품을 받은 후 이곳에서 7개월간 사목 활동을 한다.

 

최양업과 김대건 일행은 백가점 두 요셉 회장 집에 머물렀다. 두 회장 가족 외에는 이들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교우들은 서양인 신부들과 조선인 신학생들을 쫓아내려는 음모까지 꾸몄다. 1838년 12월 요동대목구(요동대목구는 1840년 몽골대목구와 분리된 후 ‘만주대목구’가 됐다)가 설정돼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베롤 주교가 임명돼 부임했으나 여전히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머무르시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불쾌한 일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신학생 김대건이 1842년 12월 21일 백가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은 이처럼 무덤덤하게 보고했으나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는 11월 3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가 있는 개주현(蓋州縣) 양관(陽關)으로 떠났다. 브뤼니에르 신부는 만주대목구에서 사목을 하다 1846년 7월 흑룡강 인근에서 지역민들에게 피살된다. 지역민들은 그를 때려죽인 후 강변에 버리고 소지품을 약탈했다.

 

최양업은 양관에서 브뤼니에르 신부와 헤어진 후 조선 입국 방법을 찾지 못하고 2년째 고착 상태에 있던 페레올 주교를 돕기 위해 곧바로 소팔가자로 갔다. 페레올 주교는 1842년 7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로부터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자신을 벨리노의 명의 주교이자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교품을 준비하고 있기 위해 교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양업은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신학을 배우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요계관방소에 그려진 봉황성 책문도.

 

 

조선 입국로 모색

 

한편,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두 요셉 회장이 마련해준 과붓집으로 갔다. 그 집은 대략 길이 4m, 너비 3m의 단칸방으로 바닥은 흙으로, 천장은 거적으로 된 누추한 곳이었다. 둘은 이 단칸방을 침실, 식당, 공부방, 경당으로 사용했다. 둘은 교우들과 함께 매일 이 방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조선 입국을 모색했다.

 

“우리를 전혀 가엾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이웃들이 우리의 작은 방을 데이지 꽃 화병 두 개로 꾸며 주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도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제대에 꽃을 올려두었고 노란빛이 도는 종이로 벽을 발라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작은 피신처를 장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자주 우리를 만나러 와서 같이 저녁나절을 보냅니다. 누구는 돌배 한 움큼을 소맷자락에 넣어 가져오고 또 누구는 가시나무에 달리는 작은 빨간 과일들을 코 푸는 손수건이나 행주에 조심스럽게 싸서 가져옵니다. 지난번에는 매우 맛 좋은 밤, 차게 먹는 고구마 등을 가져왔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한 후에 그들은 작은 의자에 앉아서 우리와 함께 이 작은 간식들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십니다. 이 모든 것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만, 저는 조선에 가는 게 훨씬 더 기쁠 것입니다. 거기서 육체적으로는 덜 만족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더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2년 11월 14일 백가점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42년 12월 22일’ D-day가 정해졌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숙고 끝에 조선으로 떠날 날을 잡았다. 하지만 김대건 홀로 결행하기로 정해졌다.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과 함께 조선에 들어가길 간절히 원했으나 베롤 주교가 허락하지 않았다. 거지 행색으로 국경을 통과하겠다는 메스트르 신부의 말을 들은 베롤 주교는 충분히 숙고해 나온 계획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베롤 주교가 메스트르 신부의 조선 입국을 극도로 조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메스트르 신부는 백가점 도착 직후 조선 교회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길 안내인 천 요아킴을 조선 국경과 마주한 변문으로 보냈다. 천 요아킴은 18일간 변문에서 조선인 신자를 찾았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대신 여러 조선인으로부터 4년 전 박해가 일어나 300여 명의 천주교인과 외국인 2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국인 한 명은 중국말을 아주 잘했다고도 했다. 천 요아킴은 백가점으로 돌아와 이 소식을 메스트르 신부에게 전했고, 신부는 곧바로 베롤 주교에게 보고했다.

 

 

목자 잃은 순교의 땅으로

 

김대건은 남루한 옷으로 거지 행색을 했다. 옷 속에는 금 40냥과 은 100냥을 숨겼다. 행랑에는 빵 몇 개와 육포 몇 조각이 고작이었다. 김대건은 계획보다 하루 늦은 12월 23일 중국인 길 안내자와 함께 백가점을 출발해 나흘 후 변문에 도착했다. 그는 변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다가 길에서 조선 동지사 일행을 만났다. 동지사 일행 중에 있던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가 먼저 김대건에게 다가왔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방 신부를 입국시킨 인물로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양업·최방제와 유학길에 오를 때 국경까지 동행한 사이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둘은 서로 긴가민가했다. 그래서 김대건이 그에게 “천주교인이오?”라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면서 “세례명이 프란치스코”라고 했다. 서로를 확인한 후 김대건은 옆에 있던 중국인 길 안내인을 멀찍이 뒤따라오게 하고, 김 프란치스코와 나란히 걸으면서 조선 교회 상황을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들어 보니, 신부님들은 종교를 이유로 살해되었고, 200여 명의 신자도 사형되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지도급 인사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 프란치스코)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 마리아)은 칼을 받아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겪고 부친(김제준 이냐시오)은 참수되셨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의 집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신다고 합니다.…(앵베르) 주교님은 (모방ㆍ샤스탕)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서한을 보내 두 분의 신부님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다 같이 한 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고 합니다.…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이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 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는 있지만, 신부님들이 계시지 않아 마치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신학생 김대건이 1843년 1월 15일 백가점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이 노래지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김 프란치스코가 낚아채지 않았다면 김대건은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둘은 일행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잠시 쉬었다. 김대건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길 반복했다. 안정을 찾자 김 프란치스코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쓴 여러 통의 편지를 봇짐에서 꺼내 김대건에게 주었다. 김대건은 편지를 품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정성을 다해 라틴어와 교리를 가르쳐주던 모방 신부와 6년 전 이맘때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진한 정을 나눴던 샤스탕 신부, 그리고 자상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던 김대건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김 프란치스코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결의를 다졌다. “그래! 가자, 조선으로”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2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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